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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관련 저작은 '니코마코스 윤리학', '에우데모스 윤리학', '대윤리학'. 이 중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가장 원숙한 담론들을 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 관심을 가지는 건 인간의 행복이다. "어떤 삶이 좋은 삶, 즉 행복한 삶인가?"
모든 인간의 행위들이 지향하는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행복 그 자체를 위해서이다.
2.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는 두 가지 방법
(1) 역사적 관심
: 문학이나 격언으로 전해져오던 당대 그리스의 전통적 도덕 사유들이 소피스트들에 의해 공격당하기 시작.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전통적 도덕 가치를 어떻게 '논리적'으로 방어하거나 반성했는가?
(2) 철학적 관심
: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윤리적 사유와 논리적 방법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 통념, 전통, 상식(endoxa)으로부터 출발해 이성과 충돌(paradoxa)시키는 식으로 논지를 진행시킴.
- 전통과 이성
모든 것을 아버지의 말에 따라야 하는가? (정확한 근거는 부족하지만 친숙한 전통)
아니면 병들었을 때는 의사를, 요직을 선출할 때는 능력있는 사람을 따라야 하는가? (이성)
우리는 흔히 도덕이란 전적으로 이성의 문제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딜레마를 지나치지 않았다.
- 법과 자연
제도와 법률, 신앙이 도시마다 다르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소피스트들은 '정의란 자연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ex. 플라톤 '국가' : 정의는 강자를 위한 이익 by. 트라시마코스)
아리스토텔레스는 법률적 정의와,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근거인 자연적 정의를 구별.
(법률적, 인위적 정의는 척도와 같다. 척도는 지역별로 상이하지만 그 중에서도 더 적합한 척도가 있다.)
즉, 도덕적 상대주의와 적극적으로 대결.
- 말과 행위
말과 행위는 일치해야 한다. 아무리 탄탄한 논리의 말이라도, 그것이 행동으로 뒷받침될 수 없다면 그것은 공허하다.
플라톤이 주장한 '좋음의 이데아'는 인간적 행위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게 아니므로 거부되었다.
- 좋은 인간과 좋은 시민
윤리와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 자신의 참된 행복을 잘 추구하는 탁월한 인간은 정치적으로도 탁월하여 국가의 행복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는데 본문에서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음.
3.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구조
(1) 행복
인간은 '좋음'을 목적으로 행동한다. 좋음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그 자체가 목적이며 일단 실현되면 다른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최고의 좋음, 즉 행복이 있다.
행복의 현실화란, 인간에게 주어진 고유한 기능과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부, 명예, 쾌락이 통념적으로 행복으로 인식되는 것과는 달리.
그렇다면 인간의 고유한 기능은? 이성을 통한 사유 능력. 이를 발휘하고 그에 맞게 사는 것이 좋은 인간, 행복한 인간.
이성을 가지고만 있으면 안 되고, 그걸 발휘할 기회가 오면 언제든 행동으로 발휘할 수 있는 품성상태를 갖추어야 한다. (용기, 절제, 온화 등과 같이)
* 똑같은 정의로운 행동을 해도, 그게 반드시 둘 다 정의로운 사람을 의미하진 않는다. 어떤 사람인가는 그가 어떤 행동을 했는가보다는 '어떤 삶'을 추구해서(즉 행복의 개념 정의를 어떻게 해서) 그 행동을 했느냐에 달려있다.
(2) 탁월성
어떤 것을 좋은 상태에 있게 해 그것의 기능을 잘 수행하도록 하는 것.
이성의 발휘(ex. 계약을 잘 지킴)라는 기능이 잘 수행되려면, 정의라는 탁월성이 습관으로부터 미리 갖춰져 있어야 함. 그렇지 않으면 이성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부정의한 행위가 도출. 즉, 탁월성은 기능을 잘 수행하기 위한 기술과 같은 것이다.
인간 고유의 기능은 이성적 부분과 비이성적 부분으로 나뉘므로, 이에 적용하는 탁월성도 각각 사유적 탁월성과 성격적 탁월성으로 나뉜다.
성격적 탁월성은 인간 고유의 기능인 합리적 선택이 발휘될 수 있도록 중용 안에 있는 '품성상태'. 중용이 아닌 지나치거나 모자란 품성은 악덕이다.
성격적 탁월성은 습관에 의해 길러진다.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면 용기 있는 행동을,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면 절제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 악덕한 행위를 하면서 탁월한 품성이 길러지길 바라면 몰지각한 것이다. (말과 행위의 일치 중시)
사유적 탁월성은 가르침에 의해 길러진다. 이는 다시 수학 등의 불변 원리를 탐구하는 철학적 지혜와, 윤리와 정치 등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을 통찰하는 실천적 지혜로 나뉜다.
(3) 합리적 선택
중용을 추구해야 성격적 탁월성에 이르는데, 이 중용은 올바른 이성 즉 실천적 지혜가 규정한다.
영리함은 가치중립적인데, 이것이 나쁜 목적을 추구하는 '교활함'이 되지 않고 좋은 목적을 추구하는 '실천적 지혜'가 되려면 성격적 탁월성이 필요하다.
즉 인간의 기능이 최선으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실천적 지혜와 성격적 탁월성 둘 다 요구된다. 서로 상관 없는 영혼의 두 부분이 아님.
합리적 선택에 따른 행위란, 욕구나 성격이 추구하는 것이 이성에 의해 긍정되어 숙고를 통해 밖으로 드러난 행위이다. (비자발적인 행위보다는) '합리적 선택'에 의한 행위로써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합리적 선택에 의한 행위와 그 행위들이 쌓여 형성된 사람의 인격은 그 사람의 책임이다.
(4) 자제력 없음
소크라테스는 어떤 것이 최선인지 알면서도 그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자제력 없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음. 그러나 그런 '자제력 없음'은 일상에서 아주 흔히 목격됨. >>> 통념과 이성의 충돌(paradox)
즐거움과 고통에 관련해서 무절제는 지나친 상태, 즉 악덕이지만 자제력 없음은 그저 회피해야 할 성품. 차이가 있다.
무절제는 지나친 쾌락 추구 및 과도한 고통 회피를 스스로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 자제력 없음은 합리적으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됨을 알지만 그러지 못할 만큼 감정에 지배.
(5) 즐거움
즐겁지 않은 삶은 행복한 삶이 아니다. "즐거움은 좋은 것이 아니다, 악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비판한다.(통념에 어긋날 뿐 아니라 실제로 불가능한 것을 말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즐거움을 완성을 향해 채워짐의 과정에서 오는 '운동'으로 보았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처음부터 온전히 발휘되는 '활동'으로 표현했는데, 이 부분은 본문에서 이해하려고 해봐야겠다.
(6) 친애
친애 또한 합리적 선택에 기반한 품성상태인데,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 고유의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중용의 품성상태이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인 감정이며, 그 감정을 양쪽 모두가 알고 있어야 친애가 성립한다.
유익이나 즐거움을 기반으로 한 친애는 진정한 친애가 아니다. (유익이나 즐거움이 사라지면 친애도 끝나기 때문) 서로의 탁월성을 기반으로 한 친애만이 완전한 친애이다. (탁월성은 각자가 내재하는 것이기에 불완전하지도 않고 우연하지도 않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친애로써 친구 관계 속에서 나와는 다른 타인을 보는 것이 아닌 확장된 자아를 볼 수 있다고 생각 >>> 친구는 또 다른 자신.
행복한 사람도 친구가 필요할까? 자족적이라는 것은 고립이라는 뜻이 아니다. 행복은 자족적인 것이다. 그리고 친구와 친애는 행복에 영향을 주지 않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행복을 구성하는 내부적인 요인 중 하나이다.
(7) 관조적 활동으로서의 행복
가장 완전하게 탁월한 활동은 '관조'이며, 우리 영혼 중 그 부분에 해당하는 영혼은 '지성'이다. 지성으로 관조하는 삶이 가장 신적이고 불멸하는 삶이다. (주지주의 : 지성과 이성이 욕구나 감정보다 우위)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지는 건 아리스토텔레스의 감정과 욕구가 아닌 그의 지성이므로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니는 듯하다.
내일부터 1장 도전
아리스토 잘 아는 독붕이들이 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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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번역하신 교수님들의 친절한 설명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