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쪽 아가씨는 식사를 하지 않을 참인가?" 


중년의 신사는 15인치 LCD 패널을 씹으며 말을 건넸다. 게걸스럽게 턱을 움직이는 그의 입술 사이로 액정 조각이 튀었다. 파티장의 1층은, 이를 테면 서민들을 위한 패스트푸드들로 가득찬 자리였다. 트랙볼을 손질한 볼마우스, 튀긴 헤어드라이기, 껍질을 벗긴 냉장고 숙성회. 소녀가 서 있는 옆테이블에서는 숫기가 없어보이는 젊은 남자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VHS 비디오 테이프의 플라스틱 덮개를 제거한 채 그 안으로 포크를 넣어 휘적거리는 것을 보니 남자의 메뉴는 스파게티인 듯 했다. 


배가 고프지 않아서요, 소녀는 나지막히 대꾸했다. 소녀의 옆으로 빈 트레이를 든 웨이터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트레이 위로 먹다 뱉었는지 이리저리 구부러진 저항 부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소녀는 2층으로 발길을 돌렸다. 


계단을 올라서자 사뭇 분위기가 달라졌다. 2층은... 그래, 좀 더 고귀한 분들을 위한 자리일 터였다. 아마 메뉴도 지난 세기의 진귀한 산해진미일 테지. 이를 테면 골드 바 와인이라던가, 삶은 은화, 라구 소스에 졸인 채권 뭉치... 


상념의 잠겨있던 소녀의 주의를 환기시킨 건 치지직 거리는 진공관의 소음이었다. 시간대에 어울리지 않는 닉시관들은 황색 불빛을 점멸하며 시간을 거꾸로 세고 있었다.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소녀에게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약속장소는 파티장 2층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이었다. 안쪽으로 이동하면서 소녀는 한 숙녀와 눈이 마주쳤다. 발코니에 기대 있던 숙녀는 익히지 않은 생 닭다리를 귀에 대고 열심히 통화하고 있었다. 연미복을 한껏 멋들여지게 차려입은 신사가 음료를 건네준 웨이터에게 팁으로 쿠키 조각을 지불하는 것도 보았다. 소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폭풍우는, 인간의 욕망을 먹고 자란다. 그렇게 자란 폭풍우의 씨앗은 이내 발아하여 인간의 관념을 비튼다. 

1층의 보잘 것 없는 서민들은 가전제품과 전자기기들을 먹고 있었다. 그들은 이내 닥쳐올 1999년 12월 31일, 11시 59분에 펼쳐질 폭풍우의 영향을 받았다.

좀 더 상류층 사람들은 황금을 마시고 석유를 먹었다. 그들은 좀 더 예전의, 그러니까 1929년의 폭풍우 이후에 생긴 식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 


그럼 좀 더 높은 계급의 사람들, 

이름을 부르는 것도 황송한 나머지 경이나 공을 이름 뒤에 붙여야 하는 고귀한 나리들은 무엇을 드시고 계실까? 


소녀는 이내 2층의 가장 안쪽, 대연회장의 문 앞에 다다랐다. 어느덧 폭풍우가 오기까지는 채 5분도 남지 않았다. 상념을 접은 채, 이제 곧 해야 할 일을 할 시간이었다. 소녀는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문의 손잡이를 잡고 당겼다. 양옆으로 난 육중한 문이 천천히 앞으로 열리고 문과 문 사이로 작은 틈이 만들어질 찰나였다. 


피 냄새. 문득 소녀는 혈향을 느꼈다고 생각했다. 투명한 물컵에 잉크를 떨어트리듯, 상념은 빠르게 번져나갔다. 

소녀는 1966년 8월의 어느 무더운 여름 날을 떠올렸다. 광장에 모여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무리들, 그 무리들 가운데 발가벗겨지고 매질당한 채 망가져있는 사람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백했고, 무리들은 그 죄목에 따라 사람들을 단죄했다. 


소녀는 이내 대연회장의 문을 닫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 차라리 폭풍우에 휘말려 사라졌으면. 손목에 찬 진공관의 지지직거리는 소음이 너무 시끄러웠다. 소녀는 어지러움으로 쓰러지고 싶다는 생각과 이대로 뒷걸음쳐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을 동시에 느끼며, 대연회장의 문을 마저 열어제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