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굴루스가 V자를 그린 두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그리 말했다. 그러니 방금의 이야기는 우리 두 사람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라며.


 재단이 제공한 레굴루스의 방 안은 위대한 락스타의 취향대로 한껏 꾸며져 있었다. 칠이 벗겨진 LP판, 한 시대를 풍미한 선배 락커들의 휘황찬란한 포스터. 그리고 구식 라디오. 직접 다이얼을 돌려 전파를 찾아내는 것은 마치 망망대해 위에서 값진 보물을 탐색하는 일과 같다. 그야말로 쿨하고 멋진 해적의 삶 그 자체였다. 재단에서도 락의 열정은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그렇지? 미스터 애플.”


 레굴루스가 동의를 구하며 물었으나, 그녀의 선원은 재단에 있었던 소란 이후 오래간만에 열린 티파티에 심취하여 콧노래만을 흥얼거렸다. 미스터 애플이 채워준 찻잔을 기울인 버틴이 대신 대답했다.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전’ APPLe 호의 선장으로써 명하노니, 미스터 애플… 뭐라고 말 좀 해봐!”


 단호한 버틴의 말에 기겁한 레굴루스가 울상이 되어 도움을 요청했다.

 

 “흠, 저 APPLe이 캡틴께 조언드리기를. 단독 항해 정돈 할 줄 알아야 선장, 그리고 레이디로써의 덕목을 갖출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따라서, 저 APPLe은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시길!”


 “안돼! 미스터 애플! 떠나면 한 달… 아니, 두 달 동안이나 닥터 페퍼 배급을 중단하겠어!”


 레굴루스가 급히 손을 뻗었지만, 인간은 하늘에 뜬 태양과 허공을 나는 사과를 붙잡을 순 없는 법이었다. 결국, 레굴루스는 오늘따라 상태가 이상한 버틴과 단독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으흠, 레굴루스는 긴장되는 목을 풀었다. 떠난 미스터 애플이 차 대신 자신의 찻잔에 따라준 닥터 페퍼로 바짝 마른 목을 축였다. 땀이 찬 손바닥을 허벅지에 괜히 문질렀다. 진실에 다가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너랑 내가… 왜 동침을 해야 하는데?”


 “대외적인 이유와 내재적인 이유가 있어. 첫번째 것부터 말해줄게.”


 동침의 이유치곤 참 거창하군, 레굴루스가 꿍얼거렸고 버틴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재단에게 각별한 주의를 받았어. 내가 영입한 마도학자들을 내 쪽에서 엄격히 관리하여 통제할 것을. 특히, 재단에 충성하는 것까진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나를 거스르지는 않게끔 사교적인 유대감을 형성하라고 했어. 그래서… ”


 “이봐 친구. 우리가 그런 걱정을 할 사이인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휴우, 레굴루스가 섭섭한 탄식을 내뱉었다.


 “재단도 참 괴상한걸. 아무튼, 내 걱정은 말라구. 버틴, 난 네 편이야! 그러니 딱히 나와 그런 짓 하지 않아도….”

 

 “아직.”


 “...응?”


 “아직 내재적인 이유를 말하지 않았어. 레굴루스.”


 “뭐, 음… 말해봐.”


 “──난 네가 좋아.”


 “... 뭐어?”


 어찌나 눈이 휘둥그레 떠졌는지, 레굴루스가 동요를 감추기 위해 방 안에서도 쓰고 있던 선글라스 위로 그녀의 토파즈 색 눈동자가 튀어나왔다. 버틴이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했다.


 “그러니 적절한 기회라고 생각했어. 넌 내가 가장 먼저 첫 번째로 데리고 온 마도학자이고, 그에 따른 합당한 특혜가 필요해. 널 특별하게 여긴다는 이야기야.”


 “잠깐, 잠깐. 잠깐! 그러니까 네 말은, 나를….”


 어안이 벙벙한 레굴루스가 마른침을 삼켜냈다.


 “... 우린 친구잖아!”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데도.”


 일어선 버틴이 모자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녀가 다가오자, 레굴루스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뒤로 끌린 의자 다리에 레굴루스의 발이 걸렸고, 개지 않은 너저분한 침대 위로 나자빠졌다. 아야야… 넘어진 레굴루스가 우는 소리를 흘렸지만 버틴은 개의치 않았다. 


 “버틴, 기다려…!”


 몸을 겹친 버틴이 그녀의 선글라스를 올렸고, 입술을 겹쳤다.


 그녀에게선 싱그럽고 달짝지근한 향기가 났다. 블랙커런트, 카르다몸과 금귤. 느즈막한 햇살의 온기. 아기같이 앳된 뺨이 부드러웠고, 가까이 몸을 겹치자 작은 체구가 깜찍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혀 또한 마찬가지였다. 


 … 하아.


 깊이 빠져들자, 머릿속 오솔길의 짐승이 갑작스레 목소리를 냈다.


 ‘오, 결국 저지르셨군. 그래. 핥고, 그르렁거려. 대외적인 이유를 변명 삼아서 계속 나아가. 난봉꾼 타임키퍼가 맛보고 엄격히 평가한 100명의 화끈한 미녀들 리스트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조용, 버틴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무시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어쩌면 자신의 것이었다.


 입술을 떼고 겹쳐있던 몸을 떨어트리자, 꾹 눈을 감고 있던 레굴루스가 눈을 떴다. 토파즈 색 눈동자가 그렁그렁했고, 동시에 훌쩍거리는 소리를 냈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곧장 우스갯소리를 해댔다.


 “너, 음… 가슴이 있었구나? 하하….”


 “... 만져봐. 네가 원한다면.”


 레굴루스의 손목이 붙잡혀 버틴의 가슴 쪽으로 이끌리자, 레굴루스의 얼굴 색이 템스강의 수면 위로 잘게 부서진 햇살 색이 되었다.


 “... 알겠어, 알겠다구.”


 그 감촉을 느끼자, 레굴루스는 자신이 그토록 주장하던 그녀와의 친구 사이가 끝났다는 예감을 느끼고 체념했다. 비장의 수였던 우스갯소리도 먹히지 않을 정도로 버틴은 강경했다. 허나 마냥 딱딱하지만은 않은, 긴장감으로 상기된 버틴의 오밀조밀한 표정을 레굴루스 또한 보았다. 그 표정이 위대한 해적님을 그저 한 명의 소녀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버틴이 조심스레 레굴루스의 머플러를 잡아당겨 풀었다. 수줍게 우물거리는 레굴루스의 입술이 말하기를.


 “... 준비가 필요해.”



-




 “으, 흠. 흠.”


 나비넥타이의 신사가 흥얼거렸다. 좋은 시간을 보냈을 두 사람에게 챙겨줄 먹을 것을 들고, 그녀의 방문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 물론 충분한 시간 간격을 두고.


 “... 음?”


 레굴루스의 방문 앞에 누군가가 있었다. 


 “... 소네트 양?”


그녀는 기린처럼 목을 쭉 빼 들고 문에다가 귀를 밀착시키고 있었으나, 사생활 보호를 위해 레굴루스가 틀어둔 레코드판.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템포의 재즈곡 때문에 소네트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답답함을 못 이긴 소네트가 손톱으로 굳게 잠긴 방문을 긁어댔다.


 “타임키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