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와 꿈은 많은 교집합을 가지고 있어 분간이 어려웠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기에 그 명확한 차이를 더욱이 구분할 수 없었고,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는 곧 달콤한 꿈이 되어 내 곁을 맴돌았다.


언제나 시작은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시작됐다.


입술에서 부터 깨어나기 시작한 감각은 여러가지 정보를 전달해줬다.


빗소리, 흙냄새


붉은 깃털, 오렌지 향기


우산 아래의 잔향은 손을 뻗으면 실체를 움켜쥘 수 있을 것 처럼 생생한 착각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날 잊지 말아줘.”


#


“...콘스탄틴?”


“우린 무도회에 다녀올테니 돌아오기 전 까지 집안일을 모두 끝내놓으렴 버틴.”


단박에 이것이 현실이 아님을 직시할 수 있었다. 혹은 지독한 폭풍우의 한 가운데이거나.

파티 드레스를 차려입은 콘스탄틴과 레이디 Z, 메스머 주니어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아찔한 현기증이 돌아 그것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 무척이나 고됐다.


고개를 숙였다. 나무로 되어 갈라진 낡은 마룻바닥이 보였다. 그것을 짚은 제 손은 거뭇하게 더럽혀져 있었고, 입고 있던 누더기도 마찬가지였다. 


“음…”


‘이 장면은 무의미해. 네가 그녀에게 “네 어머니.”라며 계모의 농간에 얌전히 놀아날 게 아니라면 말이지. 그것도 아니라면 비극의 여주인공이 된 기분을 좀 더 만끽하길 네가 바라고 있다던가.’


머릿속에 울려퍼진 걸걸하고 신랄한 목소리가 눈앞을 흐리게 했다. 그래, 꿈인 것을 자각하였으니 이 장면의 역할은 다 했다고 볼 수 있겠다. 나는 오솔길의 작은 크리처, 내 머리 속의 지독한 훈수꾼, 혹은 머나먼 우주적 존재에게 물었다.


“요정 대모는 누구야?”


#


“멋진 밤이네요 나리, 무도회에 가고 싶으시다면 커다란 호박을 준비 해주시겠어요?”


“너였구나.”


후드가 달린 푸른 망토와 붉은 깃털은 정말이지 우스꽝스런 조합이었다. 소탈하게 흐른 웃음탓에 모자가 흘러내렸다. 아니 지금은 모자를 쓰고 있지 않다. 가여운 신데렐라일 뿐이다.


“저를 기억해 주셨군요?”


“널 어떻게 잊겠어.”


그 한 마디가 요정 대모의 심금을 울렸다. 누더기는 멋진 드레스가 되었고 손에는 유리 구두가 한 켤레 얹어졌다. 쉬운 여인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러했다. 순수했고 외로움을 탔으며 순종적이었다.


“글쎄요, 나리의 곁엔 수많은 멋진 분들이 계시잖아요. 만찬을 함께 했던 그 분들 말이에요.”


“첫 키스의 상대는 잊지 못하는 법이라고 해.”


호박 마차는 대령되지 않았다. 대신 커다란 호박에 걸터앉은 요정 대모 또한 부끄럼은 타지 않았다. 애처롭지 않은 웃음을 짓고 애처로운 눈으로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이 닿지 않을 거리가 두 사람의 사이에 존재했음을 가늠하듯 닿지 않을 손을 뻗어 오기도 했다.


“기뻐요. 질투가 나네요. 이렇게나 멋진 나리, 당신을 맞이할 왕자는 과연 누구일지…”


“글쎄 그건 나도 정말 예상이 안 되는걸.”


후후, 몽롱하고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울렸다.


“좋아요. 마스터, 당신을 도와드릴게요. 마차가 완성되면 당신은 떠나가고 말겠지만… 그게 당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몇번이고.”


“음… 어쩌면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커다란 호박이었다. 올라탈 마차가 되기에 충분했다. 요정 대모의 발이 살랑거렸다. 어째서 맨발이었을까, 무척이나 작은 발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어여쁜 발이기도 했다. 우연히 내게는 ‘어여쁘다'라는 특징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나는 그 퍼즐을 끼워 맞춰 보기로 했다.


“나리? 이건…”


유리구두가 요정 대모의 발에 꼭 들어맞았다. 이야기는 건너 뛰어졌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끝에 대해 알고 있다. 유리 구두가 발에 맞는 이가 왕자를 맞이하여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는 그것 말이다.


“이야기의 공주는 네가 되어주었으면 해.”


가련한 가정을 딛고 왕자를 만나 행복해지는 것이 어울리는 이는 내가 아니였다. 그리고 그녀 또한 왕자, 아니 나리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는가.


나의 옷은 더이상 드레스가 아니었다. 하이얀 턱시도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유리 구두가 주인을 찾았다. 마차가 되지 못한 호박은 공주님을 보듬어줄 커다란 요람이 되어주고 말았다.


“아… 마스터, 이건… 정말…”


나는 몇번이고 되풀이 되는 기억속에서 느꼈던 입맞춤을 되갚아 줄 수 있었다. 내가 잊었을 뿐 몇번이고 되갚아 주었던 걸지도 모른다. 되풀이 되는 시간속의 주체가 변함없이 나라면 모든 때에 그리 행동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네가 좋아, 슈나이더.”


그녀는 입맞춤을 당하는 입장에선 한없이 연약했다.


“안 돼요 마스터… 제게 사랑을 속삭여도 마스터의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생길 뿐이에요.”


그 여리고 미약한 손길이 내 가슴을 덮었다. 따스했고 부드러웠다. 밀어내고자 하는 망설임이 느껴졌다.


“그치만…”


“그저, 자정이 되기 전 까지 마스터를 좀 더 느끼고 싶어요.”


가슴을 짚은 손길이 몸을 타고 오른다. 목에 감긴 두 팔이 한 사람 분의 무게를 느끼게 했다. 자연스레 이끌린 몸이 겹쳐졌고 이번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맞췄다.


“느껴져요… 마스터가 저를 원하고 있다는 걸, 좀 더 느끼게 해주세요.”


느껴졌다. 이 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것은 누구 한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을, 숨이 달아올랐고 그것보다 더욱이 애환이 끓어 올랐다.


“어째서 그런 슬픈 눈을 짓고 계신가요? 저는 이렇게나 기쁜데.”


그녀에게서는 향수와 같이 오렌지의 냄새가 났다. 이제는 나에게서도 그러했다. 우리는 오렌지의 과육을 나누어 먹었다. 하나같이 달콤했고 부드러웠다. 아무래도 껍질을 벗기고 과육을 탐하는 능력에서는 경험의 차이가 느껴졌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허나 요정 대모 그녀는 그것을 즐기는 듯 나를 놀리려 들었을 때엔 조금 셈이 나기도 했다.


“후후, 이래선 누가 공주님인지 모르겠네요.”


“...슈나이더.”


“아아, 화나셨다. 그런 무서운 표정 짓지 말아요.”


즐거워 보이는구나, 그리 생각했다.


#


그것 만으로 우리의 이야기가 샤를 페로의 동화와 같은 끝을 맞이했다는 의미는 아니였다. 이야기에는 언제나 끝이 있었고 우리는 그저 따사로운 과정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서로의 나신을 눈담는 것이 익숙해졌을 쯤 열 두 번의 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마스터, 고개를 조금만 숙여 주시겠어요?”


나는 이유를 묻지 않을 정도로는 순종적이 되어 있었다. 수그러진 고개를 품었던 슈나이더의 오른편 가슴에서 심장의 고동이 들려왔다.


“들리시나요? 마스터가 기억해주신 제 오른쪽 심장소리.”


“응, 무척이나 선명해.”


그녀는 웃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며 겸허히 자정을 받아들였다.


“너를 잊지 않을게. 슈나이더.”


편안한 기분이었다. 유리 발판을 밟고 서 정처없이 어둠속을 걷던 도중 발판이 무너져 떨어져내리는 듯한 끔찍한 감각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꿈을 벗어나는 감각은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만 같았다.


그렇게 우리의 동화는 막을 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