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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읽어본 하루키의 글 중에서 가장 감명 깊었지만, 그런 감상을 입 밖으로 내기엔 조금 부끄러운 종류의 글이었다. 어릴 적에 읽었을 때에 그렇게나 좋아했던 이유도 알 수 있었고, 지금도 좋지만 동시에 얼굴이 화끈해지는 구석이 있다. 아마 노골적으로 사람의 감정을 감성적으로 이야기하고, 그 다루는 방식이 지금은 상당히 익숙한 방식이라 그럴 것 같다. (신카이 마코토가 자신이 이 책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고 말한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익숙한 것이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부정적인 효과를 더 주곤 하지만 말이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제목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두 개의 독립적인 세계의 이름들이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의 이야기로 시작한 책은 바로 다음 챕터에서 "세계의 끝"에서의 이야기를 하고, 그 두 이야기가 번갈아가면서 나온다. 처음에는 이 두 이야기가 왜 함께 나오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뒤로 갈수록 이야기가 엮이고 결말에 있어서는 이미 모든 것이 분명해져 있다. 이 글은 자아에 대한 이야기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뭔가 구체성이 떨어지는 "조직", "공장", "기호사", "야미쿠로" 같은 용어들이 난무하는 첩보물이다. 아마 하루키가 원래 글을 쓰는 방식이 그렇듯, 그 분위기를 위해 고의적으로 남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정보를 암호화하는 일을 위해 박사를 만나러 갔다가 음모 또는 항쟁에 휘말리게 되고, 해결을 위해 다시 박사를 찾으러 가는 전형적인 스토리가 이 이야기에서 흘러간다. "세계의 끝"은 그 느낌과는 정반대로 장황하게 풍경을 묘사하고 무언가 동화적인 느낌을 주는 마을에서의 이야기를 한다. 주인공은 기억도 없고, 자신의 그림자를 문지기에게 분리당한 채 도서관에서 여자와 함께 "오래된 꿈"을 읽는다.
그런데 이 어떻게 보아도 이어질 수 없을 것 같던 이야기가 갑자기 이어져간다. 정확하게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부터의 탈출구가 "세계의 끝"이라는 걸 알게 된다. 주인공의 무의식 어딘가에 있는 상상 속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고, 이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현실 대신 "세계의 끝"이라는 자기만의 세계를 영원히-죽지 않고-인식하게 될 거라는 통보. 그렇게 "세계의 끝"은 지금까지 인지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무게감으로 독자에게 다시 돌아온다. 그렇게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의 주인공은 방랑 끝에 죽음 혹은 불사의 세계를 맞이하게 되고, "세계의 끝"에서의 주인공은 그림자와 함께 도망치는 대신 그림자를 내보내고 자신은 마을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이런 종류의 유아론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찾아보면 꽤나 많다. 가깝게는 SF 작가 필립 K 딕의 장편들이 대부분 그러하고, 조금 멀게는 보르헤스의 단편 중 <비밀의 기적>에서 비슷한 소재-자신의 사고만이 인지하는 영원한 시간-가 쓰인다. 그러나 다룬 방식이 전혀 다르다. <세계의>는 유아론적 세계를 선택하게끔 만든다. 좀 더 풀어서 쓰자면, 사람이 실제로 살아가는 현실과 자신의 상상 속의 자폐적 세계를 대비시키고, 최후의 최후, 그 자폐적 세계를 긍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거기서 살아가는 이들을-정확하게는 그 세계의 한 여자만을-위해 현실을 버리는 선택을 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글은 일종의 연애소설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보다는 일종의 성장소설로 읽었다. 그리고 성장소설의 문제는 읽는 사람이 나이가 좀 들고 나면 읽으며 낯이 부끄러워진다는 점이다. 그것도 보통 일본식의 감정 과잉이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본격적으로 "세계의 끝"이 절정 부분에 달하면서 "마음"과 "선택"을 진지하게 논하고 있는 걸 보고 있자면 슬슬 페이지를 넘기기가 두려워진다.
"너는 확실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러나 그런 기분은 어디에도 이르지 못해. 왜냐하면 그녀에게 마음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야. 마음이 없는 인간은 단지 걸어다니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아. 그런 것을 손에 넣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 그런 영원한 생을 너는 원하고 있는 거야? 너도 그런 허깨비가 되고 싶은 거야?"
"그래도 나는 그녀를 여기에 남겨두고 갈 수는 없어. 그녀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고 원하고 있어.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어."
2권, p.209
"맙소사." 바로 다음 대사가 내 심정을 대변해준다. 어쩌면 좀 더 새벽에 책에서 나온 것처럼 위스키에 쿨 재즈 레코드나 하나 돌려두고 읽었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재밌긴 하지만 돋는다. 몇 년 전에 봤던 <브레이브 스토리>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가 생각나기도 한다. 사실, 이 책에서 섹스를 뺀 다음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것도 좋은 선택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고 있었다. 90년대 후반에서 00년대 초반의 오타쿠 문화는 이런 것들이 많았으니까.
세계와 사람의 대비는 대체로 주인공 한 명과 주인공을 둘러싼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세계의>는 그 틀을 뒤집고, 세계와 사람의 대비를 기묘한 방식으로 만든다. 주인공이 갈등을 빚고 있는 세계는 바로 그 자신이다. 그리고 그 세계와 함께 무게추에 올려지는 것은 한 사람의 여자다.
"넌 이 마을을 만들어낸 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아?"
"알고 싶지 않군. 난 이미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야. 그런 것은 진작에 벌써 알고 있었어. 이 마을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너 자신이라구. 네가 이 모든 것을 만들어냈지. 벽에서부터 강, 숲, 도서관, 문, 겨울,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 말이야."
2권, p.326
흔히들 오타쿠 문화에서 '세카이계'라고 일컫던 것들이 그랬다.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이라든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라든가. 동화 속에서도 비슷한 것이 있지 않았느냐 하는 사람도 많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상상 친구, 상상 세계와 놀다가 어른이 되면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이야기들 말이다. 대표적으론 <피터 팬>이 있다.
그런데 위에서 뭐라고 했던가? 주인공은 최후에 이 상상 세계를 현실 대신 선택한다. 그 원인이 이 세계 역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는 비교보다는 동정적 선택에 더 가깝긴 했지만 어쨌든 한 발을 내디뎠다. 현실보다도 상상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선언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나 역시 이런 모티브들을 좋아하지만, 어쩌면 여기서부터 오타쿠 문화가 비난받곤 했던 '자폐성'이 더욱 적극적으로 심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 부분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반화와 비난은 일단 제쳐두자. 내가 이 책을 하루키의 글 중 가장 좋아하고, 지금도 마찬가지인 이유는 이런 방식의 글에서야말로 그의 장점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옛날 음악, 술, 섹스 등의 물건들을 기호로서 사용하는데 능숙하고, 그것을 허무하게 소비한다. 거창하게 말하면 데카당스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실제 우리가 사는 현실과는 조금 다르게 약간은 겉멋 든 것처럼 기호로서 소비되는 물건들은 우리에게 조금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그게 내가 다른 하루키 책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유다.
그런데 <세계의>는 다르다. 처음부터 환상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세계의 끝" 파트는 말할 것도 없고,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역시 위에서 인용한 누가 봐도 과하게 힘이 들어간 용어들을 잔뜩 남용하면서 이들을 기호로서만 흩뿌리고 있다고 대놓고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여기에서의 모든 말들과 개념들은 마치 풍선처럼 가볍게 떠올라서 이리저리 마음대로, 하루키가 원하는 방식대로 부유하고 있다는 게 분명하다는 점이다. 아예 그렇다면야 독자 역시 떠오르면 그만이다. 아마 이 부분이 내 부끄러움과는 별개로, 이 글을 읽는데 있어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참여하도록 도와줬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하루키를 읽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다.
한자랑 영어를 같이 써서 그런지 부기팝 시리즈 제목 느낌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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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충) -포-는 포스트 모더니즘이고 -모-는 모더니즘이다
좋군
.
하루키는 1Q84에서 체호프의 권총을 언급했는데, 정작 본인은 그런 권총을 쏘지도 않고 마구 늘어뜨리더라구요... 와닿는 무게감은 조직 공장 야미쿠로가 더 무거운데도 그들의 등장횟수는 렌터카 직원, 택시기사랑 비슷하구요. 하지만 하루키 소설은 항상 느끼는게, 그런 플룻의 낭비마저도 이야기의 일부로써 술술 들어온다는게 참 신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