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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영화, 황당무계의 반기호>는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뛰어난
예시이다. 아쉽게도 곡선과 히치콕에 대해 언급한 전반부만
번역되었으나, 그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위대한 저서 <히치콕과의
대화>에서 프랑수아 트뤼포가 히치콕을 카프카, 도스토예프스키,
포우와 함께 불안의 예술가에 속한다고 말한 이래, 적어도 필자가
아는 한 그에 관한 연구는 매번 정신분석학을 통한 무의식 세계로의
언급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방금 전 언급한 글에서 하스미는
지금까지의 히치콕 연구를 `짜증나게 할 정도로 통속적인 무의식
세계에의 언급` 이라 일축하며, 대신 원환의 주제를 가지고 히치콕
작품을 분석한다. 임재철 평론가의 해설에 따르면, 시게히코는
이야기의 틀에 포섭되지 않는 과잉의 부분에 대해 남달리 예민하다고
한다. 과연 그렇다. 반복되는 원환과 구체의 인상으로 작가의 작품
세계를 파헤치다니, 이 글을 읽기 전에는 상상도 못한 일이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글 쓰는 방식은 중독성이 강하다. 현학적인 어휘
사용, 도발적인 어투, 호흡이 긴 문장. 비평가로서는 드물게도 자신의
색깔이 강렬하다 보니 저절로 따라해보고 싶다. \'연주자\' 로서의
비평가를 주장하는 그다운 발상이지만, 여전히 비평이 지적 연주가
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연주는 원곡을 몰라도 그 자체로 들을 수
있지만, 비평은 그렇지 않다. 정리하자. 근본적으로 비평은 타인의
창작물에 기생하는 행위다. 근데 하스미의 비평은 창작보다 더
존재감을 드러낼 때가 많다. 글쓴이에게는 그 존재감 하나하나가
질문이다. 지금까지 쓰면서도 계속 자신이 느끼는 공허감도 바로
답하지 못한 질문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제야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