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초부터 17세기까지 당시 유럽 사회는 악마적 마법의 존재, 곧 마법의 집회와 밀교가 존재한다고 믿었음.


처음에는 이교도를 박해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악마를 따르는 마법사와 마녀를 처단하기 위한 지배 수단으로 바뀜.


마녀사냥은 극적이고 교훈적인 효과 덕분에 금방 번졌고,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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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2년 백작의 영지에서 48명이 마녀로 낙인찍혀 화형당함.


1587년 도릴 지방의 촌락에서 7년간 368명의 마녀가 적발되어 화형당함.


1590년 남독일의 네스도링켄에서 3년간 32명의 마녀가 화형 또는 참수당함.


1590년 소도시 에링켄에서 65명의 마녀가 처형되었고, 1597~1676년에 197명의 마녀가 화형당함.


소소크만텔 승정령에서는 1639년에 2,428명, 1654년에는 102명이 처형됨.


스타이엘마르크 지방에서 1564~1748년에 1,849명이 소추되어 1,160명이 사형에 처해짐.


나노수 지방에서는 1629년부터 4년간 2,255명이 마녀로 소추되었고, 뷔르튄겐 지방에서는 1633년 이후 3년간 11명이 처형됨.


게오르겐탈이라는 인구 4천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에서 1652~1700년에 64회의 마녀재판이 실시됨.


반베스크 승정령에서는 1627년 이후 4년간 화형단한 마녀가 285명이었고, 그 이후 30년에 걸쳐 이 재판소에 계류된 마녀재판은 900건을 넘김.


뷰스르부르크 승정령에서는 1623~1631년에 화형당한 마녀가 900명에 달함. 1627년부터 이후 연간 29회의 재판에서 화형당한 157명의 희생자를 보면 시의회의원, 고급관리의 부인, 시의회의원의 처자, 그 지방의 가장 아름다운 자매, 8, 9, 12세의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었음.


후루다에 살고 있는 바루다세르 후스라는 마녀재판관은 19년간 700명의 마녀를 화형시킴. 자신의 일생동안 1천 명을 처형하기를 소원하였다고 함.


로트링겐에 살고 있던 니콜라스 레미는 재직 15년간 화형시킨 마녀가 900명에 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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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은 15세기 이후 이교도의 침입과 종교개혁으로 분열되었던 종교적 상황에서 비롯됨.


마법과 마녀는 그 시대가 겪었던 종교적 번민(괴로움)에서 탈출하는 비상구였던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음.


이러한 종교적 배경과 함께 마녀사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중세사회의 혼란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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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전쟁, 30년 전쟁, 악화되는 경제상황, 기근, 페스트와 가축들의 전염병이 당대 농촌사회를 휩쓸었던 불행이었음.


사람들은 연속된 불행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을 찾아냈고, 마침내 불순한 사람들인 마법사와 마녀의 불길한 행동에서 찾아냄.


공동체의 희생양으로 지목된 사람들에 대한 심판관은 개인간의 분쟁을 악마적 마법의 결과로 해석하고 자백을 이끌어냄.


자백하지 않는 자에게는 공포심을 자극하는 심문과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고 합법이었음.


고문은 거의 모든 마녀재판의 필수적인 하나의 요소로 등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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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을 당시에는 신에 대한 반역이나 모독은 그 어떠한 범죄보다 중죄였음.


처음에는 마법의 유형에 따라 달리 취급하였지만 나중에는 마녀라는 것 자체만으로 화형, 참수, 교수 등의 엄벌을 받음.


마녀재판을 1만 건 이상 분석한 로버트 무쳄 블래드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마녀로 기소된 사람 가운데 거의 반이 처형된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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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르네상스의 진전과 더불어 이성적 세계관과 과학 정신이 시대정신이 되었고 이것은 신학에 기반한 과학의 해방을 의미함.


이로써 불합리의 극치인 마녀재판도 존립의 근거를 잃게 됨.


18세기를 지나면서 마녀의 고문과 그에 따른 화형도 사라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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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악마와 마법 그리고 마녀가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신념은 지배계급과 당시의 지식인인 신부와 법관들이 만들어낸 문화적 산물이었음.


마녀사냥의 주된 공격대상은 과부 즉 여성이었음.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여성이란 원죄로 각인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임.


여성은 악마의 심부름꾼이라는 생각이 사람들에게 있었고, 여성의 육체 자체가 두려움을 자아낸 것.


그리스도교 이외의 어떤 사상과 움직임도 용납할 수 없었던 중세 사회에서 대다수 민중들의 체제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마녀라는 이름의 희생양을 통해 대리해소하는 동시에 마녀를 따돌린 '우리 사회'는 안전하다는 만족감과 감사함을 느끼게 하는 하나의 사회적 배제, 통합기제로 사용되었던 것임.


출처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02239&cid=40942&categoryId=31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