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인간의 경계와 한계

테드 창, <숨>


 이제 인간 실존에 대한 물음의 운을 뗄 때, 인공지능의 한계와 효과 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조금 진부해진 것 같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승부는 딥러닝 기술이 인간의 영역을 정확히 어디까지 침범해왔는지 가시적으로 보여주었고, 한편에서는 그것이 정녕 인공지능에 대한 인간 지성의 패배가 맞는지 반문하는 종류의 담론이 펼쳐지기도 했다. 알파고의 기력은 실시간으로 매 대국상황을 데이터베이스 내의 모든 기보에 대해 교차검증하는 것에 불과하니, 인류 대표인 이세돌은 “기사”와 바둑을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대국의 흐름에 집착해야만 기사가 되는 것일까? 흐름은 곧 시간이다. 시간에 연연하고 시간에 집착하고 시간 속에서만 살아가는 인간과, 그렇지 않은 딥러닝 기반 자동 바둑로봇의 대국은 과연 부당한 걸까? 시간의 안과 밖에 대한 논의는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기독교의 교리증명이다. 삼위일체에 따르면 예수는 곧 여호와이기도 한데, 그럼 자신을 배신할 것이 뻔한 유다를 여호와는 어째서 내버려두었는가? 답은 여호와께서 시간 밖에 계시기 때문이다. 유다가 예수를 배신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몸담고 있는 인간의 인식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시간 밖에 계시는 여호와께서는 이 모든 사건을 동시에 인지하신다. 알파고가 모든 대국상황을 동시에 인식하듯이. 달리 말하면, 이세돌은 인공지능 바둑기사가 아니라 바둑의 신과 겨루었기 때문에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의 교리증명에 따르면 그렇다”는 식의 삼단논법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손을 떠난 객체에 대해 변명하는 과정의 구조적 동일성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인공지능이, 비록 아직은 이론적으로나마, 자신의 지성을 앞질러가는 모습을 본다. 또, 하나의 개체에 불과한 인간이, 인간 전체 지성의 집산을 앞질러가는 모습을 본다. 이 놀라운 청출어람!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게걸스러움에 주목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인공지능, 또는 만들어진 천재를 자기 몸에 집어넣어 보기도 하고, 그들의 몸에 푸아그라를 만들 때 쓰는 식도 파이프를 꽂아보기도 한다. 그렇게 인간은 스스로 진화해가면서, 역설적이게도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다(어디까지나 인지적 측면에서).

 이제 앞서 말했던 변명이 인간 스스로에게 향할 차례이다. 인공지능, 인류보다 똑똑한 인간, 또는 그들을 잡아먹은 인간은 인간 전체를 동시에 관망한다. 이러한 동시적 시선이 신의 재현을 가능케 한다. 데이터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를 수렴해 정언명령을 만들 것이고, 프로세서들은 모든 연산을 동원해 그 정언명령을 토대로 한 재화의 사회적 분배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자율성은 어디로 갔지? 그걸 따지는 건 부당하다. 이미 인간의 자율성은 인간이라는 이름의 신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물론 이상의 논의는 미래에 대한 하나의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숨>의 저자인 테드 창 또한 이러한 세계에 디스토피아적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의 견해도 함께 수록하고 있다. 그의 단편들은 날카롭지만, 문제 제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만들어낸 상상의 톱니바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만 이해하면 그 서사가 가리키는 방향에 무엇이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소프트웨어 객체들의 생애 주기>라는 단편에서는 “뉴로블래스트 계열의 디지언트”로 대표되는 “하나의 세대”가 인간-너머(잡아먹은 인간을 이렇게 부르도록 하겠다)안에서 어떻게 독립된 개체로 성장해가는지를 다루고 있다. 디지털 객체들은 인간의 수요에 의해 탄생했지만 인간-너머에서 살아가는 동안 학습하고 적응하며, “뉴로블래스트 계열”이라는 세대정신과 “디지언트”라는 시대정신을 구축한다. 여기서 그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기로 한 섹스머신 회사는, 이 서사를 인류문명 전체로 환원할 때 결혼제도의 야만성을 은유하는 전개로 이해할 수 있다. 데릭은 자신의 디지언트 아이들을 결혼제도에 맡긴다. 한편 애나는 자신의 디지언트 아이를 껴안고 지극히 르네상스적인 혼란에 빠진다. 이 아이들이 인간과 섹스할 준비가 되어있나? 그들을 구속하는 자신에게는 어떤 전제가 있나? 인간이 이 존재들을 사회화시킬 때까지 보호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디지언트들은 기술 장벽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플랫폼으로 넘어가야만 한다. 이는 언뜻 보면 모든 이가 성장 과정에서 알을 깨고 날아가야 한다는 데미안의 은유와 유사하지만, 사실 알 밖에 새로운 알이 있음을 디지털 플랫폼의 형태로 암시하는 모습에서 그와는 사뭇 다르다. 플랫폼은 늘 새로 출시되고, 사회적 존재가 유지되려면 우리는 다음 발판으로 늘 나아가야만 한다. 이는 세대정신을 공유한 존재들이 시대정신을 이어나가는 모습에 대한 은유로 보인다.

 테드 창이 펼쳐놓은 서사에 대해 이러한 넘겨짚기를 해봄에도 불구하고, 그는 곳곳에 나와 같은 비평가들이 늘어놓을 일차원적 치환에 대한 경계를 위트있게 남겨두었으니 그걸 찾는 즐거움도 있다. 기본적으로 소설 읽기는 즐거운 일이니까. 테드 창의 독자들도 지적 열망(또는 지적 열패감)에 빠져 소설의 즐거움을 잃지 말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