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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읽은 문학 작품들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으로 한트케의 <관객모독>을 꼽고 싶다. 나는 그에 대해 짤막한 평론을 쓰고자 하는데, 이것은 한트케의 희곡에 대해 남기는 감상이면서 현대희곡의 실험적 성격 그 자체에 대한 메타적 반성이기도 하다. 나는 희곡을 많이 접해본 편이 아니기 때문에 불충분한 독해가 될까 두렵지만, 부족한 부분을 여러분들께서 채워줄 것이라고 믿는다.
현대희곡에서 메타픽션적인 시도는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소극적으로는 여러 희곡의 장르들을 - 비극, 희극, 불바르극, 시민극 따위를 - 뒤섞어 새로운 장르로 종합하는 것에서(콕토의 <지옥의 기계>가 대표적일 것 같다)부터, 더 적극적으로는 희곡의 가능성과 연극이 상연되는 허구적 시간과 장소 그 자체에 대해 묻는 작품들도 있다. 우리와 동시대에 이르면 이미 다 언급하지 못할 만큼 많은 시도들이 이루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메타픽션적 희곡의 선구자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브레히트와 베케트일 것이다. 브레히트와 베케트의 희곡은 그 스타일에서 상이하지만 관객들에게 무대 위가 무대 위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려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닮아 있다. 정통적인 미적 체험에서는 무관심적 관심이, 모더니스트들의 미적 체험에서는 몰입이 중요한 개념으로 부각되는 것과는 반대로 이들의 희곡은 관객과 작품 사이의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소격효과는 달리 본다면 무대 위가 무대에 불과한다는 것을 작품 그 스스로가 말하는 기법이다.
<관객모독>은 정확히 그 반대 방향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트케는 무대를 외부 세계 속으로 밀어넣음으로써 연극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허무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나 이런 제스처가 정말로 거리를 없애기 위한 시도라고 독해하는 것은 순진하다. 고작 배우의 말장난 따위로 무대와 관객 사이의 거리가 없어질 수 있다면 연극이란 장르는 애초에 성립되지 못한다. 아무리 투박하게 경계를 절단하려 하더라도 연극의 공간과 시간은 하나의 가상으로 남으며, 그 가상은 현실에 의해 침해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럼에도 여전히 가상이란 사실이 부정될 수는 없다.
롤랑 바르트가 지적하는 것처럼(아마도 'S/Z'의 부록에서 언급되었던 것 같다) '무의미'를 '의미'하고자 하는 시도는 무기력한데, '이것은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언술조차도 무의미라는 내용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무의미하지 않다. 이 무의미의 패러독스는 한트케의 연극에도 적용되며, 한트케는 무대장치와 관객 사이의 거리를 줄이려고 시도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시도는 관객들로 하여금 무대의 존재를 보다 선명하게 되새기게 한다. 그러므로 <관객모독>은 어떤 점에서는 무대를 외부 세계로 밀어넣는 작품이 아니라 소격효과를 구현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배우가 끊임없이 관객에게 직접 말하려고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허구의 거리가 놓여 있다는 아이러니가 이 희곡의 중추를 이룬다. 다시 말해, '이 연극에는 눈속임이 없다'는 선언은 또 하나의 눈속임이 된다. 연극은 커뮤니케이션을 가장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미적 가상의 체험으로 남는다.
<관객모독>의 극적 긴장은 이처럼 서로 상충되는 두 방향성 사이에 놓여 있다. 외연적으로 희곡은 거리의 허물기를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포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무대와 현실 사이의 허물어질 수 없는 거리를 상기시키고 있다. 배우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그러니까 관객들을 향해 한 바탕 욕설을 쏟아내는 순간에도 여전히 연극은 단순한 가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암시된다. 이런 긴장을 느낄 수 없다면 <관객모독>에서의 전위적인 시도는 기껏해야 메타픽션적 시도의 흔해빠진 되풀이로 읽힐 것이다.
다만 긴장을 읽어낸다고 해도 여전히 애매한 부분은 남는다. 현대예술의 예술 해체적 성격은 그것이 관습에 대한 저항일 때만, 즉 상투화된 사건들의 따분하고 무의미한 재현에 대한 저항일 때만 의의를 획득할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메타픽션이 더는 전위적 예술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현대 희곡에서 무대장치 그 자체를 건드리는 행위는 이제 너무 일반화되어서 오히려 새로운 관습으로 자리잡았다. 나는 한트케의 이 희곡이 종래의 메타픽션적 시도들보다 더 탁월한 부분을 찾아내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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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런 면에 집중하면서 읽어는데 어쩌면 영 다른 해석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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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상평같은거 볼수록 보고싶지않은 문인은 한트케야
확실히 연극으로 보는 게 아니면 개노잼일지도
나는 이거 읽으면서 와 힙합이다 생각했는데 알고보니까 우리나라에서 관객모독 연극연출 양동근이 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