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이 가르치는 반펠라기우스주의적 구원관은, 바로 신약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경고한 ‘다른 복음’과 매우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율법주의자 또는 유대주의자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완전성과 충족성을 거부하고, ‘오직 믿음’의 효력을 거부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고 의지한다 해서 칭의와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음에 율법 준수를 더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한 율법 준수란 할례 받음, 안식일과 다른 절기 준수, 구약 정결 음식법 준수 등을 포함한다. 우리의 칭의와 구원은 오직 은혜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완성된다는, 순수한 복음, 순도 100%의 복음, 진짜 복음에서 이탈한 것이다. 이것은 다른 복음을 전하고, 다른 복음을 믿고,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이기에 영원히 저주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오늘날 이러한 로마 가톨릭적 율법주의가 한국 기독교회 내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예수 믿음에 율법 준수를 더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공공연히 가르치는 교회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들에서는 예수님을 믿고 회심한 후 주일성수, 십일조 헌금, 새벽기도, 주초 금지 등을 준수하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처럼 가르친다. 심지어 어떤 교회들에서는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주일성수, 십일조 헌금, 새벽기도, 주초 금지 등을 준수하지 않으면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라 경고한다. 이들의 의도가 어떻든, 이런 설교는 철저히 율법적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에 정면 배치된다. 이런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며, 다시금 믿는 자들을 율법과 정죄 의식의 굴레와 속박에 빠져들게 하는 심각한 오류이다. 상술한 관점이 좀 더 노골적인 율법주의라면, 좀 더 미묘한 차원에서 율법주의적 다른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교회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교회들은 칭의·구원과 선행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오해로 말미암아 이런 미묘한 율법주의적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들의 주장은 소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입술로는 신앙고백을 하더라도, 삶 속에 선행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표면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가지고 있는 미묘한 함정은, 여전히 믿음에 선행을 더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율법주의적 패러다임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믿음에 선행을 조건으로 더해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수식으로 표현하자면 ‘믿음+선행=구원’이다. 그들이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이유와 배경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으로 복음에 합당한 삶과 윤리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도 윤리적 실패의 모습을 보여준 사례가 최근 많이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의 계속되는 윤리적 실패를 바라보면서 좌절을 경험한 일부 지도자들은, 선행과 윤리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려는 유혹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 이들의 의도는 십분 이해하더라도, 그들의 가르침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우리들에게 전해준 오직 은혜와 믿음과 보혈의 복음과는 배치되는 다른 복음이다. 왜냐하면 선행은 결코 구원의 조건이 아니며, 구원의 조건으로 높여도 안 되기 때문이다. 선행은 참된 믿음의 결과와 열매이며 동시에 선행은 구원의 목적이요, 증거라는 것이 100% 순수한 복음이다. 이것을 수학적인 등식으로 표현하자면 ‘믿음=구원’이며, “구원이 뿌리라면 선행은 열매”, “구원이 원인이라면 선행은 결과”, “구원이 실재하다면 선행은 그 증거”, “구원을 받은 사람의 삶의 목적은 선행”이라는 방식으로 표현돼야 한다. 참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삶 속에는 선행이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선행은 구원의 조건으로 따라 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와 결과와 목적과 증거로서 따라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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