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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2. 전시사회


제의라는 목적에 사용되는 물건들은 현존한다는 것이 보인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사물들이 모두 상품화되어 전시되지 않으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는 긍정사회에서 사물들의 제의가치는 전시가치에 밀려 사라지고 만다. 전시가치는 완성된 자본주의의 핵심이며, 마르크스가 제안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대립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전시가치는 사용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이기에 사용가치가 아니고, 그렇다고 노동력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라서 교환가치라고 할 수도 없다. 전시가치는 오직 주의의 생산을 통해 발생한다.


저자는 그리스 신전의 안보이는 부분을 언급하며 그런 장소 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그 장소가 보여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음을 설명한다. ,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전시가치 즉, 존재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보여지는게 중요하다는 것을 언급한다.


사진은 과거에 존재한 것에 대한 증서이다. 바르트에게 날짜는 사진의 일부이다. 전시가치로 가득 차 있는 오늘날의 사진은 이와는 다른 시간구조를 지닌다. 서사적 긴장이나 소설의 극적 구성을 허용하지 않는, 운명도 없고 부정성도 없는 현재가 사진의 시간 구조를 결정한다. 사진의 표현은 낭만적이지 않다.


저자는 셀카는 페이스로, 추억사진은 얼굴이라는 단어로 이를 표현한다. 페이스는 오직 보이는 것에 중점을 둔 사진이며 이는 sns따위에 올라오고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지는 사진들이다. 얼굴은 존재한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추억사진(얼굴)은 그때의 시간과 공간을 붙잡아 주는 물건이다.


전시되는 사회에서는 모든 주체가 스스로를 광고의 대상으로 삼는다. 모든 것이 전시가치로 측정된다. 전시되는 사회는 포르노적 사회이다. 모든 것이 겉으로 나오고, 벗겨지고 노출된다. 과도한 전시의 결과로 모든 것이 어떤 비밀도 없이 즉각적인 소비에 내맡겨진 상품으로 전락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모든 것을 전시의 강제아래 복속시킨다. 오직 전시적 연출만이 가치를 생성한다. 사물들은 어둠속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조명 속으로 사라진다.


저자는 페이스 사진들이 과도한 조명속에 사라진다고 표현한다. 이는 사진이 주의를 생산할쁀, 의미를 상실한다는 뜻인 것 같다. ‘얼굴인 사진들은 우리의 책장 속에서, 박스 안에서, 즉 어둠 속에서 존재한다. 주의를 생산하지는 못하지만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전시가치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외양에 달려있다. 그래서 전시의 강제는 성형수술과 피트니스 클럽에 대한 강박을 낳는다. 성형수술의 목표는 전시가치의 극대화에 있다. 오늘날에는 내적 가치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외적인 척도를 제공하는 자가 모범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폭력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러한 척도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전시의 명령은 가시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절대화를 초래한다. 비가시적인 것은 전시가치, ‘주의를 생산하지 못하는 까닭에 존재하지조차 않는 것이 된다. (임의 강조) 예컨대 좋아요와 같은 취미판단을 위해 오랜 시간을 두고 대상을 감상할 필요는 없다. 전시가치로 채워진 이미지들은 복합성을 띠지 않는다. 그런 이미지들은 단순 명료하고, 그래서 포르노적이다. 여기서 살펴보고 성찰하고 숙고하게 만드는 굴곡진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의미는 느리다. 의미는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고속순환에 방해 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투명성은 의미의 공허와 긴밀하게 관련된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거대한 더미는 공허에 대한 공포에서 생겨난다.


포르노적이고 단순 명료한 이미지들. 전시가치만을 위해 만들어진 이미지들에게 의미란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은 주의를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의를 생산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외양에 미친 듯이 매달린다. 그래서 우리는 성형수술과 피트니스 클럽에 대한 강박을 가지는 것이다. 니체가 말했듯이, 신이 죽으면 건강이라는 이름의 여신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이다.


거리가 없다는 것은 가까움을 뜻하지 않는다. 거리의 소멸은 오히려 가까움을 파괴한다. 가까움은 풍부한 공간을 바탕으로 하는데, 거리의 소멸은 공간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투명성은 모든 것을 탈 거리화 하여 똑같이 거리가 없는 존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즉, 투명사회에서 거리는 제거되어야 할 부정성으로 간주된다. 거리는 커뮤니케이션과 자본의 순환을 가속화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적 논리로 모든 형태의 거리를 투명사회는 제거하고 거리가 사라짐에 따라 관찰도, 머무름도 불가능해지고 있다. 이거은 시선 자체의 종언을 가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