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몇 년 간 진로 문제로 고민해왔다. 학자가 되느냐 혹은 관료가 되느냐가 주된 고민이었고 그 외의 다른 길은 그다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에 학자의 길을 포기하기로 마음 먹으면서, 학문을 직업으로 택한다는 것의 의미와 단순한 취미로 독서를 대하는 것 사이에서 생긴 갈등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이것은 내가 '직업으로서의 학문'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을 정리한 것이면서, 왜 학문을 직업으로 택하길 포기하고 독서를 취미로 남겨두기로 했는지를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쓰는 것이기도 하다.


  학문(나의 경우에는 철학)에 대한 진정성이나 열정, 혹은 소명의식이 부족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늘 스스로가 삶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영역이든 철학적 탐구는 흥미롭게 느껴졌고 질리는 법이 없었다. 베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준비까지도 되어 있었다. 행운이 따라주지 않아 학문으로 밥벌이를 할 수 없게 된다면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거나 그마저도 안 되면 평생 프리터로 살아갈 각오를 했다. 그럼에도 학문을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에 도피적인 면모가 있다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나는 학교를 떠나는 것이 두려웠고 평생을 아카데미의 울타리 안에 안주하고 싶어했다. 대학원 진학의 도피성은 나를 괴롭혔고 특히 그 길이 나 자신을 돌보기 위해서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큰 문제가 되었다.


  나는 일종의 자기배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대학원에 처박혀 공부나 계속 하기로 한다면 그것은 현실을 배반하는 선택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학문을 하는 것은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고 이기적인 목표에 몰두하는 길이 될텐데, 그것은 공동체 속에서 나 스스로를 올바르게 돌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나는 부모를 증오하고 우리 집안을 증오하는 사람이지만, 그들을 배반함으로써 그들과 똑같은 인간이 되는 것은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에서 한참을 어긋나 있었다. 나는 공동체 속에서 내게 주어질 수 있는 역할을 납득했고 내 삶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가상을 꿈꾸지는 않기로 했다.


  학자로서 안정된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명문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반쯤 필수적으로 되어 있는데, 그러기에 내 학문적 역량은 정량적으로나 정성적으로나 미달되었다. 전임 강사 자리를 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종신 시간강사로 살며 번역, 학원강의, 연구 프로젝트 등을 병행하는 길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않아 보였다. 대학가에서는 끊임없이 암울한 소식이 들려왔고 생활고로 인한 시간강사의 자살은 이제 흥밋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물론 소명을 위해서라면 결혼을 비롯한 여러 세속적인 과정들을 포기할 준비는 되어 있었다. 그것은 나 개인의 반태생주의적인 신념에도 잘 부합했지만 내 주변 사람들이 그걸 납득할 것 같지는 않았다.


  또한 현실에 대한 관여라는 측면에서도 학자의 길은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근래에 내 관심사는 관조적인 영역에서 활동적인 영역으로 넘어 갔는데, 활동과 사회적 영향력의 측면에서 본다면 학문은 더는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었다. 앙가지망은 페테르부르크의 대머리가 1917년 혁명을 맞이하던 시절에나 현실성을 가졌다.  학자는 단지 세속화 시대의 사제가 되었을 뿐이고 - 어쩌면 사제가 세속적 인텔리겐치아에 가까워진 것일지도 모르지만 - 일부 정치영역에 깊게 관련된 전임교수들을 제외한다면 통치 엘리트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다.


  그 모든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학자는 여전히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공부하는 것 그 자체를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단점들과 저울질할 수 있을 만큼의 무게가 충족되었다. 그래서 고민은 길어졌고 최근까지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지금도 어느정도는 유보적인 입장에 있긴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학문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관조에서 오는 즐거움 그 자체를 추구한다면 반드시 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를 취미(나는 차라리 칸트 미학의 용어를 빌려 '유희'라고 표현하고 싶다)의 영역에 남겨두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아마추어는 언제까지나 아마추어일 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학문이 더는 진리의 담지자가 되지 못하는 시대에 학자라는 직업이 유지되는 까닭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일정한 분야의 전문성을 획득하고 사회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학자란 곧 학문 영역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은 이들이며, 아마추어는 아무리 열정적으로 노력한다 하더라도 학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을 따라잡기 쉽지 않다. 나는 학계에 있는 사람들과 짤막하게나마 대화를 나누면서 철학자들에 대한 대중(여기에는 나를 비롯한 학부 졸업생들까지 포함될 것이다)의 인식과 최신의 문헌학적 연구 결과 사이에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지를 실감했다. 분석철학처럼 비교적 현대적인 분과에서는 그 괴리가 적지만 대신 이쪽 분야에서는 수리논리학과 수학에 대한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여전히 대중과 학계 사이의 간극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취미로서의 독서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동시에 취미로서의 독서에는 장점도 있다. 학문이 노동이 된다면 그 순간 학문적 작업은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열정이나 열망보다는 정량적인 성과를 채워나가야 한다는 강박이 강해질 것이 분명하다. 나는 내 소명이 성과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롭기를 원하고, 그래서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역시 한계를 느낀다. 취미로서의 독서는 (단순히 내 치기어린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근대라는 거대체제로부터 어느정도는 해방되어 있는 공간이다. 나는 그곳에서 학자들의 우울한 속물근성이나 정량적 성과평가와는 다른 깊이를 갖추기를 원한다.


  급하게 몰아쓴 글인데 여기서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사실 이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글이라기보단 스스로에게 다짐하기 위해 쓰는글의 성격이 더 강하다. 혹시라도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더라도, 이 글이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사람마다 처해 있는 환경은 다 다르고 보다 나은 삶에 대한 관점도 다를 것이다. 결국 각자는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