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과 나날』 프루스트. 최미경. 미행

28 바다

  첫사랑의 고뇌를 알기 전 삶에 대한 혐오와 신비의 매혹을, 그리고 현실이 그들을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함을 예감이라도 하듯 미리 경험한 사람을 바다는 항상 매혹시킬 것이다. 이들은 조금의 피로를 느끼기 전에 휴식이 먼저 필요하고, 바다는 이들을 위로하고 막연히 열광하게 할 것이다. 대지와 달리 바다는 인간의 노동과 삶의 흔적을 갖지 않는다. 바다에는 그 무엇도 머물지 않고 무엇이든 흘러갈 뿐, 배의 흔적도 바다 위에서는 얼마나 빠른 속도로 지워지는가! 바로 거기에 지상의 것이 지니지 못한 바다의 위대한 순수함이 있다.이 순결한 물은, 곡괭이가 아니면 흔적을 낼 수 없는 굳은 땅보다 훨씬 미묘하다. 아이의 발자국은 물 위에서 맑은 소리와 함께 깊은 자국을 내고 물의 일치된 빛깔은 그 순간 부서진다, 아니 모든 흔적이 지워지고 바다는 다시 이 세상의 시작처럼 고요해진다. 땅의 길들에 지쳤거나 그 길들을 시도해보기 전에 그것들의 기복이 얼마나 심하며 형편없는지 알아차린 사람은, 더욱 위험하면서도 더 매혹적이고 불확실하며 비어 있 흐릿한 바닷길에 매료될 것이다. 모든 것은 텅 빈 들판 같은 넓은 바다에 평화롭게 떠도는, 집도 그늘도 없는 하늘의 마을, 어렴풋한 가지들인 구름을 펼치는 커다란 그림자까지도 더욱 불가사의하다.

  밤에도 속삭임을 멈추지 않는 바다는 불안한 삶을 사는 우리에게 잠을 자라는 허가증과 같다. 모든 게 다 사라지진 않는다는 약속, 불이 켜져 있을 때는 혼자라는 걸 덜 느끼게 하려고 아이의 머리맡에 켜 둔 작은 전등과 같다. 대지와 달리 바다는 하늘과 분리돼 있지 않고 색깔은 하늘빛과 조화를 이루며 가장 섬세한 뉘앙스로 감동을 준다. 태양 아래 바다는 반짝이고 저녁이 되면 일몰과 함께 저문다. 태양이 사라져도 바다는 계속 태양을 그리워하고 그저 어둡게 남아있는 대지와 비교하면, 그의 빛나는 추억도 간직한다. 쓸쓸하면서도 부드럽고 일렁이는 물의 순간이 바로 우리에게 바다를 바라볼 때 가슴이 흘러 내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거의 밤이 되어 하늘이 캄캄한 대지 위로 어두워졌을 때도, 바다에서는 밤이 아직도 약하게 빛나고 신비하게도 낮 동안 반짝이던 기념물들을 비밀스럽게 물결 밑에 감추고 있다.

  바다는 우리의 상상을 신선하게 전환시켜주기도 한다.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해주고 우리의 영혼을 즐겁게 해주는데, 바다는 무한하지만 무능한 열망, 낙하로 끊임없이 부서지는 충동, 영원히 부드러운 탄식이기 때문이다. 언어처럼 사물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바다는 음악처럼 우리를 매혹시키고, 사람들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그러나 바다는 우리 영혼의 움직임을 모방한다. 우리의 마음은 파도와 함께 솟아나고 파도와 함께 낙하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잊고 스스로의 슬픔과 바다의 슬픔의 내밀한, 자신의 운명과 다른 것들의 운명을 합류시키는 일치 안에서 위로를 받는다.
 
1892년 9월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 프루스트. 이건수. 민음사

바다

현실에 결코 만족할 수 없음을 예감하기에, 당면한 고통을 외면한 채 삶에 대한 신비에 이끌리는 사람들에게 바다는 언제나 매혹적인 존재다. 피로도 느끼기 전에 휴식을 필요로 하는 이런 이들을 바다가 위로하고, 때로는 흥분시키기조차 한다. 대지와는 달리 바다는 인간들의 노동과 삶의 흔적들을 지니지 않는다. 어떤 것도 머물지 않으며 스치듯 지나가기에, 바다를 건너는 배들의 항적은 그 얼마나 빨리 자취를 감추던가! 이로 인해 지상의 사물들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바다의 엄청난 순수성이 생겨난다. 곡괭이를 필요로 하는 딱딱한 대지보다 바다라는 순결한 물은 훨씬 더 섬세하다.

물 위를 밟는 어린아이의 발은 또렷한 소리를 내며 깊은 고랑을 파고, 물의 통일된 뉘앙스를 한순간 깨뜨리지만, 곧이어 모든 파장은 지워지고, 바다는 태초의 날처럼 다시금 고요해진다. 지상의 행로에 지치거나 앞으로의 길이 얼마나 험난할지를 예견하는 사람은 이런 막연한 바닷길에 매료될 것이다. 바다의 길은 위험할수록 더욱 달콤하며, 어렴풋하고 황량하다. 바다에서는 모든 것이 신비스럽기만 하다. 촌락이며 나무 수풀이며 하늘에 삼라만상을 만들어 놓는 구름 때문에 바다 위에 펼쳐지는 거대한 그림자들도 그러하다. 이들은 거칠 것 없는 바다의 들판 위로 평화롭게 떠다니기 때문이다.

바다는 밤에 침묵하지 않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불안한 삶 속에서도 잠을 잘 수 있게 하는 허락이면서, 그렇다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약속의 매력 말이다. 마치 아이 방의 야등(夜燈)이 빛날 때면 꼬마들이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듯이. 대지처럼 바다도 하늘과 떼어 놓을 수 없는 법. 언제나 하늘의 빛깔들과 조화를 이루며, 미묘하기 짝이 없는 하늘의 뉘앙스들로 요동친다. 태양 아래 빛나는 바다는 매일 밤 태양과 함께 죽는 것만 같다. 태양이 사라지고 난 뒤, 바다는 여전히 태양을 아쉬워하며, 온통 컴컴한 대지를 마주한 채 그 찬란했던 추억의 조각만이라도 간직하려한다. 애조 어린 바다 노을의 순간은 너무도 감미로워 사람들은 자신의 심장이 녹는다고 느낀다. 밤이 다가와 하늘이 대지 위로 어두움을 드리울 때도, 바다는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파도 아래 묻힌 대낮의 어떤 찬란한 유물에 의한 것인지, 우리로서는 그 신비로움에 대해 알 길이 없다.

바다가 우리의 상상력을 새롭게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잊게 하기 때문이다. 바다는 인간의 마음처럼 무한하지만 무력한 열망이고, 끊임없이 추락하는 도약이며, 달콤한 한탄이기에 우리를 흥겹게 한다. 바다는 음악처럼 매혹적이다. 인간의 말과는 달리 음악은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지만, 우리네 마음의 움직임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정(心情)은 영혼의 움직임이라는 파도와 함께 솟아올랐다가 급격히 떨어지고는 하는데, 바다와의 내밀한 조화 속에서 위로를 받으며 자기 자신의 실패의 슬픔을 잊을 수 있다. 이렇듯 세상만사의 운명과 함께 뒤섞여 있는 바다.

189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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