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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평하기가 힘든 글이다. 일단 자극적으로 보이는 형식부터 이야기해보자. <빨강의 자서전>은 부제 <시로 쓴 소설A Novel in Verse>이 보여주듯 운문소설이다. (비록 번역하는 과정에서 운율은 사라졌겠지만) 본문은 시처럼 문장 중간중간 줄이 바뀌고 함축적인 말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이 말들은 무엇에 대한 말일까? 고대 그리스 시인 스테시코로스의 게리온에 대한 서사시다. 대부분이 소실되고 극히 일부분만 마치 잠언 모음집처럼 순서 없이 남아 있을 뿐인 서사시 말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를 현대식으로 재창작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복원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 작업이 이뤄져야 하는 이유, 혹은 동기를 거트루드 스타인을 인용하는 에피그라프로 설명한다.
“나는 말들이 스스로 하고 싶어 하고 해야만 하는 걸 하는 것의 느낌을 좋아한다.”
- 거트루드 스타인
p.7
물론 나는 고대 그리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스테시코로스는 들어본 적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걸 알게 되었을까?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나온 설명문 덕이다. 기묘하게도 <빨강의 자서전>은 이 글이 쓰인 이유를 앞에서 먼저 설명하며 시작한다. 스테시코로스가 “형용사를 만들고 있었”던 시인-그럼 다른 품사들은 누가 만들었을까? 물론 말 그래도의 의미에서 ‘만들다’는 아니겠지만, 이런 의미에서 호메로스가 명사(“피”, “여자들”, “포세이돈”, “신의 웃음” 등)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옛날 이야기꾼들이 그렇듯 표현 방식이 언제나 전형적이었지만, 그 부분을 보완함으로서 스테시코로스가 형용사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셈이다-이라고 설명하고, 그의 게리온에 대한 서사시를 소개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 글들이 거의 소실되었다고 밝히며, 다음 글로 스테시코로스의 남아 있는 단편들을 소개한다.
III. 게리온의 부모
너 저녁 식탁에서 마스크 쓰겠다고 고집부릴 거면
그래 잘 자라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 그를 쫓아 보냈네
저 출혈하는 계단 위 뜨겁고 메마른 품으로
찰칵찰칵 미터기 올라가는 악몽의 빨강 택시에로
올라가기 싫어요 아래층에서 책 읽고 싶어요
p.14
그런데 본문을 보면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고대 그리스 시인의 서사시의 흔적에서... "미터기 올라가는 택시" 같은 말이 나올 수 있을까? 이 부분이 또 골 때리는 부분이다. 재창작은 이미 여기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마치 실제 시인 것처럼 하고서 뻔뻔하게 창작을 내미는 모습이 상당히 익숙하다. 보르헤스의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말이다. 백과사전 이야기를 하며 실제 인물 사이에 가짜 인물을 섞어놓고, 실제로 한 말과 창작을 뒤섞고 하는 식으로.
그런 다음에는 스테시코로스가 헬레네로 인해 실명된 이야기에 대한 증거 자료로서 인용문들을 부록으로 첨가하고, 그 문제에 대한 정리랍시고 질문들을 리스트처럼 내놓는데, 이 질문들 역시 점차 이어지면서 소설처럼 이야기가 생긴다. 골 때리는 일이다.
16. 만약 그녀가 전화를 받는다면 우리는 (흔한 말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스테시코로스에게 수화기를 건네줄 것인가.
17. 만일 우리가 스테시코로스에게 수화기를 건네준다면 그는 헬레네의 외도에 대한 진실을 전보다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주장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거짓말쟁이라고 인정할 것인가.
p.27
그런 다음에야 본문이 시작되지만, 본문이 끝나고 나서는 이제 스테시코로스와 '나' 사이의 인터뷰가 나온다. 이 부분은 아래 인용한 것처럼 묘하게 거트루드 스타인식 글쓰기를 연상시킨다. "A rose is a rose is a rose is a rose"라는 문장으로 유명한, 반복하고 변주하면서 늘려나가는 그 기묘한 방식. (비록 <앨리스 B. 토클라스 자서전>과 외엔 읽어본 적이 없기는 하지만... 그러고 보면 후자에서도 헬레네가 나오는 게 묘하다. 비록 여기에서의 헬레네는 괴테의 <파우스트>에서의 헬레네이지만, 그 헬레네는 어쨌든 그리스 신화 속의 헬레네이니 스테시코로스의 눈을 멀게 한 헬레네와도...)
나: 아니라고요
S: 당연히 나는 내가 본 것을 보았습니다
나: 당연히
S: 나는 모두가 본 모든 걸 보았습니다
나: 아 그렇군요
S: 아니 나는 내가 보았기 때문에 모두가 본 모든 것을 말하는 겁니다
p.246
길었던 실험적 형식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본문에 대해 이야기하면, 게리온의 이야기는 성장소설이 된다. 마치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도 같이 뭔가 결여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현현의 순간과 함께 예술가로 온전히 성장해나가는 이야기 말이다. 그 과정에서 헤라클레스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며 푹 빠지는 게 괴랄하지만. 그러니까 앤 카슨은 게리온을 죽이는 헤라클레스라는 관계로부터, 미지의 땅에서 온 헤라클레스에게서 아름다움을 느껴 죽기 직전에 느낀 기묘한 감정을 이끌어낸 셈이다. 그 부분을 퀴어스럽게 써내면서 어떻게 자신의 결여를 충족하고자 하는 마음이 성애로부터 예술혼으로 바뀌어가는지를 이야기한다.
사실 본문 자체는 그리 큰 감흥이 없었어서 더 할 말이 없지만, 딱 한 이야기만 더 하면 괴물과 예술가의 대비를 볼 만하다. 둘 다 특별한 존재이고-긍정적 방향인지 부정적 방향인지를 따지지 않으면-일반적인 삶에서 부조화를 경험한다. 스스로를 괴물로 만드는 무언가는 동시에 스스로를 특별하게 만들기도 하고, 만약 그것을 자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특별함을 승화시킬 수만 있다면 그 괴물은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나도 읽고 본문은 큰 감흥이 없었는데 나름 연결고리 자첸 신선했음 후기 잘 읽었어
ㅋㅋㅋㅋ 택시 ppap 골 때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