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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국의 첫 문장은 유명하다고 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이 문장을 포함하여 첫 1페이지는 작중 배경이 된 마을을 묘사하는데 눈으로 뒤덮인 마을을 간결한 문장으로 잘 묘사하여 유명하다고 한다. 그러나 내게는 그 명성이 와 닿지않았다. 이 문장은 분명 간결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너무 간결하여 눈으로 뒤덮인 마을을 연상시키기에는 조금 부족한 것 같다고 느꼈다. 게다가 책을 다 읽어보고도 의아한 것이, 이 책은 탐미주의적 소설으로 첫 문장만 읽었을 때 작중 배경이 되는 마을의 자연, 특히 눈으로 뒤덮인 풍경에 대한 묘사를 중심으로 전개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으나 정작 읽어보니 그보다는 작중의 등장인물인 고마코와 그 주변인들에 대한 관찰이 더 주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를 뒷받침하는 듯이 소설은 유명한 그 첫 문장을 뒤로하고 바로 고마코와 관련이 있는 인물인 요코의 등장을 묘사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설국의 첫 문장의 명성에 대해 의아하였다.

 

  소설은 눈으로 뒤덮여 스키나 관광을 하러 온 여행객들을 호객으로 삼는 온천과 그곳의 게이샤, 고마코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주인공 시마무라는 고마코와 애매한 관계를 보내는데 처음에는 손님과 게이샤로써 관계를 맺으려다가, 그는 고마코와 친구 되고 가족을 소개시켜주고 싶다는 말을 하더니, 정작 그녀와 불륜 비슷한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이 모든 묘사가 정확한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구멍이 나 있어 상상으로 메꿔야했다.

 

 

  이런 둘의 관계때문에 시마무라가 온천마을에 들려서 고마코와 지내는 것이 조선시대 양반이 풍류를 즐기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왕에게 팽 당하여 지방으로 유배를 가지 않는 이상, 진짜 자연이 좋다고 자연에 둘러쌓인 깡촌에 가서 풍류를 즐긴 양반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신선을 동경하고 인간세상에 벗어나 자연속에서 풍류를 즐기고 싶다고 시를 지으나 결국 진짜 이를 실천하기보단 단지 가끔 자연 속으로 소풍을 즐기고 오는 것으로 만족하는 선비들.. 이런 모습이 작중의 시마무라 모습에서 보였다. 시마무라는 분명 눈으로 뒤덮인 온천마을과 고마코를 좋아함은 분명했고 그랬기에 몇 번이고 그 마을에 요양을 간 것이지만 그렇다고 고마코와 긴밀한 관계를 짓는 것도 아니요, 작중 고마코가 2월 즈음에 이 마을에 와달라는 약속을 무시하고는 가을 즈음에 온 시마무라의 모습은 그의 애매한 거리감을 잘 나타낸다. 나는 이 애매한 거리감이 선비들의 자연에 대한 거리감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애매한 거리감이 설국이 서양에서 먹힐 수 있게 만든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서양인으로써 익숙치않을 일본문학에 대해 신기함으로 다가가지만 결국 낯설음으로 인해 포옹을 하지 못하고 거리를 두고 읽었을 모습이 상상이 간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결국 끝까지 애매한 거리를 두고 외부인으로써 눈으로 둘러쌓인 마을과 고마코와 그 주위인물들을 지켜보던 시마무라의 모습과 선비의 모습, 익숙치 않은 문학에 대한 동경을 품은 서양 독자는 공통점이 있다.

 



     비단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관계뿐만 아니라 작중의 다른 인간관계 모두가 역시 애매모호하였다. 병약한 젊은 남자 유키오와 그의 치료비를 위해 게이샤를 하는 약혼자 고마코, 그리고 약혼자인 고마코 대신 유키오 곁을 지켜 그에게 애정 어린 간호를 하는 요코까지. 언뜻 보기에는 한국 막장드라마 뺨치는 인간관계이지만 작중에는 결코 이런 피튀기는 삼각관계가 부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쳐가듯이 이들의 관계를 조명하고는 부족한 묘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심지어 이 짧은 상상도 금방 끝나버리는데 유키오는 결국 소설 중반에 병으로 죽어버렸다는 말과 함께 퇴장하고 요코마저 소설 마지막에 불타는 주택에서 뛰어내려 죽음을 맞이하면서 소설은 막을 내린다. 소설은 결코 모든 것을 묘사하지않고 오히려 듬성듬성 묘사를 생략하였다. 첫 문장을 읽으며 자연에 대한 미를 탐색하기는커녕 독자들로 하여금 조각조각 비어버린 퍼즐 같은 이야기의 빈 부분을 상상시키도록 한다.

 

 

책을 다시 읽고나니 처음에 소설의 첫 문장이 설국이 작중 배경이 된 마을의 자연을 중심으로 탐미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인물 개개인의 묘사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나는 설국의 첫 문장이 그리 명문장이라 생각하지않았지만, 고마코와 그녀의 주변인물들의 관계를 눈의 특성과 일치시켜본다면 괜찮은 문장인 것 같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오면 눈은 반드시 녹아 사라진다. 이 눈이 마치 고마코의 삶과도 닮아 있었다. 펑펑 내린 눈으로 하여금 온천마을에 스키나 등산하러 온 손님들을 끌어 모으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덧없음. 공교롭게도 시마무라가 그 마을을 찾아가는 것은 항상 가을에서 겨울로 쌀쌀하거나 눈이 뒤덮이기 시작하는 때이다. 물론 작중에는 봄이 되면 녹아 사라지는 눈의 덧없음을 부각한 적은 없지만 말이다.

 

  화려한 문장이나 복잡한 구조로 쓰여졌거나 작가의 소설을 강렬하게 전하는 소설이 널린 오늘날에는 설국은 다소 읽기 따분할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아마 내가 탐미주의적 소설을 많이 안 읽어봤기 때문일 것 같다. 수수한 동양의 미를 심취하기엔 내 식견이 너무 부족한 것 일지도 모르겠다. 취미로 수석을 하는 사람에게 아주 가차 있는 돌이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엔 그냥 돌로 보이는 것처럼, 나보다 미학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은 설국의 심미적 탐미적 가치를 알 수 있겠지만, 내가 읽었을 땐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오히려 탐미주의 관점을 버리고 설국을 읽었더니 더 잘 읽을 수 있었다. 고마코와 유키오, 요코의 관계는 매우 흥미로웠고, 작중 이를 시원스레 밝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밀당같아서 상상하는 재미가 있어 흥미와 관심을 증가시켰다. 게이샤를 하면서까지 돈을 보태던 약혼자가 결국 병사하고, 그를 두고 대립하는 요코마저 죽어버린 결말부분에서는 고마코에 대한 여러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중간부분까지 읽었을 때는 고개가 갸우뚱했었는데 다 읽고 보니 괜찮은 책이었다. 다만 설국을 잃고 탐미주의적 관점을 읽지 못했기에 다음에는 동시기 일본의 탐미주의적 소설이라는 금각사를 읽고 비교해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