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내가 살던 골짜기는 일 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 곳이었다.
온통 눈 덮인 산봉우리와 짐승들뿐인 그곳에서 나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
아버지는 내게 활 쏘는 법과 사냥하는 법을 가르쳤다. 사냥으로 잡은 짐승은 평원에서 만난 유목민들의 물건과 바꾸었다.
그때까지 나는 사냥꾼들이 사는 골짜기와 유목민들의 평원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 나이 아홉 살 때 다른 세상의 사람이 찾아왔다.
그녀는 부친의 손을 잡고 골짜기로 들어섰다. 노리개 같은 당혜를 신고 눈밭을 아장아장 걷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오빠, 고마워."
그녀는 넘어진 자신을 일으켜 주던 내게 그 조막만한 입술로 그렇게 말했다. 오빠....오빠...
그녀를 다시 만난 건 삼 년 후 내 나이 열둘, 그녀의 나이 아홉 살 되던 해였다.
그녀는 이번에도 부친과 함께 골짜기로 들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부친의 손을 잡지도 않았고 아장아장 걷지도 않았다.
나는 하루 종일 그녀를 따라다녔지만 넘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부친과 함께 떠날 때 내게 손을 흔들어주며 말했다.
"오빠, 다음에 또 봐."
다음에 또 봐.....다음에 또 봐.....
나는 평생 그 말을 가슴에 안고 살았다.
그날 이후 그녀는 더 이상 골짜기를 찾아오지 않았다. 이따금씩 그녀의 아버지가 찾아오기는 했지만 언제나 혼자였다.
내가 사는 골짜기에서 그녀가 사는 또 다른 세상까지는 말을 타고도 두 달이 걸리는 먼 거리라는 걸 그때 알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녀와 내가 복중혼약한 사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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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이 되던 해 나는 그녀를 찾아갔다.
중요한 일로 상단을 따라 중원으로 가는 길에 엿새간 짬이 났던 것이다. 나는 단주에게 양해를 구하고 사흘 밤낮을 달려 그녀가 있는 항주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를 볼 수는 없었다. 하필이면 그때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태호로 달 구경을 갔을 줄이야. 사람들은 내일이면 돌아올 거라며 하루만 머물러 보라고 했지만 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날 그녀와 나는 하루의 거리만큼 가까워졌었으니까.
일 년 뒤 여행을 마치고 천산으로 돌와왔을 때는 서신이 와 있었다. 항주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보낸 것이었다.
그는 뒤늦게 내가 다녀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와 함께 서둘러 복건까지 달려갔다고 했다.
복건은 내가 참여했던 상단의 최종 목적지였다. 하지만 상단은 이미 떠난 후였고 두 사람은 우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녀와 나는 이번에도 하루의 거리를 두고 만나지 못했다.
그는 섭섭한 마음을 달래려 그녀가 신던 당혜 한 켤레를 보냈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은 그곳으로 보낸다는 말과 함께.
그녀가 달을 좋아한다는 걸 안 후로 나는 언제나 밤하늘을 보았다.
그녀와 나의 거리 팔천 리.
말을 타고 쉬지 않고 달려도 두 달이 걸리는 길.
대륙은 우리를 갈라놓았지만 우린 밤마다 밤하늘에서 만났다.
아아, 그녀는 어떻게 변했을까?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녀의 아버지가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슬퍼했고 내 아버지와 살아생전 했던 약속을 지키고 싶다고 했다.
그녀와 나를 짝지어주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그녀를 만나러 갈 수 없었다. 내가 얼마나 약한지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의 비정한 법칙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난 강해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당당한 모습으로 그녀의 앞에 나타나기로 했다.
내 나이 열아홉, 그녀의 나이 열여섯. 사냥을 나갔던 내 아버지가 우연히 마주친 악인들에게 죽임을 당하던 해의 일이었다. (펌 끝)
유전: 남자가 여자를 만나지 못하는 두 가지 테마
1. 능력(환경적 요인 포함)
2. 운명(사랑 보다 더 큰 테마가 생겼을 때. 남자는 사랑 보다 더 큰 테마가 있다고 판단함. 상구보리 즉 위로는 진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랑 보다 더 큰 가치를 발견하려고 함. 그것이 아이러니 하게 복수라도.)
능력이나 운명이나 어쩌면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또 이것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어서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것임. 여자도 남자의 능력을 보고 다가서는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여자는 (순수한 시절) 환경이나 운명을 뛰어넘는 초월적 사랑을 믿는 것이 남자 보다는 더 강하다고 봄. 여자에게 사랑(하화중생 즉 아래로는 중생을 위함)은 운명 그 자체임. 설령 그것이 "삶이 그대를 속인 것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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