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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서 가족이란 애매한 개념이다. 유전적으로 이보다 가까운 집단을 찾기에는 불가능함에도 사회적인 관계에서 가족보다 친밀한 집단은 여럿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개 회사나 국가와 같은 거대한 집단 속에 위치한 스스로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이나 생각을 갖고 살아감에도 이상하게 가족 내에서는 무언가 애매한 위기감을 감지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생을 살아감에 따라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관계는 수도 없이 경험하면서도 생물학적으로 연결된 집단은 그 체험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질문: 부부는 사회적으로 연결되는 반면 자식과 형제사이에서는 생물학적으로 연결되는 집단이다. 그렇다면 가족은 사회적인가 생물학적인가? 사회적으로 연결된 부부는 계속해서 사회적인가? 부부끼리 닮는 다는 말은 생물학적 관계로의 변화를 암시하는가?) 결국 우리는 가장 가까운 개념에 대해서도 명확한 답을 갖고 살아가지 않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상당한 게으름이 아닌가? 갑자기 매일보는 존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기려 한다.



문화와 지역에 따라 가족이 갖는 세부적인 의미는 달라지긴 하나 가장 근본적인 뿌리라는 생각은 대부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동양처럼 거대한 대가족을 이루었고 지금도 잔재가 남아있는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과거 동양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을 보면 삼대를 멸하라는 명령에 수십명이 넘는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가족이라면 이미 하나의 사회가 아닐까?) 개인주의적이라고 흔히 생각하는 서양 또한 가족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특히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 부분에서 독보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문화적으로 지역적으로 분절된 영토에서 새롭게 개척해나간 인간들에게 가족은 개인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유일한 집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이 아무리 끈끈하게 묶인 집단이라 할지라도 그 구성원은 결국 개인이고 아무리 가족애를 강조하고 묶어 두려 해도 개인은 그로부터 벗어나기 마련이다. 포크너는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를 쓰며 이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농촌이 주가 되어 가족이라는 개념이 가장 짙게 남아있을 남부 출신 윌리엄 포크너는 거꾸로 가족 내에서 분열되는 개인을 발견한다.

가족 행사라 하면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중요한 일임이 틀림없고 그것이 어머니의 죽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진정으로 가족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가? 어머니의 시체를 묻기 위해 여정을 떠나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가족 내에 분열된 개인들을 발견한다. 모두가 죽음을 깊게 생각하며 슬퍼하지 않고 떠올리는 사람조차도 길게 잇지 않는다. 오직 등장인물들의 내면만을 서술하며 이는 더욱 심화된다.

아버지인 번드런은 어느 순간부터 아내를 향한 슬픔보다는 사후처리 자체에만 넋을 놓고 몰두한다. 아예 어린아이인 바더만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슬픔 보다는 혼란만을 떠올리고 가장 의무에 따르는 장남인 캐시조차도 어머니의 유해보다는 이를 둘러싼 관에만 집중한다. 오히려 가정의 어머니의 죽음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주변의 이웃들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족인가? 가족 내의 가장 중요한 행사조차도 개인들의 내면을 이어주지 못한다면 어찌하는가? 혈연 관계 만으로 가족이 되는가? 가장 가까운 집단 내임에도 서로의 생각이 엇나간다면 그저 그런 공동체와 무엇이 다른가? 가족을 이어주는 것은 생물학적 요인인가 관계의 깊이인가?

한가지 흥미로운 궁금증이 생겨난다. 장녀인 듀이 델은 소설의 시작부터 임신을 숨기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는 태아의 내면 묘사를 찾을 수 없다. 가족의 다음 세대를 책임질 세포에 대해 주변인물들의 은밀한 대처만 드러날 뿐이다. 태아는 인간인가? 그에게 내면의 묘사를 부여할 수 있는가? 태아는 가족의 구성원인가? 포크너가 잠정적으로 결론 내린 장소에서 우리는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듯 하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의 출간 후 40년 가까이 지난 뒤 미국 남부보다 더욱 아래에 존재하는 중남미 대륙에서 소설사의 획을 긋는 또다른 위대한 소설이 탄생한다. 그 사이 가족의 분열은 더욱 심해졌고 개인주의는 퍼져 나갔다. 히피 세대의 범람을 통해 개인의 발을 묶는 소규모 집단은 거부되고 마약의 힘을 빌려 타인과의 교접을 통한 새로운 집단의 형성이 주를 이룬다. 가족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가? 서로 다른 세대가 모여 사는 집단보다는 공감이 쉬운 같은 세대 간의 모임에 이끌리는가? 이런 시기에 마르케스는 《백년의 고독》 에서 개인과 가족 사이의 새로운 면모를 찾아낸다.

돈키호테 이후 소설은 언제나 개인의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소설 속 개인이 새로운 자손을 남긴 채 최후에 이르는 걸 목격하는 일이 흔치 않다. 한 소설은 한 세대에서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누군가는 대하 소설을 예시로 들어 반대할지도 모르나, 생각해보자. 대하 소설은 결국 세대의 교체를 거대한 분량을 통해 실현한다. 이는 서로 다른 내용의 소설을 같은 제목 아래에 묶어 두는 눈속임일 뿐이다. 여러 세대가 교차하는 대하 소설 또한 개인들의 집합을 통해 소설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개인을 다루고 있다.

《백년의 고독》 은 개인의 탐구라는 소설의 근본적인 토대를 완전히 뒤집어 버린다. 개인은 오로지 가족 내에서, 집단 내에서 녹아 든 채로만 존재한다. 각각의 개인이 얼마나 개성이 뛰어나든, 얼마나 기존의 가족 구성원과 차이가 나든, 생물학적으로 연결이 되지 않았든, 바람직하지 못한 관계를 통해 태어나든 전혀 상관이 없다. 한 번 집단으로 포함되어 개인에게 각인된 이상 가족은 불멸의 족쇄가 되어 영원히 추적한다.

《백년의 고독》 에서 꿈틀거리는 것은 기계적으로 쌓아 올려진 여러 개인들의 몸짓이 아닌 동명의 호세-아우렐리노 아래 혼합되어 여러 세대를 걸쳐 동시에 존재하는 거인의 뒤척임이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 죽음에 이르더라도 그것은 전혀 상관이 없다. 어떻게 보면 고독한 것은 개인이 아니다. 진정으로 고독한 것은 모든 개인을 아래에 두고 홀로 백년을 버텨낸 가족이라는 생물 뿐이다. 가족 스스로가 종말에 이르지 않는 한 핏줄은 영원히 이어지며 거인은 잠들지 않는다.




40년을 사이에 두고 두 작가의 사유는 가족과 개인의 실존에 대한 여러 측면을 열어 줌과 동시에 소설의 정신에 대한 한 가지 명심할 점을 일깨워 주는 듯하다. 우리들은 포크너의 가족처럼 개인으로 분열되어 존재한다고 느끼면서 어딘가 우리를 묶어 둔 마르케스의 가족 또한 실감한다. 결과적으로 완전히 반대되는 사유임에도 불구하고 두 소설의 가능성은 개인 내에서 융화된다. 삶이 단순한 정의 몇 가지로 요약되지 않는 것처럼 모든 가능성을 포용하며 서로 다른 주장이 동시에 실현되는 것이 바로 소설의 세계이다.

소설을 포함한 모든 예술 영역이 주관적이라는 말의 진실은 단순히 취향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실존과 이를 포착할 그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함축한다. 상이한 생각들의 공존을 두고 소설은 그렇게 발전해왔다. 자료로만 남은 고대 그리스의 고전부터 현대를 반영하는 오늘날의 소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예술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개념으로 환원되는 엄격한 시대로부터 반항한 이런 자유로운 정신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