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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늘이 정한 때를 말하며, 바람과 구름의 조화를 기다린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는 무엇이고 그 조화란 또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들이 내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또 어떤 일일까. -이문열 초한지


이문열 초한지는 주로 유방과 항우의 천하쟁패에 관한 얘기이고, 여러 인간군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진나라 시황제의 폭거의 맞서 일어난 의사들의 얘기로 시작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천하를 차지하는 유방의 모습과, 그러한 유방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는 항우, 그들의 죽음 후 얘기까지 들어간다. 한 시대를 풍미한 어찌보면 우리같고, 어찌보면 위대한 사람들의 얘기다.


고전이 널리 읽히는 이유는 시대를 뛰어넘고, 보편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안겨주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역사 기록인 이 초한지는 고전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고등학교 세계지리 선생님이 말해주길 중국 사람들은 20대에 삼국지를 읽지 않았다면 상종하지 않고 30대에 초한지를 읽지 않았다면 상종하지 않고, 30대에 삼국지를 얘기한다면 상종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처음 그 말을 듣고선 둘 다 영웅 서사시 같은 느낌아닌가? 뭔 차이지? 라는 생각을 했지만 삼국지와 초한지 둘 다 읽어보니 그 다른점을 알 수 있었다. 삼국지는 영웅이 나온다. 조조, 유비, 손권, 관우, 제갈량 등등 사람으로서의 결점은 거의 없고 완벽한 인간상이다.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물론 실존 인물에서 나관중이가 각색한 것이지만) 초한지는 인간이 나온다. 어느부분에서 뛰어난 사람은 있지만 완벽하지 않다. 어딘가 모자르고 실수한다. 인물들이 삼국지와는 다르게 현실에서 살아 움직인다. 삼국지는 꿈 같은 얘기지만 초한지는 현실이다. 그래서 나이먹은 사람은 초한지를 읽으라고 한 것이구나 하고 느꼈다. 중국 고전들은 읽으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드는 기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초한지에 나오는 인물들의 실수를 바라보면서 내 인생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정말 귀한 기회였다


초한지에는 정말 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그 중 내가 마음에 드는 인물과 문장들을 몇 개 추린다.


진나라 승상 이사


어느 날은 관아 변소에 사는 쥐를 보았는데, 자주 드나드는 개나 사람이 놀랍고 두려워 그 더러운 먹이조차 마음 편히 먹지 못하였다. 또 어느 날은 넓은 곡식 창고의 쥐를 보았는데 건물이 넓은데다 개나 사람이 드나들지 않아 기름지고 맛난 곡식을 먹으면서도 겁내는 것이 없었다. 이사는 탄식했다. “사람이 잘나고 못난 것이 저 쥐와 같으니, 그것은 자신을 어디에 두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비천함보다 더 큰 부끄러움은 없으며, 가난보다 더 깊은 슬픔은 없다.


시황제가 나라에 있는 선비들을 쫓아내려 하자 이사가 올린 상진황축객서의 내용.


듣건대 땅이 넓으면 곡식이 많이 나고, 나라가 크면 백성이 많으며, 굳센 군대는 사졸들이 용맹하다고 합니다. 태산은 한 줌의 흙이라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높아질 수 있었고, 하해는 물줄기 한 갈래도 가려서 받아들인게 아니기에 그렇게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왕자는 무리지어 찾아오는 어떤 백성도 물리치지 않아야 그 덕을 널리 밝힐 수 있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에는 사방이 없고 백성들에게는 나라가 다르지 않으며 네 계절은 모두 아름다움으로 가득하고 귀신은 두루 복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진나라는 백성을 버려서 적국을 이롭게 하며, 빈객을 물리침으로써 다른 제후를 도와 공업을 이루게 하려합니다. 천하의 선비를 내몰고 발을 묶어 진나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른바 적에게 군사를 빌려주고 도적에게 식량을 대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글을 보고 시황제는 참으로 좋아하며 추방령을 거두어 들였다.


승상 이사는 자수성가의 표본이다. 한낱 미관말직에서 진나라라는 거대한 나라의 승상자리를 차지했다. 스스로를 비천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표현이 마음에 와닿았다.


한고조 유방


우선 유방이 40이 넘도록 미관말직에서 밥이나 빌어먹었고 계집질이나 좋아하며, 부모가 30이 넘도록 술값을 대줬다는 얘기를 읽고 좀 충격받았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장량, 진평과 같은 재사들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필요할 경우에는 몸을 한껏 낮출 수 있어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결국에는 천하를 쟁패하는 모습에 놀랐다. 주변 사람들이 앵무새처럼 경청해라, 경청해라 하지만 그 의의는 잘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유방의 얘기를 읽고 깨우친 바가 크다.


초나라 항우

읽으면서 항우의 무용은 없는 피도 들끓게 만들어 줬다. 그러나 너무 순박하고 강직한 것이 좋은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거역한다고 진의 병사 20만을 생매장해 관중에 먼저 들지 못해 정치적 부담을 스스로 짊어진 것, 자신의 충신인 범증조차 믿지못해 결국 범증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습들은 강직함이 참으로 좋지만은 않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고 사람이 너무 따져 살피면 따르는 무리가 없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럼에도 그의 마지막 장렬한 최후는 정말로 안타까웠다. 범즘의 말처럼 유방의 닳고 썩은 슬기보다는 항우의 깨끗하고 곧은 마음바탕이 새 세상을 열었다면 슬기보다는 정의가 앞세워진 세상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기신


기신은 유방이 항우에게 잡히기 직전인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이 미끼가 되어 유방을 살린다. 평소 유방은 유생들의 의관에 오줌을싸고 그들을 무시했는데, 기신은 그저 유방이 자신의 주군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리 하였다.

더구나 선비의 죽음은 네가 아는 그런 죽음이 아니다. 인의를 따르고 충서에 맞는 죽음이라면, 그 몸은 백 번 죽어도 맑은 이름만으로 천추를 사는게 선비다. 내 벗은 이미 그 한 몸을 버려 천추의 삶을 골랐고, 나 또한 그리하려 하거늘, 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느냐?”

기신의 벗이 기신이 죽고나서 항우를 성토하는 내용.


회음후 한신


무릇 남이 나를 가깝게 여기고 믿어주는데 그를 저버리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요. 비록 그로인해 죽게 될지라도 이 마음을 바꿀 수는 없소.”


하늘이 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리어 그 나무람을 듣게 되고 때가 이르렀는데 결행하지 못하면 거꾸로 그 재앙을 입습니다.” -괴철


남의 수레를 타는 자는 그의 걱정을 제 몸에 싣고 남의 옷을 입는자는 그의 걱정을 제 마음에 품으며, 남의 밥을 먹는자는 그의 일을 위해 죽는다.”


용맹과 지략이 주군을 떨게하는 자는 그 몸이 위태롭고 공로가 천하를 뒤덮을만한자는 그 상을 받지 못한다.”- 괴철


남의 좋은 꾀를 잘 들으면 일의 성패를 미리 살펴볼 수 있고, 헤아림이 좋으면 존망의 기미를 알 수 있다.”- 괴철


장군의 말씀이 반드시 그른 것은 아니나, 마음에도 없는 모반의 죄를 쓰고 싶지는 않소. 지난날 황상께서는 칼 한자루만 차고 간 나를 맞아들여 대장군으로 삼고, 일신의 재주와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해 주셨소. 하찮은 공도 지나쳐 보지 않으시고 나를 존귀하게 끌어올려 마침내는 이렇게 왕위에까지 이르게 하셨소. 설령 이 길로 끌려가 도끼와 칼 아래 죽는다 해도 황상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구려.”- 모반을 얘기하는 사로잡힌 초나라 장수 종리매에게 자신의 입장을 말하는 한신.


한신은 유방을 배신하고 천하를 휘어잡을 수 있으나 그러지 아니하고 유방과의 의리만을 얘기하며 끝내 토사구팽당한 인물이다. 그의 장수로서의 재능은 유방은 병사를 10만을, 자신은 병사가 많을수록 좋다고 말한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정말로 대단했다. 결국 마지막에 항우를 잡은 것 또한 한신이었다. 그러나 그의 순진함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갔다.


괴철

개가 요 임금을 보고 짖는 것은 요 임금이 어질지 않아서가 아니라 개는 제 주인이 아니면 짖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신만을 알고 대왕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한신에게 모반을 얘기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끌려간 뒤 유방에게 한 괴철의 변명


참으로 흥미로운 인물이지만 얘기가 적어 아쉬웠다. 그러나 적은 지면에서 등장하는 모습만 보아도 이 사람이 참으로 똑똑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초한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단순하지 않고 다면적이였다. 그래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늘이 정한때와 구름과 바람을 타고 일어난 효웅들의 얘기는 항우가 죽고, 한신이 죽고, 유방이 죽고, 여태후가 죽고, 여씨 일가가 죽어 모든게 끝이 났다. 인생은 안주할 수도 있지만 구름과 바람을 탈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