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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을 죽을 만큼 두려워하였던 연자는 남편에게 우리 이제 결혼을 끝냅시다 하고 말할 것을 생각하면 재미스럽고 마음속에 무기 하나를 숨겨 가진 것같이 힘을 느꼈다."





97년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김지원의 자선작 「지나갈 어느 날」 을 읽었다. 지나간 어느 날도 아닌, 지나갈 어느 날. 어감이 약간 까다롭다.


아직 문예에 대해 거의 무지하다시피 해 소설을 읽을 때 작가가 어떤 의도로 이런 장면을 넣었는지,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파고들어 알아내는 능력은 없다. 따라서 주제 넘게 마구잡이로 덧붙이기 보다는 내가 어렴풋이 느낀 바만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감상문을 썼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대개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세상을 파악하고자 열심히 공부하고 사유하고 고민한다. 개중에는 나름의 지위까지 올라갔으며 뛰어난 지식을 뽐내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의 다른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바로 불륜을 원한다는 것이다. 주인공 연자는 바람을 피는 것에 환상이 있고, 그녀의 남편은 2년 전부터 생기지도 않은 애인을 위해 호텔을 예약해놓곤 했다. '선생'이라고 불리는 한 남자는 유부녀에게 추태를 부린다. 아무리 고고함과 세련됨을 추구하려고 해도 범속한 인간 속에는 어쩔 수 없는 번뇌가 존재하나보다. "번뇌란 결국 바람기인가?" 주인공 연자는 혼자 이렇게 생각해본다.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주인공 연자는 타고난 자신을 좋게, 더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아침마다 공부도 하고 예술가들의 모임도 다니고 설법도 들으러 찾아가지 않았는가? 그런데 기껏해야 바람 따위를 은근히 소망하고 있다니. 연자가 호감을 가진 '범상찮은' 청년 찬준도 그렇다. 늘 모범적인 생각만 하고 자신을 항상 발전시키고자 하는 그가 나중에 연자에게 꺼낸 말은 "이혼하고 나와 결혼하자"는 것이었다.


소설에서는 인간의 이런 어둡고 음침하기까지한 마음을 바람기로 통일하고 있지만 이것을 다른 방향으로 확장해보면, 솔직히 말해, 나 역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세상을 좀 더 잘 살기 위해, 나 자신을 확장시키기 위해 계속 책을 읽기는 있지만 아직 그것을 마음까지 깊숙이 내려보내지는 못하고 있나보다.


글의 배경은 80년대인데 처음부터 끝 부분까지 핵전쟁에 대한 걱정을 언급하고 있다. 연자가 아침마다 공부를 위해 읽는 책에서도, 찬준도, 그저 "믿으며 기다리라"고 말한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꾸욱 참고 다음 세대에게 사랑과 편견 없는 지식을 넣어준다면, 언젠가는 세계의 평화가 오지 않겠냐 라는 것이다. 아무 의심하지 말고 삶을 삶대로 그 자체로 살라며.


남편이 언젠가 생길 애인을 위해 예약해둔 호텔로 연자의 가족이 향하는 길에 그녀의 아들은 묻는다. 지금이라도 전쟁이 날 수 있는데 왜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해야 하냐고. 연자는 좋은 미래를 위해 참고 견뎌야 한다고 대답해준다.


이 글을 쓰다보니 그런 것도 같다. 우리 내면의 음침한 어둠과 번뇌는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것이란 이유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추면 안 된다. 비록 지금은 책이 내 인생에 뚜렷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어쩐지 실감을 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저 믿고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 어쨌거나 삶은 살아야 하고,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세상을 더 알고 싶기 때문이다.


사족이지만 맨 위에 연자가 이혼에 대해 남몰리 한 생각이 재밌었다. 나도 이별을 혼자 몰래 간직한 최후의 핵무기쯤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무기를 욱하는 마음에 뻥하고 터뜨려버리면 남는 것은 없다. 포기해버리는 것이 아닌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역시 쉬운 게 아니다. 지나갈 어느 날이지... 하는 마음을 먹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