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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붕괴>는 좁게는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인한 금융 위기를 칭하지만, 넓게는 그 해부터 현재까지 줄기차게 이어진, 기존 시스템들에 대한 신뢰도의 붕괴를 칭하기도 한다. 왜냐면 책에서 몇 번이나 짚고 넘어가듯, 당시의 대재앙은 어느 좁은 집단의 문제라기보다는 전체적인 문제, 그리고 금융 체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공유지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건 너무 거친 비유겠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기업들과 개인들의 방종에 가까운 투기가 모두 한 데 모였고, 우리들 모두가 그게 방종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개입이 중요했는데 (특히 08-10년도의 위기를 대처한 미국의 사례에서) 시장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학자들은 당시의 판단과 행동들이 도저히 자본주의 국가에선 볼 수 없을, 사회주의적 정책이었다고들 말한다. 이 점을 짚고 시작하는 게 제목 <붕괴>에 대해 이야기할 좋은 시작점일 것 같다. 리먼브라더스 사태, 유로존 사태, 동유럽과 신흥국가들의 위기, 러시아와의 갈등,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일들을 대처함에 있어서 권력의 분리와 시장의 자유는 솔직히 방해가 되면 됐지, 전혀 도움은 되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가 이 십년을 서술함에 있어서 줄곧 유지한 관점이다. (이것이 필요하지 않다거나 지양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하지는 않겠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 역시 혼란스러워하며 칼 슈미트스러운 "아니, 어쩌면 우리는 기술자와 군인들이 내리는 판단과 공포의 균형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할지도 모른다"(p.853)는 이야기를 하니까.)
신케인즈주의식으로 근 십 년 동안의 경제학사를 읊고 분석해나가면서도, 이런 해결책이 있었을 텐데 어째서 시행하지 못했느냐에 대한 이야기가 변주된다. 어째서 오바마 행정부는 좀 더 과격한 경기부양책을 쓰지 못했던가? 어째서 유로존은 공동기금을 제 때 모으지 못했던가? 어째서 각국 정부는 긴축정책을 쓸 수 밖에 없었나? 이 모든 것은 정치와 얽혀 있다. 정부의 개입에서 해결책을 찾은 최초의 사태처럼, 모든 경제적 판단은 언제나 정치와 수반되었다. 따라서 이 책은 순수한 경제학사 서적보다는, 일종의 정치역사서에 더 가깝다고 본다. 모든 종류의 (시장을 발작하게 만들거나 진정하게 만드는) 발언들, 정책들, 그 밖의 영향력 있는 행위들은 행위 주체의 현 상황과 그 주체가 속한 집단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었다. 오바마 행정부가 국민들의 신임을 점차 잃기 시작하며 트럼프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둔 것이 이러한 진행의 클라이맥스였다.
다양한 국가들에서 민족주의와 극단주의가 솟구치고 있다. 그리스와 같은 파산한 나라에선 말할 것도 없고, 러시아의 민족주의 정권, 영국의 브렉시트 등등. 책의 중간에서 "다극화 사회"라는 키워드를 말한다. 이 키워드는 책 내에서 한 번도 그 자체로서 빛을 발한 적이 없는데, 비록 정치적/지정학적으로 세계적 무게추가 미국 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 등의 국가에 분산된 것 같다고 말을 하면서도, 결국 달러화라는 국제통화와 미국 재정부 채권에 언제나 깊고 질기게 묶여 재정 정책에 따라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여준 탓이다. 다만 그것이 미국에 타국들이 종속되어 있다는 의미로서보다는 모두가 심각할 정도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에서다. 미국의 정책으로 중국이 경제 위기에 빠지면 미국 역시 안전할 수 없다. 그리스 경제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는 유럽을 보고 미국이 IMF를 앞세워 개입한 것도, 또 다시 리먼브라더스 사태와 비슷한 파국이 저것을 계기로 일어날 수 있다고 본 탓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연결을 혐오하며 나오는 것이 저러한 극단주의다.
비록 경제학적으로 저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분석하진 않지만, 정치적으로 보았을 때 저것이 효율적인 선택일 수도 있겠다는 식의 논조 역시 나온다. "서방측 언론들은 겉으로는 자유시장경제 체계를 옹호해왔지만 중국의 이런 국가적 개입에 대해 안도감을 감추지 못했다."(p.839) 또한 곡해되는 경제 정책에 대한 논조도 나온다. ""야만적" 금융자본주의는 이라크 전쟁이나 기후 변화에 대한 부정과 마찬가지로 앵글로아메리카 국가들만이 보여주는 현대화의 치명적 변종이라는 것이다."(p.121) 수많은 사람들의 시각과 수많은 사건들이 다뤄지며, 춘추전국시대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정권들의 난립을 이야기한다. 위에서 이 책을 정치역사서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 책은 하나의 대하 소설과 같이 장대한 범위에서의 혼란을 최대한 끌어모아 다루고 있다. 미국에서 시작해, 미국으로 끝나며. 그리고 그 장정을 본 사람들이 현재 트럼프에 의해 완벽하게 부정된 미국의 가치관을 어떻게 바라볼지는 독자에게 맡기는 식으로.
어려운 책 읽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