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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을 읽은 이유
이 책을 거창한 목적으로 읽기 시작한 건 아니었다.
다만 내가 평소에 읽는 '문학'의 본질은 무엇이며 나는 문학을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대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2. 책을 읽고 느낀 점
독붕이들의 말을 듣자하니 사르트르라는 사람의 글쓰는 방식이 원래 이런 것 같지만, 우선 이 책은 철학적, 예술적 개념들로 점철되어 있어 용어를 바탕으로 글의 맥락을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또한 사르트르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너무 극단적인 예시(ex. 시와 산문의 지나친 분리)를 들거나, 자신의 주장에 부합하지 않는 측면들은 그저 부차적인 것으로 격하시키는 등의 환원주의적 면모가 없지는 않았다. 또한 주관적이고 어쩌면 관념적인 추측(ex. 상황이 이러했기에 그들의 심리 상태는 이러이러했을 것이다)을 사용한 경우가 잦아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확실히 문학이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을 잡기에 아주 좋았다. 문학이 사회와 외따로 존재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사르트르가 전개해나간 논리는 꽤나 흥미로웠고 뜨거운 열정마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정보에 대해 항상 수동적이었고 독서를 할 때는 내용 파악에만 집착하거나 '아, 그렇구나' 하고 넘기는 것이 끝이었다. 학교 교과서도 강조한 바 있지만, 앞으로 독서를 할 때는 자기주도적으로 내용을 재구성하고, 작가가 과연 무엇을 나에게 보여주고자 하고 있는지 파악하면서, 그 작품의 가치를 혼자 소박하게나마 상정해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덤으로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가 이 책에서 설명된 그의 문학관을 바탕으로 해서 쓰였기 때문에, 나중에 그것을 읽기 위한 배경지식도 마련할 수 있었다.
3.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책의 제1장에서 사르트르는 다른 모든 예술의 장르는 '참여할(다른 번역에서는 '구속될'으로 번역되었음)'수 없으며 오직 산문만이 가능하다는 것과, 또한 산문은 참여할 수밖에 없음을 정리했다. 사르트르의 가장 유명한 사상 '앙가주망'의 뿌리가 되는 설명이다.
그는 조각, 음악, 미술, 그리고 시를 한데 묶었다. 그러면서 이러한 종류의 예술에 종사하는 예술가들은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말(語)'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산문작가와 가장 비슷한 시인마저도. 시인은 말을 산문작가처럼 기호로서 보는 것이 아닌 '사물'로서 본다. 사르트르는 사물을 '어떤 것도 의미하거나 환기하지 않고 단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자적, 대자적 개념 참고) 시인에게 말이란, 뭔가 특정한 것을 의미하기 위해 존재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시에 쓰인 '하얀 장미'는 정말 하얀 장미 그 자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하얀 장미라는 말의 어감이나 생김새마저 중요하게 여겨진다. 시의 근원에 시인의 감동, 분노, 정열, 의분이 깔려있을 수는 있지만. 시인 스스로가 보기에도 그의 시는 '의분'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것은 의분이 아닌 의분과 뭔가 다른 설명할 수 없고 표현되지 못한 어떤 것들이 마구 버무려진 것이다. 시로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다면 그 시도는 헛된 것이다.
산문은 승리(세계의 전달, 표현)을 위한 것이지만, 그런 관점에서 시는 패배를 위한 것이고 패배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내가 인상 깊게 느낀 구절이 있다. "시에 있어서는 패자가 곧 승자이며, 진정한 시인은 승리하기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패배하기를 선택한 사람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떠오른 의문이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없이 많은 그 '참여'시인들의 경우는 도대체 무엇인가? 사르트르는 이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이 책이 발간된 후 정확히 1년 만에 흑인시야말로 진정한 '참여시'라며 극찬했다.)
시인이 언어에 '봉사'하는 자라면, 산문작가는 언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명하다. 산문작가는 말을 수단으로 삼아 세계를 '드러낸다'. 그런데 이 드러냄이라는 것은 그 드러나진 것을 '바꾼다'는 것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심지어는 그저 무의식에서 비롯된 행동일지라도, 그것을 가리키며 핀으로 고정시켜버린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똑바로 보게 되며 다른 모든 이들의 시선 하에 놓이게 된다. 이제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 밖에는 없다. 그것을 고집하며 유지하든지 아니면 그만 두는 것이다. 작가는 이것을 세계를 상대로 행한다. 따라서 쓴다는 것, 말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말은 곧 '참여'이다.
따라서 우리가 작가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당신은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는가?
2. 당신은 그래서 어떤 변화를 가져오기를 바라는가?
3. 당신은 다른 이야기에 대해서는 묵과(默過)하였는데, 그 이야기 대신 왜 이 이야기를 한 것인가?
4.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
우리가(작가뿐 아니라 인간은 시선을 통해 세계를 드러낸다) 사물을 드러내 보이는 존재라는 확실함과 더불어 또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 그것은 드러난 사물에 대해서 인간 존재는 본질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예술적 창조의 주된 동기 중 하나는 분명 세계에 대해 우리 자신의 존재가 본질적이라고 느끼려는 욕망이라고 사르트르는 보았다. 여기서 어떤 것이 본질적이라 함은, 단지 내던져서 있는(exist) 것이 아닌 어떤 특정한 목적이 있고 "무엇이다!(be)" 라고 딱 정의될 수 있음을 말한다. (실존과 본질 참고)
작가는 본질적 존재가 되기 위해 본질적인 세계를 '창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작품이 쓰여진 순간 그 작품은 비본질적인 것이 된다. 작품 곳곳마다 그 자신의 모습이 드러난다. 단어 하나하나마다, 구절 한 줄 한 줄마다 그가 의도했던 바가 눈에 선하다. 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이 변화시킬 수 있는 곳이 목격된다.
따라서 작가는 독자에게 호소한다. 자신의 작품을 본질적으로 만들어 달라고. 독자의 입장에서는 작품이란 하나의 객관적 사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독자는 작품 속 말과 작가의 의도라는 듬성듬성한 표지판을 따라가며, 작품을 진정으로 완성하고 재창조해서 하나의 대상화를 시킬 수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의 자유이다. 창조를 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워야하며 수동성에 호소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사르트르는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작가는 감정을 전달하고 불러일으키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작가가 주입하려고 하는 정념에 독자가 쏠려버리면 그의 자유는 소외되고, 작가는 결국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작가가 무엇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해도 그는 다만 독자가 수행해야 할 과업을 제시하는 데 그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제시'라는 성질이 예술 작품에 있어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구토'. '벽'이 이를 지향한다고 함)
단, 작가가 독자에게 부정(不正)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독자가 그 부정을 그저 냉담하게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독자가 '스스로 자유로이 그의 안으로부터 불러온' 분노로서 그 부정을 생동시키고, 부정의 본질, 즉 극복되어야 할 악폐라는 그 본질을 드러내고 창조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르트르는 어떤 형태로든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행위를 극히 비판했다. 노예제도, 반유대주의, 유색인종차별,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구속 이런 것들 모두가 작가와 독자 양쪽에게 있어 해롭다고 보았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다시 1장의 주제인 문학의 사회적 참여를 자연스레 끌어와 연결짓기 위해, 2장에서의 작품을 재창조하는 독자의 자유 개념을 사회적 자유로까지 확장지었다.
절반밖에 못 썼는데 너무 피곤하다 나머지는 내일 써야겠다
이거 읽어가면서 얼마나 대가리 깨졌을지 눈에 보인다.. 내가 구토를 읽었을 때의 그 감정이겠지.. - dc App
3차 시도만에 대충 파악했어 ㅋ큐ㅠ
사르트르에게는 문학이 도구 그 이상이 아닌 것 같아요. 실존주의라는 사조를 빼고 봐도 그의 작품은 충분히 예술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뭔가 모순되는 듯한...
문학이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계속 강조하면서 수단으로 쓰인 문학을 비판하고 있어요 이데올로기에 의한 억압 하에서 그것에 봉사하는 것과 자유롭고 보편적 인간 존재로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주장하면서요 후자는 문학을 도구로 쓰는 것이 아닌 문학의 본질 그 자체를 실현하는 행위로 보았답니다! 물론 사르트르의 말이 좀 모순적이긴 해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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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어려워 그래서 다음 책은 머리 식히기용으로 읽게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