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시대 대 세력을 구가하던 묵가가 진한 이후 깨끗히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것은
중국사의 여러 수수께끼들 중 하나다
묵가는 18세기 후반 청 고증학자들에 의해 재발굴된 후 손문 양계초 호적 등 신중국
지식인들로부터 서양의 과학 논리 공리주의에 대적할만 한 고유 사상으로 칭송받았다
<묵공>이라는 영화로 널리 알려지고 그 겸애 비전 이념의 투철함에 많은 이들이 감동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강인한 전사집단이 겉보기에 그리도 허무하게 소멸했을까?
진정 맥없이 해체되었을까?
원래 진나라는 묵가세력을 다수 등용 활용함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묵가의 수성기술은
유명했고 법율 제도정비 및 행정실무 역량도 매우 탁월했다. 법가의 원천이 묵가라 볼 수
있다
후에 진시황이 가혹한 강성법가를 취하면서 연성법가인 묵가와 갈등을 빚는다
더우기 방어적 수성위주의 <평화유지군>인 묵가는 진영정의 정복적 통일정책과 마찰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시황이 제패한 후 <눈에 가시>는 힘없는 유가가 아니라 전투집단 묵가였다 분서갱유란
말 속에 이미 묵가말소의 책략이 들어 있다
중국사 최고 책사들 중 일인인 장량은 본래 묵가 출신이다 한고조을 도운 것은 진왕조의
묵가 탄압이 중요 요인이었다. 한 통일이후 한의 정책은 묵가적인 연성법가를 펼친다
묵가적 전투집단의 필요성이 사라지고 묵가는 표면 아래로 잠재화되고 변환을 도모하는데
그것이 바로 [도교화]였다
원래 도가는 인격신 숭앙과 민중지향성이 적었다. 허나 묵가는 두 성격이 강했다
도가와 결합한 묵가는 서역에서 들어온 불교의 자극도 받으면서 중국의 [도교]를
창립한다.
태평도 오두미도의 연원이 묵가였던 것이다 장씨 지도자들이 도교를
통어하는 것도 우연만은 아니리라
묵가의 전적이 도교의 대장경이라 할 수 있는 [도장]에 보전되어 온 것도 연고가
있었던 것이다
혹자는 묵자를 중국 고대의 예수요 맑스라고 칭했다
묵가의 평화적 전투집단의 희생적 헌신의 일화들은 듣는 이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전무후무한 <사랑의 용병집단> 묵가의 최후 풍경은
위와 같은 변환과정을 이해해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현재 진행 중
곳곳에서 올라오는 세계3차대전 운운 하는 소리들
묵가적인 너무나 묵가적인 이들이 필요한 오늘날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