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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주의 작가 하면 주로 꼽히는 작가 중 하나, 토니 모리슨의 처녀작이다. 자신의 삶과 상당히 괴리되는 주류 문화 기준의 압박으로부터 피식민 민족이 어떤 식으로 반응하게 되느냐, 하는 주제를 가장 잘 풀어낸 글이기도 하다. 어렵게 말했지만, <가장>에서 이를 풀어내는 방식인 미적 기준에 초점을 맞추면 딱히 그럴 것도 없다. 애초에 생김새가 전혀 다른 흑인들이 백인들의 미적 기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아름다움에 반응하는가 하는 이야기다.
주인공인 피콜라는 기준에 완벽하게 순응하는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그 기준에 익숙했고, 파탄난 가정에서의 삶 탓에 비판적인 사고를 할 능력이 생길 수 없던 것도 컸을 것이다. 모든 백인의 속성들을 곧 아름다움의 속성으로 두고, 백인 아역 배우("메리 제인") 제품을 소비하면서 자신을 그 배우와 동일시한다. 그리고 온갖 불행을 겪은 후 결국 미쳐버리기 직전, 애타게 찾는 것도 제목에서 나온 "가장 푸른 눈"이다. 이 가장 푸른 눈만 있었더라면, 자신이 불행하게 살지도 않았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못생겼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외의 모든 문제에서도 그랬을 거라고.
물론 피콜라가 이야기의 중심인물인 것은 맞지만, <가장>에서는 다양한 인물들을 제시하며 이 사회에서 각기 어떤 반응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는지를 한꺼번에 보여준다. 주 화자인 클라우디아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지만 '보편적 기준'에 순응하지 않는다. 피콜라의 어머니인 폴린은 기준에 억눌리는 삶을 살다 자신의 정체성을 하인이 되는 것으로부터 찾는다. 아버지인 촐리는 백인으로부터 받은 수치심을 자기보다 더 약한 상대에게 돌리는 삶을 산다. 그리고 그 외의 속물적인 혼혈들도 다수.
흥미롭다면 흥미롭고, 툭 튀어나온 느낌이라면 그럴 부분은 이를 읽으면서 서술자의 판단이 지문 중에 드러나는 부분이 꽤나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화자로 빈번하게 나오던 초점화자 클라우디아의 판단이라고 생각했지만, 잘 읽어보니 전지적 시점에서 쓰인 글에도 그런 문장이 빈번했다. 예를 들면 아래의 인용.
피콜라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밤 푸른 눈을 달라고 기도했다. (...) 피콜라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피콜라는 보이는 것만,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의 눈만 볼 것이다.
pp.60-61
클라우디아가 화자인 부분은 대체로 '나'라는 주어를 사용하고, 애초에 클라우디아가 피콜라의 일상적 삶과 내면 심리를 알고 있을리가 없다. 이와는 별개로 클라우디아가 화자일 때의 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는 걸 보면, 어쩌면 첫 글을 쓰느라 그 조절에 있어서 실수를 한 것일수도 있겠다.
다른 특징적인 부분은 <가장> 맨 첫 부분에 나오는 교과서 지문 발췌이다. 백인 문화권에서 정상적으로 보이는 풍경이 피콜라에겐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고양이, 어머니, 아버지, 개, 친구, 모두가 제인(=피콜라, 피콜라가 먹던 메리 제인 사탕을 생각해보라)를 무시하며 함께 놀아주지 않는다. 이 지문은 마침표와 띄어쓰기 없이 반복되며 자폐적이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만든다. 그리고 이후, 전지적 시점에서 나오는 피콜라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두 줄씩 인용된다. 인용되는 부분은 각각 피콜라가 지문과는 달리 충족하지 못하는 요소들이 들어가는 부분이다. 가족, 고양이, 어머니, 아버지, 개, 그리고 친구까지.
친구 부분은 그 음습함이 극에 달한 부분인데, 완전히 미쳐버린 피콜라는 자신의 눈이 푸르게, 아름답게 변했다고 생각하며 또 하나의 자신의 자아와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눈이 가장 푸르지 않다면, 자기보다 더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냐고 정신병적 집착을 드러낸다. 그 또 다른 자아조차 이 집착을 이기지 못하고 질려서 그녀를 떠난다. 그렇게 피콜라의 삶은 그녀가 기대하던 모든 것들에서 실패하고, 이를 클라우디아의 눈으로 미래에서 바라보며 글이 끝난다.
그러고 보면 같은 미국계 흑인 여성 작가들은 이 미적 기준에 대한 글을 자주 쓰는 것 같다. 예전에 읽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아메리카나>에서도 이 주제를 길게 이야기하는데, 글의 분위기가 <가장>에 비해 훨씬 밝고 명랑했기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를 이야기했다. 흑인의 머리카락 관리에 대한 이야기다. 백인 같은 머리 모양을 하기 위해 곱슬머리를 억지로 태우고 약물을 넣어 펴고, 그 영양 잃은 머리카락을 다듬어 바비 인형처럼 사느니 흑인들 고유의 머리 모양을 하겠다는 식이다.
그에 비하면 <가장>은 얼마나 서슬 퍼런지. 최근 다시 읽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도 그렇고, 자폐적인 소설들을 최근 많이 읽은 것 같다. 다음으로 읽을 마틴 에이미스의 책은 좀 더 밝은 느낌으로 보여 위안이 된다.
P.S. 그러고 보니 이 책도 들녘에서 나왔고 품절이다. 쿳시처럼 재판되지 않을까 희망해본다...
나도 탈식민주의 관심은 많은데 정작 읽어본 건 쿳시랑 스피박이 땡이네... 이 사람 책도 좀 찾아볼까
훨씬 노골적인 느낌 - dc App
스피박은 안 읽어봐서 모르고... 쿳시는 어쨌든 매우 관념적으로 표현하는 작가니까 - dc App
스피박은 '서발턴은...' 쓴 아지매니까 어차피 소설 쪽은 아니고... 쿳시도 야만인을 기다리며 같은 쪽은 꽤 노골적이었다고 생각...
야만인/철의 시대 이 둘이 탈식민주의색이 가장 강한듯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