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序詩
김민부
나는 때때로 죽음과 조우 한다
조락(凋落)한 가랑잎
여자의 손톱에 빛나는 햇살
찻집의 조롱 속에 갇혀 있는 새의 눈망울
그 눈망울 속에 얽혀 있는 가느디가는 핏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창문에 퍼덕이는 빨래......
죽음은 그렇게 내게로 온다
어떤 날은 숨 쉴 때마다 괴로웠다
죽음은 내 영혼에 때를 입히고 간다
그래서 내 영혼은 늘 정결하지 않다
-대부분 서시하면 윤동주를 떠올리는데 윤동주의 서시도 좋지만 개인적으론 김민부의 서시를 더 좋아함..
책에는 1시집, 2시집과 오페라 대본<원효대사>가 실려있음.
1시집 <항아리>는 취향이 아니라그런가 그렇게 크게 감동받진 않았는데 2시집인 <나부와 새>는 정말 좋았다.
<나부와 새>에선 기형도 같은 시인의 시에서 느껴지던 어둠의 서정이 많이 깔려있다.
시에서 죽음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도 많고 이후에 요절해서 그런지 더 그런 쓸쓸한 느낌이 많이 듬.
좀 더 오래 살아서 더 많은 시를 발표했으면 좋았을텐데...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이미 10대때 등단과 작품 출판을 하는 등 조숙한 천재성을 보였는데
너무 일찍 죽어서 작품 수가 적은게 너무 아쉽다.
참고로 이근배 시인도 10대때 적은 김민부 시인의 시론에 매우 놀랐다고 함.
각종 신춘문예를 석권하며 명성 높은 이근배 시인도 “문학계에도 계급이 있다면, 내가 일등병이라면 김민부는 사성장군같은 존재”라며 극찬했음.
시집외에 뒤에 실려 있는 <원효 대사>도 매우 재밌고 뛰어난데 세속과 종교적인 구원 사이에서 고뇌하는 원효의 모습이 담겨져있다.
↓밑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시들중 일부...
딸기 밭에서
1
가만히 바람으로 분만(分娩)되어 가는 이 황홀한 성숙 속에서
내 목숨의 그림자를 흔들어 들리어 오는 음향(音響)
꽃망울을 터뜨리는 그때쯤 그 주위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기억하고 있을는지도 모르는 그런 소리를
2
나는 무엇을 생각할 때마다 무엇인가 하나씩 잃어버리고
있었다
---- 그래서 나날이 가벼워지는 나의 슬픈 체중(體重)이여
중량(重量)을 잃은 나의 육체 위에서 나의 고운 피부를
바래는 눈부시게 찬란한 햇발의 향그러운 물결 속에서
3
차라리 아름다운 정적(靜寂)의 형상으로 항상 내 안에서
들을 수 있는 그 화창한 언어의 행방을
<기도는 표정
표정은 호수 위의 달빛처럼이나>
바다 속의 음악은 벌써 잊어버린 그 시절의
풍경에서 기억해 낼 수 있는 너의 얼굴이었다
4
이 울타리 안에 그윽히 차고 넘치는 맑은 공기를 호흡하고
있을 때 가만히 내 밖으로 풍화되어 가는 나의 고백
그러나 나는 지금 내가 누구를 보고 고백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것이 가장 은은한 내 영혼의 회화인 줄을 모르고 있었다
가을은
- 김민부
가을은
들메뚜기의 비취빛 눈망울 속에서
등불을 켠다
가을은
죽은 가랑잎을 갉는
들쥐의 어금니에 번쩍거린다
가을은
묘비를 적시는
몇 줄기 비로 내려서......
하룻밤
내 슬픈 외도에 욱씬거리는
통증으로 온다
목탄木炭으로 쓴 시詩 1
김민부
면무식免無識한 죄로다
가을날
식은 저녁에
술잔 속에
떨어진 나비
그 술에 풀리는 빛나는 화분
그 화분 우에 어른거리는
석유등石油燈불에 대하여
다소간의 논쟁을 하고
술집을 나서니
눈썹에 떨어지는
가을의
마지막 빗방울
푸주간 딸년에게 청혼을 하자
너는 술청에서
술보다 더 많이 살을 팔고
나는 너의 기둥서방 되리......
은지화 Ⅱ /김민부
공원엔
개가 한 마리
가고 있었다
벤치엔
예수 같은 사나이가
빨래처럼 널려 있었고
사나이의
미간에
죽은 신문지 우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여자가 둘 있었다
죽어버린 여자와
잊어버린 여자가
어깨동무를 하고
누군가의
발자욱에 갇혀
울고 있었다
한 구석에서
낙관처럼 찍혀 있는
가로등에 불을 켜는 노인의 실루엣......
나부(裸婦)와 새 / 김민부
그것은 숱한 달빛이 착종(錯綜)하는 꽃밭이었다
램프가 켜져 있는 밀실(密室)
어디선가 새가 울면
풍금(風琴) 소리를 들으면서
주위의 달빛을 진동하며
짙은 꽃내의 밀도 속에서
나부(裸婦)의 육체(肉體)는 흔들린다
어디선가
새가 울면
나부(裸婦)의 손이 떨어진다
떨어지면서 이상한 소리를 낸다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난다
나부(裸婦)의 육체(肉體)의 구석구석에
금이 간다
그 균열(龜裂)의 간격을
달밤이 드나들며
내외(內外)에
다른 혼야(婚夜)를 마련한다
어디선가
새가 울면
나부(裸婦)의 육체(肉體)는 불 붙는다
일체(一切)의 소리를 거두어 태우는
음향(音響)의 불
스산한 배경을 소각하는
주술의 불
달빛을 옥외로 밀언내는
탄력의 불
나부(裸婦)의 육체(肉體)가 함유한
음악의 중량을
저마다의 음계로
바람과 치환하며
나부(裸婦)의 육체(肉體)는 연소한다
나부(裸婦)의 육체(肉體)는
소실(消失)하여 바람이 되었다
어디선가
새가 울면
풍금 소리를 들으면서
더 짙은 꽃내의 밀도 속에서
긴장하여, 미동하는
그것은 숱한 달빛이 착종하는
꽃밭이었다
<기도> -김민부
“새들은 제 몸무게만큼
나뭇가지를 흔들다 가고
여자는 제 영혼의 무게만큼
날 흔들다 가고••••••
가을이여
떫디 떫은 나의 피를
향그럽게 익히소서
저 항아리 속의
죽은 달빛과 포도를
발효시키듯이•••••• ”
「나는 때때로」-김민부
나는 때때로 생각한다
태어난 대로 살아가리라
구르는 가랑잎의 행지行止……
술잔 속의 귀뚜라미 울음
배척背脊에 우는 겨울
타구 속에 뱉는 오수를
대낮에도 소매를 잡는 죽음을
자정 가까이 짖는 개를
힐책하지 않고
마른 노을 속에서
우계雨季를 기다리며
퇴락한 술집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짚단 같은 무식과
오양깐 냄새 나는
자기自棄와 일모日暮를 핥으며
나도 노인이 되어가리
그래서 달밤 속을 어정거리며
파이프 속에서
죽음이 끓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리……
어렵다 느낌이 오는듯 하는데 머릿속에 안그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