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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게이 모더니즘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책을 읽기 전에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모더니즘> 안에서 문학의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저자 본인의 감사의 말에서 모더니즘에 대한 책을 써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문학에 대한 이야기냐고 반문했던 것과는 대조적이고 조금 실망스럽다. 미술, 문학, 음악, 건축, 영화 등을 다루는데 그 중 문학과 음악 외에는 솔직히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는 탓이다. (사실 그나마도 문학과 음악 둘 다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대가들만을 다루기도 했다.) 어쨌든, 총체적 "모더니즘"이라는 조류를 다루는 것이니 세부적으로 소홀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하다.



책에서 말하는 모더니즘의 시작은 보들레르다. 그 이후에 이어지는 문학적 모더니즘과 다른 모든 분야에서의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보들레르를 꼽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제시하는 아이디어인데, 인용하자면 "우리가 풍경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름답다고 한다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통해서, 나 개인적인 시선, 내가 그 풍경에 부과하는 관념과 감정을 통해서 아름다운 것이다"(p.68 - 中) 라는, 당시로선 광오하지만 지금은 사실 그렇게까지 낯설지 않은 아이디어다. 예술의 핵심에 예술가를 놓고, 예술가의 주관을 중시하고, 그렇지 못한 다른 모든 것들을 그 아래에 두는 것이다.



이 근본만 봐도 알 수 있지만, 모더니즘은 태생적, 필연적으로 계층을 나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대중들과, 자기 취향은 있지만 저급한 취향만을 갖고 있는 부르주아 속물들, 그리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보는 극소수로. (저자가 책 말미에 현대의 평등한 사회에서 이 계층이 어떻게 여전히 유지되는지 이야기하는 것도 묘하다. 교육의 확대와 여유로운 삶 덕분에 극소수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외려 더 넓어졌다고 말이다.) 그리고 계층을 언제나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그렇듯, 모더니스트들 중에는 차별주의자들이 허다하다. 루이-페르디낭 셀린의 반유대주의나 스트린드베리의 여성혐오 같은 뚜렷한 집단을 향한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미적으로 무지한 고객을 아이 다루듯 하던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처럼 말이다.



다만 그렇게 계층을 나누고 만들어낸 예술품들이 실제로 뛰어난 이상, 그런 생각이 망상에 불과하다고 하기는 또 그럴 것 같다. 위에 말한 모든 모더니즘의 분야에서 우리는 실제로 그 영향력 이후의 문화를 겪고 있으니 말이다. 일례로, 내가 가장 관심 없는 분야긴 하지만 건축과 디자인만큼 그 영향력을 쉽게 볼 수 있는 분야도 없다. (부르디외의 분석을 믿는 사람들은 그저 모더니스트들이 예술장을 건 싸움에서 승리하였을 뿐이라고 말하겠지만, 아무래도 그런 사회학적 분석만으로 날려버릴 순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과 별개로 이들이 얼마나 내심 불안해했을지도 어느 정도는 상상이 간다.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늘 하는 이야기지만, 수정주의적인 시각으로 가치평가를 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는 거다. 인상파들이 그랬듯, 블룸즈버리 그룹이 그랬듯, 정말로 자신들이 후일에는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승리를 거두더라도 반쪽의 승리만을 거둘 수도 있었는데, 책에서 언급하였듯 얼마간의 시간 안에 사회에 수용되지 못한다면 그 예술작품은 그저 역사적인 의의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아마 책에선 언급도 안 된 수많은 모더니즘 작품들이 그런 신세로 펄프와 잉크 사이에만 남아 있을 터.



아니, 어쩌면 불안했을 것이란 추측도 과단일까? 비록 서두에서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극히 과장되어 있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들은 속된 말로 자기 잘난 맛으로 살던 사람들이니 말이다. 그리고 일부는, 거기에 꾸준함과 자기를 깎아내는 노력을 곁들여. 작가 스트린드베리에 대한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 그의 여성혐오는 대체로 실패하던 결혼 생활들에서 기인했고, 이를 알고 있었기에 두 번째 결혼을 하려던 시점에서도 그는 파국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생각은 "평소처럼 작가의 관점에서, 비록 이 일이 제대로 안 되더라도, 내 소설에 쓸 새로운 내용은 생기게 될 것이다"(p.573 - Robert Brustein 中)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쿳시가 도스토옙스키의 거죽을 쓰고 <페테르부르크의 대가>에서 드러낸 작가 정신이 다시 엿보이는 건, 아마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P.S. 내 생각보다도 모더니즘과 프로이트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 같다. 문학에서도 그렇지만, 영화와 프로이트는 특히 더 그렇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놀랐다. 최근 본 <킬링 디어>나 <조커>나 전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직접적/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건 그 연장선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