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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본 감상문은 쿤데라의 에세이집 《배신당한 유언들》 에서 8번째 에세이인 '안개 속의 길들' 를 읽고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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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소설가들 중 카프카 이상으로 후대에 영향을 미치면서 현대 사회에 대한 탁월한 시각을 제시한 소설가는 없을 것이다. 그런 카프카의 명성을 뒷받침하 듯 쿤데라의 에세이는 카프카의 장편 소설 《소송》에 대한 감상으로 시작한다.

카프카는 현대 사회의 어떤 측면을 관찰했고 이를 소설로 녹여냈는가? 톨스토이의 장편 소설 《전쟁과 평화》와 비교해보자. 톨스토이의 소설 속 인물들은 느닷없는 계시나 결심으로 자아의 큰 부분을 바꾼다. 불콘스키가 염세주의자에서 벗어나는 계기는 전쟁터에서 바라본 푸른 하늘과 치료를 받던 당시 자신의 옷을 벗겨주던 간호사를 통해 촉발된 유아 시절의 따뜻함이다. 의미없어 보이는 묘사임에도 톨스토이는 적절한 부분에 이 디테일을 배치함으로서 한 인물의 내적 변화를 그려낸다.

한편, 베주호프는 나폴레옹에 대해 생각하던 와중 "과연 누가 그를 처치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이른다. 이를 찾기 위해 그는 이름 점을 해본다. 그 결과 나폴레옹의 숫자 666과 걸맞는 이름은 철자 몇 개를 뺀 자신의 이름이다. 그는 이 결과에 만족하며 나폴레옹의 암살을 준비한다. 한 청년의 영웅적인 정신이 고작 미신적인 이름점으로 촉발된다(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베주호프는 상당히 진지한 청년이다. 절대 가벼운 결심으로 이런 중대사를 결정하지 않는다.). 톨스토이가 그 과정에서 곁들인 유치한 묘사들은 장면의 어이없음을 심화시킨다.

톨스토이가 던지는 질문은 자아의 연속성에 관련되어 있다. 사소한 계기로 자아는 변화하는가? 자아 변화는 존재의 연속성과 관련되는가? 단계 별로 변화한 자아는 어느 쪽이 진정한 자아인가? 중요한 점은 톨스토이는 이런 자아 변화의 원동력을 끊임없이 고뇌하는 개인들의 내면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주체적이다. 그들은 비록 사소한 디테일에서 오는 계기일지라도 이를 놓치지 않고 영혼의 불꽃으로 변화시켜 삶을 주체적으로 수행해나간다.

반면 요제프 K는 그런 톨스토이적인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는 법원의 소송을 통해서 스스로의 자아를 옥죄고 끝끝내 탈출하지 못하는데에 이른다. 카프카가 본 개인은 내면의 불꽃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주체적 인간이 아닌 추상적인 거대한 압박에 굴복하여 바뀌어나가는 소시민이다. 그는 여러 단계를 걸치며 소송에 굴복하고 최후에는 자신을 벌하기 위해 자결까지 생각한다.

그러나 카프카가 인간의 수동성만을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소송》 속 여러 장면들은 중간중간 요제프 K에게 삶의 주체성을 일깨워준다. 법원으로 달려가는 K에게 시민들의 일상적이고 포근한 행동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게 하고 K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이는 잠깐의 휴식에 그칠 뿐 K는 또다시 소성의 물결에 휩쓸려 법원으로 달려간다. 각종 성애 묘사들도 마찬가지이다. K는 계속해서 여성들과의 관계를 원하고 기회가 생기는 즉시 이에 달려든다. 소송의 과정 또한 딱딱하기만 하지 않고 뜬금없는 장면들을 뒤섞으며 사실 이 모든 소송 과정이 얼마나 우습고 별것 아닌 일인지 제시된다. 그러니 K는 이런 톨스토이적 인간의 가능성을 걷어차며 끊임없이 소송에 매달린다. 그렇기에 K는 법원에 지배당하는 수동적인 인물이면서 자기 스스로가 탈출할 방법을 걷아차버리는 주체적인 아이러니한 인물이 된다. 카프카가 관찰한 실존의 가능성은 이런 모순성을 가진 현대인인 것이다.

쿤데라는 이 소송과 법원이라는 카프카가 확장한 개념이 우리 사회 곳곳에 얼마나 숨어있는지 얘기한다. 우리의 삶을 둘러싼 대법관들은 우리 인생에서 범죄기록만을 추려내고 한 인간의 전부를 심판한다. 다른 요소들은 고려 사항이 되지 못한다. 이를 부정하려는 우리들은 법원의 소송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짓밟는 거대한 여론의 힘에 부딪혀 자아비판의 길에 이르고 결국 죄를 만들어내는 지경에 이르러 어서 본인을 심판해달라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를 대표하는 사례가 바로 1910~30 사이에 활동한 현대 예술가들에 대한 시대의 심판이다. 저 사이에 활동한 예술가들은 한 번은 나치에 의해, 다른 한 번은 공산주의에 의해,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에 의해 심판받고 비난받는다. 최후의 현대 예술가들은 대중에 반하는 엘리트주의자이면서 나치의 부역자가 되고 자본주의에 물든 이단이면서 스탈린의 추종자가 되며 전쟁 범죄에 동조한 악마가 된다. 그러나 쿤데라가 이들의 죄를 덮어달라는 간청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저들의 죄를 심판하되 그들의 예술 작품과 사상을 연구하여 한 시대의 실존적 고민을 알수 있는 기회를 왜 시대 스스로가 덮고 심판하며 없애버리냐는 것이다.

거기에 쿤데라는 더 나아간다. 그는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여 스스로의 자아에만 관심있음에도 결국 모두 똑같이 행동하는 세태를 겨냥한다. 쿤데라가 대중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의 대중들 중 범죄에 가담한 이들이 단순한 충동 혹은 개인적 문제라는 이유로 범죄 사실을 용서받는 행태에 대해 비난한다. 왜 그들 윗세대의 예술가들은 범죄의 기록으로 존재가 부정다하는 반면 오늘날의 범죄자들은 나머지 인생의 기록이 그들의 범죄를 정당화하는가? 살기 위한 정치관 변화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이나 개인적 충동에 따른 살인은 유예가 가능한 것인가?

쿤데라는 다시 톨스토이를 데려온다. 이번에는 《전쟁과 평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역사와 관련된 에세이이다(이 부분에서 쿤데라는 이 에세이 파트가 소설의 완성도를 깍아버리는 오점이라며 톨스토이에게 수정하라고 요구한 사람들을 까내린다. 오히려 그 에세이 파트는 소설적으로 전혀 문제없는, 소설의 가장 중요한 테마가 담긴 부분이다). 톨스토이는 이 에세이에서 역사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고찰한다. 그 결과 그는 한 가지 결론에 이른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역사의 무의식에 동참할 뿐이다." 쿤데라는 이를 두고 '안개 속의 길들'을 거니는 개인이라고 표현한다. 안개 속에서 개개인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앞을 자세히 볼 수 없기에 제한된 시야 내에서 자유롭고 행동하고 스스로를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몇십년 후의 우리들은 과거의 안개에 갇힌 이들을 바라보며 비웃는다. 그들의 과오에 소송을 걸고 심판하며 범죄자의 낙인을 찍는다.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그들의 몸짓을 두고 말이다.

쿤데라는 전쟁 범죄를 옹호하지 않는다. 그가 안타까워 하는 것은 범죄자라는 이유로 말살되는 한 인물의 업적 전체이다. 우리는 하이데거의 과거를 두고 그의 철학 전체를 부정할 수 있는가? 미야코프스키의 스탈린 찬양을 두고 그의 시를 파괴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현세대의 범죄자들에게는 온갖 핑계를 덧붙이며 범죄를 세탁하는 일이 가당키나 한가? 중요한 것은 그들의 범죄와 업적을 동시에 바라보며 한 시대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고찰해보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아닌가?

쿤데라는 20세게의 거대한 사건이 제대로 토의되지 않은 채 넘어가버리는 것을 걱정했다. 현재 우리의 21세기는 어떤가? 소송은 끊임없이 발생하고 대법관들은 더욱 증식했다. 개인을 심판하는 것은 그들의 업적과 무관하게 범죄 기록들로만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범죄 기록들은 명확하지 않은 채 오로지 심증만이 제시된다. 여론은 이들을 짓밟으며 소송을 강제하고 결국 그들은 범죄자로 낙인 찍인 채 사회에서 쫒겨난다. 반대편에서는 진짜 성범죄자와 살인자들이 정신 이상으로 법적 유예를 받고 있을 때 말이다.

21세기에 들어섰음에도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새롭게 등장하고 세분화된 이데올로기들은 느닷없이 개인을 붙들고 소송으로 끌고 들어간다. 페미니즘과 반페미니즘은 양쪽으로 인간의 머리를 후려갈기고 인종차별은 시도때도없이 맨홀 아래에서 등장해 인간의 피부를 벗겨낸다. 아무것도 모르는 징징거리는 고생모르는 엄살 많은 젊은이면서 다 늙은 꼰대라는 칭호를 동시에 얻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 갑작스레 마주치는 사상의 노예들은 여러분의 정치적 사상을 점검하는데 왼쪽인지 오른쪽인지는 랜덤이다. 답을 틀리면 여러분은 그때부터 빨갱이or일1베충이다. 결국 공포에 가득찬 개인은 판결 이전에 자아비판을 수행하고 자결한다. 카프카의 소설이 탄생한지 10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카프카의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가지 다행인 점은 이런 소송에 맞서 개인들은 적어도 K보다는 적극적으로 투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투쟁을 뜯어보면 상반되는 다른 소송을 끌어들이는 소송 간의 결투일 뿐이다. 과연 이것이 쿤데라가 생각하던 바람직한 미래일지, 21세기는 새로움 없는 20세기의 무한한 연장일 뿐인 것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