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함께 했던 나의 생애들"에서 발췌
기본적으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렸던 순교 (殉敎)의 시대는 기독교 운동에 있어 막다른 길이었습니다. 그것은 48번째 의식 수준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결정적으로 잘못 해석한데 그 원인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 또다시 우리는 윤회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 운동의 모든 신비적인 지류들은 윤회(환생)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신비적인 지류들이 예수가 윤회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쳤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보존하고 있으며, 또한 신비적인 길을 가면서, 우리가 이전에도 삶을 살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의식 수준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재능을 지니고 태어나는 반면에, 또 다른 아이들은 끔찍한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는 것처럼, 삶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의문들을 이러한 윤회를 통해 명확하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초기 기독교 운동에서 윤회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는 역사적인 증거가 필요하다면, 많은 초기 신학자들 및 작가들이 그러한 주제에 대해 기록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리게네스(Origen), 성(聖) 오거스탄(St. Augustine),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 니사의 성(聖)그레고리우스(St. Gregory of Nyssa),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 Martyr), 성(聖) 제롬(St. Jerome) 등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윤회에 대해 동의했다는 말은 아니며, 정말 윤회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는 했었습니다.
기독교 운동의 비-신비적인(non-mystical) 지류들은 윤회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공개적으로 부정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추락한 존재들 혹은 48번째 의식 수준 아래에 있던 존재들이 주도했던 통합체 혹은 교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개의 경우, 48번째 의식 수준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윤회를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은 이번 생에서 저지른 행위들에 대해, 미래 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개념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또한, 구원을 받기 위해, 이들은 스스로 노력해야 하며, 여기에는 의식의 변화도 수반되어야 한다는 개념에 대해서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외적인 형태의 구원, 즉 올바른 종교의 신도가 되고, 그 종교에서 말하는 외적인 규칙 - “올바른(right)” 뭔가를 행할 때, 자신들이 더 뛰어나다고 느끼게 되므로, 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 - 을 따르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게 되거나, 혹은 보장된다는 개념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이 끌리게 됩니다. 특히, 이들은 올바른 교회의 신도가 됨으로써, 이번 생이 끝나고 나면, 구원이 보장된다는 개념을 특히 좋아하고 있습니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 윤회를 받아들이는 동양의 종교에 수십억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모든 사람들이 48번째 의식 수준 위에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추락한 존재들은 그러한 종교들을 왜곡시키기 위해, 윤회와 관련하여 현실과는 거리가 먼 운명론적인 견해를 개발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형태의 윤회는 48번째 수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카르마로 인해, 모든 것이 결정되므로,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현재에 모든 것들은 여러분의 과거 선택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에 여러분은 책임이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 여러분이 이전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았던 선택을 했어야 한다는 것을 편리하게 무시하는.
추락한 존재들의 영향을 받게 됨에 따라, 초기 (기독교) 모임에 참석했던 일부 사람들은 예수가 신(神)이 보낸 궁극적인 형태의 구세주라는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나 따를 수 있는 본보기가 아니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 즉 우리를 구원해 줄 사람이라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예수가 실제로 가르쳤던 그리스도 의식을 개발하는 것이 이제는 중요시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는 것이 올바른 교회의 신도가 되어, 외적인 규율을 따르는 문제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로 인해, 구원(救援)이 기본적으로 여기 지구에서 정의된 조건에 따라 삶을 끝까지 살아감으로써, 여러분이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상품이라는 전통이 시작되었으며, 많은 기독교 교회들이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전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추락한 존재들로 인해, 이러한 사람들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장되거나, 이 세상에서 정의된 조건들로 인해 방해받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것이 바로 사탄 의식입니다.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그들만의 변형된 의식을 개발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변형된 의식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스스로 신(神)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추락한 존재들이 단단히 갇혀 있는 의식입니다. 왜냐하면 추락한 존재들은 다른 모든 인간들보다 본질적으로 뛰어나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추락한 존재들이 이러한 상태 속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우월성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초기 많은 기독교 교회들과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유일한 참된 구세주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므로, 자신들은 타인들보다 뛰어나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예수가 “시저(Caesar)의 것은 시저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말했던 것을 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로마인들과 싸우지 말고, 로마인들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상승 마스터들에게 넘겨주고, 그리스도 의식을 개발하는데 집중하라”라는 말을 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인들 중에서 상당한 숫자가 이제 로마제국의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추락한 존재들)이 스스로를 정의했던 것처럼, 신(god)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 물론, 사람들은 이러한 법칙들을 예수가 정의했다고 생각했으며, 사실은 추락한 존재들의 선전술에 대한 또 다른 증거에 불과했음 -. 이러한 사람들은 이 때문에 로마의 권위에 보다 더 대결적인 접근 방식(confrontational approach)을 취하게 되었으며, 결국 이것은 로마 당국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게 되는 상황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과 예수가 순교자였다는 개념이 서로 결합됨으로써, 추락한 존재들은 이제 모든 책략을 다 갖추게 되었습니다. 추락한 존재들은 사람들에게 예수가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음이라는 숭고한 희생을 했기 때문에, 천국으로 상승하게 되었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이 말은 만약 사람들도 똑같이 하게 된다면, 그들 역시도 구원이 보장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구원을 받을 자격을 얻을 수 있는 느린 방법은 믿음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가장 빠른 방법은 그러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추락한 존재들이 만드는데 매우 능숙한 종류의 나선을 만들었습니다(때로는,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이 때문에, 대결은 더욱더 심화되었으며, 기독교인들이 제국의 법보다 영적인 법칙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행동하면 할수록, 로마 당국은 더 많은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당국이 기독교인들을 심하게 박해하면 할수록, 기독교인들은 순교의 중요성을 더욱더 확고하게 믿게 되었으며,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상태였습니다. 살생이 시작된 이상, 양쪽이 모두 뒤로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것(살생)을 멈추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추락한 존재들이 일으키는 갈등의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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