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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97557&page=1
5.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제3장에서 사르트르는 그렇다면 과연 중세 이래 (프랑스)문학사 중 작가와 독자 쌍방의 자유, 세계를 드러낼 자유와 드러내진 세계를 재구성할 자유가 실현된 적이 있었는지 알아보고자 했다. 문학은 어떤 계층을 상대로 쓰였고 그것이 문학 자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문학이 다시 그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시대별로 설명했다.
사르트르는 작가의 인간적 조건(환경)이 그의 작품을 결정할 수도 있지만, 작가가 겨냥하고자 하는 독자도 그의 작품에 있어 지대한 작용을 한다고 말했다. 누구를 상대로 해서 글을 쓸 것인지가 작품의 내용과 그것이 지향할 바를 정한다는 것이다.
중세의 작가는 성직자였다. 그들이 할 일은 이미 정해져있다시피 한 기독교적이고 성스러운 내용들을 글로 잘 되새겨서 세상에 다시 내놓는 것이었다. 작품은 속세와 완전히 분리된 정신적인 내용만을 담았고, 독자층은 매우 소수이며 유일한 집단이었다. 같은 성직자들이 유일한 독자였다. 이데올로기는 무조건 기독교였고, 성직자 이외의 사람들은 독자로서 아예 고려되지도 않았다. 17세기도 마찬가지로 현실의 독자층은 교회와 왕정이라는 지배계층이었다. 이데올로기는 오직 지배층의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함이었고, 피지배층은 잠재적인 독자로서마저도 여겨지지 않았다. 이렇게 '잠재적인' 독자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 그리고 현실적인 독자를 분열시킬 만한 어떤 갈등도 없는 경우에, 작가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그 내부에서만 활동한다.
그런데 18세기에는 이러한 지배적 이데올로기에서 분리되기를 시도하는 독자층이 발생한다.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서로 상반된 욕구가 생겨난 것이다. 귀족층은 기존의 왕권신수설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를 더욱 공고히 하고자 했고, 부르주아지는 그들만의 독자적 이데올로기를 창조하기 위한 발판으로 우선 정치적 자유의 획득을 전취(戰取)하고자 했다. 작가는 어느 특정 계급에 속하지 않은 채로 자신만의 작품과 규칙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까지의 작가는 지배층에 '기생하며'(귀족과 교회는 생산적인 집단이 아니며, 이러한 독자층에 의존하던 작가는 기생 계급에 기생하는 것이라 보았다) 그들의 지배원칙을 부지중에 '수용'한 상태였다면, 이제는 그것에 자유로이 동의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었다. 작가는 자신이 세계를 가장 객관적이고 비판적이고 반성적으로 볼 수 있는 존재임을 자각했다. 따라서 이제까지 (지배층의 입장에서) 영구불변하다고 여겨졌던 역사를 '변화'시키기를, 역사로부터 '해방'되기를 시도했다.
작가는 이렇듯 특정층에 속하지 않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 존재에 해당한다. 그는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 억압에 대해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추상적 자유를 내세웠다. (여기서의 자유란 작가가 글을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자유와 독자가 이를 자유로이 재구성하고 재창조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또한 구속의 역사에 대해서 인류의 보편적 이성을 내세웠고, 역사는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 그것이 '발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런데 작가는 사상의 자유와 그 표현의 자유를 주장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부르주아(그 당시에는 상승을 원하던 계급)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되었다. 그 당시의 부르주아는 정치적 권력을 얻기 위해 언론의 자유를 얻길 바랬고, 누군가 그들에게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불어넣어줄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계층들이 승리를 거두면서 17세기 이데올로기를 지탱하던 영원이라는 개념과 과거라는 모범은 금가고 무너졌다. 작가는 현재를 바라보게 되었다. 어떤 관념에 대해 관조하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닌 현재를 위해 '행동'하게 되었다. 성직자와는 달리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작가는 당장 이 제도를 고발하고 당장 이 미신을 타파하며 당장 이 부정을 바로잡을 것을 추구했다.
그런데 문제는 부르주아지들의 혁명이 성공하자 독자층은 다시 지배층(여기서는 부르주아지로 변경)으로 통합되었고, 문학은 지배 계층의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재전락할 위기에 처한다. 작가는 지금까지는 고려되지 않았던 '민중'으로 눈길을 돌려본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는 프롤레타리아들의 입장에서는 이미 이룬 것이었고(실상은 기만에 불과했지만), 사상적 자유는 쓸모가 없었다. 단지 물질적 풍요와 착취의 종결을 바랬다. 작가는 민중이 아닌 부르주아 층에서 기원했기에 민중을 단지 피상적으로 다루는 정도에 그쳤고(사르트르는 빅토르 위고가 이 점에서 대단히 예외적인 작가라고 했다), 민중은 애초에 문학을 받아들일 세련된 수준을 갖추지 못했다. 종교 이데올로기에서 겨우 벗어났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봉사하기도 거부한 문학은 결국 모든 원칙에서 벗어난 채 프롤레타리아와는 상관 없는 독자적인 규준을 건설하기를 시도했다. 문학은 사회적 보수주의에 침묵하게 된 것이다.
사르트르는 좌파였기 때문에 이 장은 부르주아지들을 끊임없이 비판하는 입장에서 쓰였다. 따라서 그는 부르주아지를 거부하면서도 유일한 독자층인 그들에게 기생하듯 살아간 당대의 문학이,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를 소비하고 파괴할 뿐이었다며 매우 혹독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 대상은 초현실주의와 플로베르, 보들레르, 지드 등의 작가들이다.
또한 문학이 부르주아 중심 질서를 깨지 못한 것은 그들의 문체가 원인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신선하게 들린 의견이었다. 소설가는 자신의 이야기가 작가 자신의 주관성이 아닌 사물(세계)와 같은 '불투명성'을 지니게 하기 위해서, 작품을 스스로 꾸민 이야기가 아닌 일종의 '추억담', 사실과 사건의 전달처럼 보이게 했다. 따라서 소설의 시제는 과거형이었고, 화자는 과거의 무질서에서 벗어난 현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뽑아 전달한다. 과거의 혼란과 고통 그런 것들은 한때의 일이며 이제는 다 지나갔음을 내포한다. 청자는 사건과 분리되었으며, 과거의 무질서를 접하는 것은 현재의 질서 내에서였다. 놀람의 실체를 직접 보는 것이 아닌, 화자가 당시에 놀랐었다는 사실만을 전달받는다. 대표적인 예시가 모파상의 '공포', '잠드는 의자'이다. 이러한 현실이 부르주아가 그들을 경멸하는 작품을 보면서도 '이런 건 다 문학일 뿐이지'라며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소설가의 이러한 시선과 이렇듯 안정된 사회 내에서 변화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야기의 내용은 정지한 체계 내에서의 국부적이고 설명될 수 있고 바로잡힐 수 있는 변화에 불과했다. 변함이 없는 안정적인 상태가 가장 최선의 상태이며, 갈등과 분쟁과 불행은 어떤 국소적 부분이 잘못되어 생긴 잠시간의 '일탈'일 뿐이었다. 부르주아 중심사회에 더불어 당대의 소설가들이 무의식적으로 뒷받침했던 이런 관념은 고등학교 때 배운 사회이론 중 기능론과 매우 유사하다. 이에 반대되는 것은 마르크스 사회주의가 지지한 갈등론일 것이다. (그렇다고 사르트르가 마르크스주의에 동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정체되고 '독불장군' 같다며 공격했다.)
사르트르는 독자에게 현장감을 부여하고 독자를 사건과 갈등의 한가운데로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과거의 일을 현재에 와서 '설명'하는 식의 문체를 버려야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도 그런 수법을 도입하려는 시도가 물론 있었고, 희곡 형식과 내적 독백이 그 예이다. 그러나 잘 자리잡지는 못했다. 사르트르는 실제로 소설을 현재 시제로 기술하는 것을 실험해보기도 했는데, 이것이 바로 소설 '구토'이다.
정리해보자면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1) 작가가 보편적 인간이라는 특권적인 지위를 가지고 이분된 독자층 양쪽에 걸쳐 (2) 그들의 자유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좋은 예시가 유식한 흑인과 함께 선의의 백인을 독자로 삼은 흑인 작가 리처드 라이트이다. 그는 흑인을 대상으로는 그들의 위치와 그들이 현재 받고있는 취급을 '드러내고', 백인층을 상대로는 수치심과 의분을 자아내고자 했다. 다른 예로는 루소가 있다. 루소는 귀족에 대해서는 현실을 '증언'하고 평민을 상대로는 그들이 자기의식화를 하도록 종용하였다. 부르주아 출신이면서 부르주아이기를 거부하는 한편 공산당에도 가입하지 않은 사르트르 자신도 해당한다.
지금까지 중세부터 시작하여 사회의 여러 억압과 구속에 의해 문학의 본질, 작가와 독자 쌍방의 자유가 은폐되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문학의 본질이 요구하는 독자상, 다시 말해 사회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또한 작가는 누구를 위해 써야하는가?
우선 작가는 독자를 구체적 보편자(특정 시대 속의 모든 인간)로 상정해야 한다. 결코 추상적 보편자를 갖길 희망하거나(소수에 불과한 현실적 독자가 시대를 넘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 인간 계층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기에 불가능하다) 어느 시대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작가와 동시대에 있는 모든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써야한다. 작가가 특정 시대에 한정해 참여한다고 해서 죽자마자 명예직으로 전락하라는 법은 없다. 앞서 말한 리처드 라이트의 작품은 미국 내에서 흑인을 둘러싼 갈등이 사라지지 않는 한 지속해서 의미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구체적 보편자를 독자로 삼는다면 작가는 상황 속에 처해있음을 부정하고 영원을 추구하거나 관념만을 관조하는 것이 아닌 보편적인 상황에 놓여지게 된다. 작가 자신이 말하는 것이 곧 모든 사람이 가진 희망의 표현, 분노의 표현이 된다. 어떤 억압이나 형식에 의해 다듬어지지도 않고 '땀내가 나고 구린내가 풍기는' 이 일상적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되찾아, 자유의 기반에 서서 자유로운 모든 이들에게 제시하고 드러낼 것이다. 드러냄으로써 변화시킬 것이다. 자유로운 행위에 의지하고 자유로운 개개인의 판단에 맡겨지는 세계의 자기표현, 자기반성을 문학이 실현하게 될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를 위하여 그 어떠한 종류의 계급도 없는 사회를 추구했다. 계급은 억압적일 수밖에 없고 발언 및 행위의 자유를 없애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독자에 대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말했듯이 작가는 다만 그들의 자유에 호소할 따름이며, 그의 작품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독자가 스스로의 결심에 의해 그의 작품을 자기 것으로 떠맡아야 하는 것이다. 문학은 따라서 행동, 다시 말해 반성과 변혁의 '계기'일 따름이다.
6. 후기
이 책은 총 4장으로 이루어져있는데 마지막 4장은 이 책을 쓴 당시인 1947년 작가의 상황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기준으로 해서 프랑스의 작가층을 제1세대, 제2세대, 그리고 사르트르 자신이 속한 제3세대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리고 제3세대의 작가들이 무엇을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자세히 서술해두었다. 나는 프랑스의 철학과 문학 및 예술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고 사르트르의 설명이 너무나도 어려워서 제4장은 중도에 포기했다. 이를 위해 4차 도전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제4장을 읽으면서 재밌었던 구절이 있긴 하다 : 미국 작가가 자신의 독창성을 창출하는 것은 전통에 거역하지 위해서가 아니라,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ㅋㅋㅋ)
힘들어도 시간을 들이면서 메모도 하고 읽으니까 분명하지는 않아도 어렴풋이 머리에 남는 것이 생긴 기분이다. 실존주의가 깃들여진 문학이 워낙 많기도 하고, 이 책을 더 자세히 곱씹기 위해 나중에 실존주의를 설명한 책을 몇 권 더 읽고자 한다. 독후감을 남기니까 뿌듯하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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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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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봤어요! 읽다가 포기했었는데 다시읽어보고 싶어지네요 ㅋㅋ
ㅋㅋㅋ 저처럼 재도전하면 성공(?)할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