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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이 글은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는 문학이나 회화에서 표현되는 풍경을 단순한 풍경으로, 다시 말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자연화가 가능한 것은 실은 우리가 그러한 예술적 전통과 기법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뿐이다. 풍경 묘사에 이용되는 원근법은 전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고도로 수학적인 기법으로 발전한 것이다. 즉 그것은 '한 주체의 시선으로 조감하는 고정된 장소'를 어떻게 2차원의 평면 위에 표현하는가 하는 고민의 결과이다.

  원근법의 발명 이전, 회화에는 근대예술에서와 같은 순수한 '풍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풍경이란 것은 전적으로 영웅적이거나 종교적인 이야기의 배경으로만 존재했다. 그러나 원근법에 의해 순수한 풍경 그 자체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고진은 이것이 근대 회화가 시간성과 역사성을 전제하는 '이야기'를 풍경의 바깥으로 밀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말한다. '한 주체의 시선으로 조감하는 고정된 장소'란 다시말해 시간성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말하자면 영원으로서의 순간인 것이다.

  역사가 사라진 공간이란, 아이러니하게도 순수한 공간이 아니라 주체에 의해 지각된 공간이 된다. 풍경은 단순히 장소를 묘사하는 것과는 다르다. 근대 회화에서 말하는 풍경이란(칸트의 '의식에 주어지는 것으로서의 현상'이 그런 것처럼) 언제까지나 하나의 주체에 의해 조감되는 풍경인 것이며, 시간성으로부터 유리된 풍경의 자리는 궁극적으로 주체의 시선을 전제한다.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시녀들>을 분석하는 기법을 떠올리게 하는 이런 접근은, 풍경과 내면의 대립에 대한 변증법적 전회를 제시한다.

  근대문학적 전통 하에서 풍경이란 언제나 내면과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내면의 표현을 중시하는 양식이 낭만주의이고, 내면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객관적 풍경을 중시하는 양식이 자연주의 혹은 리얼리즘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실은 낭만주의에는 자연주의적 계기가 내포되어 있으며, 자연주의에는 낭만주의적 계기가 내포되어 있다. 개인의 내면은 풍경과 결부되어 있으며 풍경은 내면으로부터 유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풍경은 실은 외부의 풍경이 아니라 주체에 의해 지각되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개인의 내면이라는 것 또한 풍경으로 존재하며, 그것은 풍경이 발명된 것처럼 똑같이 발명된 개념이다. (칸트의 자아가 주관적인 판단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상기해보라. 고진이 '내면 또한 발명된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역사적인 의미이면서 동시에 칸트적인 관점을 전제하고 있기도 하다.)

  풍경을 그려내는 화가와 소설가는 순수한 풍경을 보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 주어지는 것으로서의 풍경을 그린다. 풍경화의 풍경은 내면의 풍경이다. 고진은 이것을 (그의 많은 저작들이 그러한 것처럼) 국민-국가의 성립이라는 배경과 연결지어 이해한다. 국민-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타자를 재현시켜온 방식이 바로 이러한 '풍경화'와 닮아 있다는 것이다. 네이션은 그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들을 풍경으로 재현하며 성립된다.

  이런 식으로 역사를 되짚어본다면, 내면도 풍경도 어떤 보편적인 소설의 기법 같은 것이 아니라 단지 역사적으로 특수하게 형성된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원근법이 그런 것처럼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기법이다. 우리가 '작가의 내면 표현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소설의 '깊이감' 역시 실제로는 하나의 기법이다. '고전 소설에는 '깊이감'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할 때, 그런 선언에는 깊이감이 발명된 개념이라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이상의 내용은 하나의 도식이다. 아마도 데리다주의와 푸코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이는 이 도식들이 학술적으로 얼마나 엄밀한 것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내게 그런 것을 판단할 능력은 없다. 대신 이 저작이 근대 영문학에서 중요한 주제 하나를 건드리고 있다는 것은 안다. 그것은 소설가의 현실 배반이라는 문제다.

  소설에서의 풍경은 어쩔 수 없이 '내면에 주어지는 풍경'이다. 그렇듯이 타자를 풍경으로 대하는 소설가의 태도는 언제나 현실 배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소설가는 타자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의 풍경으로 조감해낸다. 타자가 외부 세계에 존재하도록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의해 해석된 존재로 만든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소설가에게 외부세계란 자신에게 지각되는 풍경을 묘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소재집일 뿐이다.

  물론 이런 인식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기는 쉽다. 소설가는 그가 속해 있는 기법과 전통에 속해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는 외부세계를 하나의 소재집처럼 대할 수 없다. 오히려 그의 내면을 낳은 것이야말로 외부세계라고 해야 한다. 또 외부세계와 내면성을 성급하게 대립시키는 태도 또한 '근대문학적 전통'의 일부이며, 얼마든지 그 진실성을 의심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비판과는 별개로 고진의 이 저작이 내게 갖는 의미는 크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나 역시 소설의 현실배반이라는 문제에 대해 깊게 고민해왔다. 내가 재현하는 현실이란 언제나 어쩔 수 없이 '나'에 의해 지각된 현실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은 나를 괴롭혔다.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은 소설가의 현실배반이라는 문제에 대해 거리를 두는 힘을 제공한다. 그것은 근대문학의 토대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소설가의 숙명이지만 한편으로는 근대문학이라는 토대 위에서만 성립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다시말해 근대문학을 떠나는 것에서 현실에 대한 관여를 찾는다. 그러나 나는 그런 방식을 택할 수는 없다. 오히려 내게 익숙한 것은 지극히 비판이론적인 전통에서, 하나의 내파를 기획하는 것이다. 쿳시의 소설들이 그런 것처럼, 극한까지 정련된 문학은 문학 내부에서 문학을 파열시킨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문학을 쓰기를 원한다. 그것이 막차가 떠난 이후에 막차를 타려는 허무한 노력이 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