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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책 관련 대화를 하던 중,
‘너 책 좋아하잖아. 책 많겠네?’
‘다 사서 읽진 않는데, 좋아하는 건 사두지’
‘주로 사는 게 뭔데?’ ‘음...고전작품들?’ 이런 식의 말이 오갔고,
당연하게도 고전이 뭔지 정의하려는 대화도 오갔다. 친구의 결론은 이랬다. ‘고전은 오래동안 살아남은 것 아닐는지...’
찝찝했지만 바쁘기도 했고, 깊게 생각해본 주제가 아니라 넘겼다. 그리고 집에 박혀있던 엘리엇 문학비평을 집었다.
버질학회에서 했던 연설을 엮은 이 글에서 엘리엇이 말하는 고전의 조건은 한마디로 <원숙>이다. 고전, 문학, 예술에서 <원숙>이 의미하는 건 뭘까?
엘리엇은 오래 전에 쓰였고, 여태껏 회자된다고 해서 원숙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진 않는다.
엘리엇이 말하는 고전의 요건은 꽤 까다롭다.
사실 버질학회에서 초대회장으로 했던 연설이라 거의 “베르길리우스=우리의 고전임”라는 명제를 굳히려는 의도도 보이지만...
생각해볼 주제가 분명했고 유익해서 연설의 주제적 텍스트 위주로 긁어봤다.
<고전의 의미를 최대한 암시하는 한 마디 말을 확정짓는다면, 그것은 원숙이란 말입니다. ... 개인적으로 남보다 원숙한 작가가, 다른 시대보다 원숙치 못한 시대에 속하는 수가 있는데, 그런 관계 때문에 그의 작품의 원숙성은 낮아질 것입니다. 문학의 원숙은 문학이 생산되는 시대의 원숙의 반영입니다.>
<언어의 성숙은 정신과 행동의 성숙에 수반하는 것이라고 자연히 기대할 수 있습니다. 언어가 과거에 대한 비평의식을 갖고, 현재에 대한 신뢰를 갖고, 미래에 대하여 의식적 회의를 품지 않을 때에, 성숙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시대의 말기에 이런 종류의 시인들을 봅니다. 이 시인들이란 과거의 의식만 가진 시인들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과거를 부인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미래의 희망을 찾는 시인들입니다.>
김윤식 자신이 한국 근대 문학을 공부하려 했을 때의 회고에서 나는 한국도 알고, 문학도 아는데 당최 근대를 뭔지 모르겠더라, 라고 했던 걸 기억한다. 학생 때의 김윤식이 느꼈던 어려움은 ‘근대’라는 자기 시대에 대한 진단 내지 확고한 인식이 아니었을지 생각해본다.
또, 현시대를 살면서 나는 어떤 현실 진단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토대에 서있는지, 또는 그 토대가 사회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편협하진 않은지 생각해본다.
<..밀튼의 스타일은 고전의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형성과정에 있는 스타일이고, 영국을 스승으로 한 것이 아니고 라틴시인과 약간의 희랍인을 스승으로 한 작가의 스타일입니다.>
-엘리엇은 <신곡>과 비교하면서 <실낙원>을 어딘가 조화롭지 못한 나쁜 얘로 든다던지.. 셰익스피어에 비교해서 후대에 끼친 밀튼의 영향은 죽은 언어를 썼다는 식으로도 비판하기도 하고.. 아무튼 밀튼이 너무 웅변적이라고 까고.. 시각적이지 못하다고 까고.. 개인적으로 신화 냄새가 짙은 게 싫은지 차라리 그런 신화 요소 짙은 텍스트는 <창세기>로 족했다는 식의 코멘트도 ㅋㅋㅋ
아무튼 이런 비판의 근거는 엘리엇이 ‘영문학엔 진짜 고전이 없고 있을수가 없다!’라는 진단이랑 궤를 같이 하는데,
그러니까 영문학이 미개해서 그런게 아니고 워낙 이 양반이 고전 딱지를 붙이는 기준이 엄격하다.
한 마디로 고전의 창의를 가능케 하는 어떤 시대적 조건도 중요시 여긴다. 우리가 고전을 떠올릴 때 ‘고전 작가’ ‘고전 작품’을 떠올리면서 고전을 정의하는 것과는 맥락이 다르다.
<정신의 원숙, 거기에는 역사, 즉 역사의식이 필요합니다. 정신의 원숙에다 나는 행동의 원숙과 편협성의 배제를 첨가했습니다.>
한 예로 버질이 희랍시에서 애써 발전시키려 했던 것을 예로 든다. 엘리엇에 따르면 호머의 시가 특정 도시국가들 사이의 불화에 머물러있다면, 버질은 그보다 넓은 의식을 가지고 쓴다.
<동시에 한 언어의 모든 진수가 표현될 수 있는 언어에서만 고전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특성을 표현하는 감정의 전 영역을 포괄할 수 있는 최대한을 표현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엘리엇 식의 고전 분류가 시라는 형식이 아닌 소설에서 엄밀하게 적용이 어렵다는 생각이 여기서 들었다.
또, 현대에 올수록 워낙 다양한 언어적, 형식적 실험이 난무하는 가운데 ‘언어 : 한 민족의, 살아있는 감정을, 살아있는 문체로...’ 하는 식의 생각은 사실 맞을 수가 없다. 역시 ‘고전적’ 모더니스트...
<내가 말하는 이 표준, 즉 우리가 자국의 문학만에 의존해서는 뚜렷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 표준이 없을 때에는, ... 천재의 작품들을 그릇된 이유에서 찬양하게 됩니다. .. 이류의 작품에 일류와 같은 급을 부여하게 됩니다. .. 예를 들면, 내가 말하는 것은 <중심적 문화, 중심적 교양의 결핍> 이상의 뜻입니다.>
< 또 내가 말하는 것은 가치의 왜곡 즉, 어ᄄᅠᆫ 것은 배격하면서 어ᄄᅠᆫ 것은 과장하는 따위인데, 이것은 광범위한 지리적 답사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제한된 분야 내에서 얻은 표준을 인간경험 전체에 적용하는 데서 오는 결과입니다.>
발췌한 건 이게 전부다. 애초에 연설문이라 글이 길지 않고, 장황한 예시나 설명은 뺐다.
·나는 자주 낭만주의 속 역사인식이 놀랍다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새로운 역사인식이 낭만주의 운동으로 이어졌고, 초창기에 운동을 이끄는 주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위대한 싹을 두고 낭만주의는 끝없는 자의/자폐성으로 빠져서 현실에 맞지 않는 푸념을 늘어놓다가 말 그대로 광기적 또는 병적이 돼버렸고,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서 각기 다른 정치 상황 입맛에 맞게 한쪽으로 치우친 채로 이용됐다.
위대한 싹을 튼 정신은 한창 격동기를 겪는 유럽에서 흩어져버렸다. 엘리엇의 이론대로라면 편협한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억울한 건 없다. 엘리엇 말대로라면 셰익스피어도 어느정도는 시대의 편협함 아래 있었다.
현대에 와서 역사의식의 흐름을 생각하면 1,2차 세계대전,. 그 이후로 제각기 겪었던 근현대화, 독재나 폭정, 혁명, 강대국/약소국 간의 의식차이... 등 사회정치적인 의식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아직도 여전하고..
올바른 역사의식은 현실을 사는 우리가 좀 더 현실을 원숙하게 볼 줄 아는 시각을 줘야한다.
시각을 좁히는 인식, 특정 담론에 강조점을 찍고 ‘여기만 봐!’ 라고 말하는 듯한 역사적 의식은 엘리엇에 따르면 원숙함이 태어나긴 커녕 길러지기도 어려운 나쁜 조건이다. 끝으로 이렇게나 완고한 엘리엇은 어떤 역사의식을 가졌을지가 참 궁금했다. 비평,시,시극 등등 읽어보려고 노력중이다. 또 ‘역사인식’ ‘(개성보다는) 원숙한 매개체’ 등 비평개념을 접해보니 당연히 내 수준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덕분에 독서 계획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좋은 기회였다.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원숙함이 담긴 작품이 고전이라는건가..... 이거 완전 율리싯스
???: 조이스 고놈은 그 주석없이는 난센스에 불과한걸 잘도 썼단말이지.. - dc App
한 시대를 담아내야 한다는 그의 기준이, 한 시대에 갇힌 것 같이 느껴지는 아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