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함께 했던 나의 생애들"에서 발췌
48번째 수준 아래로 내려가게 되면, 점차적으로 더 이기적이 됩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이것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어떻게 그것이 타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상관없이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가 있을까요? 이원성 의식이 지니고 있는 상대성을 이용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가 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 여러분은 하나의 개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즉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루시퍼는 지구에서 가능했던 가장 낮은 수준에 있었으며, 이 말은 그가 여기 지구에서 허용된 범위 내에서, 가장 이기적이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이원론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두 개의 옵션만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루시퍼는 훌륭한 대의명분을 갖고 있었으며, 그러한 명분이 충분히 정당화된다는 것을 조장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다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나, 그러한 행동이 타인들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주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로써, 루시퍼는 생명에 대해 최고로 무감각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무감각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자신이 했던 짓을 저지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의식에 있어, 밑바닥 근처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보다 더 최근에 있었던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생명에 대해 절대적으로 무감각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히틀러가 “최종적인 해결책(Final Solution)”으로 모든 유대인들을 말살하려고 했겠습니까? 만약 생명에 대해 조금이라도 민감했었다면, 어떻게 스탈린 동지(Comrade Stalin)가 2,100만 명의 사람들을 소련에서 죽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만약 자신의 명분이 타당하다는 절대적인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마오가 7,000만 명이나 되는 중국인들을 죽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생명에 대해, 정상적인 감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무도 이러한 짓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 따른 결과에 충격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있어야만, 이러한 잔혹한 행위를 저지를 수가 있으며, 이러한 전면적인 부정은 오로지 이원성 의식에서만 나올 수가 있습니다.
이원성 의식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이원성 속에는 오로지 두 개의 옵션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는 절대적으로 옳으며,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틀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타인들을 침묵하도록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을 해도 정당화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본질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타인들의 에너지를 훔치기 위해, 원하는 것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루시퍼와 사탄 그리고 다른 옥타브에 존재하는 악마들과 추락한 존재들은 사람들의 에너지를 훔치기 위해서는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루시퍼는 소아성애자(小兒性愛者: 어린아이에게 성적 욕구를 느끼는 사람)였으며, 몇 번의 육화에서,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그는 나를 반복적으로 성폭행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육화에서는, 루시퍼가 다른 아이들에게 이런 짓을 하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소아성애가 가져다주는 엄청난 심리적인 영향을 고려하면, 오늘날의 소아생애자들도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생명에 대해 전혀 무감각하기 때문입니다. 육화해 있는데 필요한 생명 에너지를 훔치기 위해, 이들은 아이들을 성폭행하는 것이 정당화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의식적으로 깨닫고 있지 못할 수도 있지만(비록 일부는 깨닫고 있다 하더라도), 이들이 이런 짓을 하게 되는, 이면에 숨어 있는 이유는 에너지를 훔쳐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옆길로 빠졌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가 추락한 존재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하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생명에 대한 무감각이 궁극적인 상태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행위들이 무감각해지면 질수록, 그러한 행위들(자신의 마음속에, 그리고 세상에)을 정당화하기 위해, 보다 더 절대적인 주장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가 전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요? 글쎄요, 그것은 문제를 어떤 의식수준에서 고려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가 가져다준 끔찍한 영향은 이 논리로 인해,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 많은 숫자의 옵션들을 단지 두 개의 옵션으로 제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의문들이 두 개의 상반되는 극성을 지닌 문제로 축소될 수 있거나, 축소되어야 하며, 그런 다음 그러한 문제들이 “예-와-아니오(yes-and-no)”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극성은 받아들이고, 다른 극성은 거부하게 됩니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우리가 보다 더 미묘한 뉘앙스를 볼 수 없게 되며, 이것이 근본적으로 우리의 문명이 이러한 지나치게 단순화한 해결책들에 저항하는(defy) 상황에 점점 더 직면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미묘한 차이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추락한 존재들의 진짜 속임수는 모든 문제들을 “옳은 것과 그른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이라는 단지 두 개의 가능한 옵션으로 축소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의되고 나면, 우리는 단지 참인 것, 혹은 선한 것을 받아들이게 되며, 그러면 지구에 낙원이 실현될 거라고 여기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만약 추락한 존재들이 선과 악을 정의할 수 있다면,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선이라고 정의하는 것을(아니면, 그들이 악이라고 정의하는 것의 반대되는 것을) 우리에게 하도록 만들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불행하게도, 추락한 존재들이 선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그들을 위한 선이거나, 아니면 신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추락한 존재들이 진리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진리에 대해 이들은 전혀 헌신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진리라는 개념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며, 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조종하는데, 진리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천년 이상, 가톨릭교회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정의하기 위해 이러한 형태의 논리를 이용했지만, 문제들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수백 년에 걸쳐, 과학적 유물론에 빠져 있던 교황들이 동일한 종류의 논리를 이용하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정의해 왔지만, 이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은 더 강력한 방법으로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직면해 있는 문제가 어떤 것이든, 그러한 문제들을 그리스도의 관점을 통해 서로 다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의식 수준을 끌어올림에 따라, 문제에 대한 단순하고, 이원론적인 정의를 뛰어넘어, 그 너머를 볼 수 있게 되는 상황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독일의 모든 문제들이 유대인들로 인해 야기되었다는 주장은 결코 사실일 수가 없으므로, 모든 유대인들을 말살한다고 해서, 독일의 모든 문제들이 자동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구하게 되고, 이를 통해 보다 더 큰 힘을 실어주는 접근 방식을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다양한 행동의 원인들을 탐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추락한 존재들은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흑백의 해결책으로 쉽게 축소시키려고 합니다(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무력을 사용하려고 함).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진리는 오직 하나만이 존재해야 하며, 그것을 알기만 하면, 모든 유사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법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관점은 모든 문제들에 오직 하나의 해결책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상황은 제각기 독특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예수는 유사한 상황들에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했던 것이 아니라, 실제의 상황 속에 있는 사람을 깨울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에 기초해서, (영의 힘을 통해) 행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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