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키퍼 버틴의 가방속에 발을 처음 들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선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성탄절날 굴뚝으로 어린 아이의 집에 몰래 침입하는 흰 수염의 노인처럼 팔 다리를 조심스럽게 놀리며 여행가방의 사각형 입구를 지나, 원래라면 2차원적 개념인 바닥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이어져 있는, 빛 한줌조차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3차원의 통로를 지나고 나면 그 속에서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나타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첫번째 이유이다.
두번째 이유는 가방 내의 가구들 때문이다. 그 가방 속에서는 여러가지 잡동사니들이 방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데, 서로 다른 상점에서 마구잡이로 주문 한 것 처럼 하나같이 통일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주문자의 탁월한 배치로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거대한 석상, 시대에 따라 첨단이라고 볼 수도, 고물이라고도 볼 수 있는 전자기계, 먼지가 약간 쌓인 피아노, 용도를 알 수 없는 빈 액자, 거치대에 올려져 있는 캠퍼스, 세월에 빛바랜 누런 종이의 너덜너덜한 책과 아직 잉크가 체 마르지도 않아보이는 새 책이 모두 꽂혀있는 책장, 여러 사진들로 가득 차있는 벽면 등 여러 시대의 잔재들이 어지러이 배치돼 흡사 박물관 창고같은 느낌이 들어 묘한 탐구심을 자극한다. 다양한 시간대의 흔적이 방 안에 뒤섞여 시간 자체가 어떻게 흘러야 할지 혼란스러워 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창문 밖 호수에서 산들바람을 맞는 것 처럼 잔잔하게 파도치지만 그 속에는 멈출 수 없는 부드러운 힘이 내재돼있는 물이 원인일까. 가방의 내부 공간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이 조용하고 고요할 터였다 - 그런데 숨을 멈추고 감각을 곤두세우니 어디에선가 허락받지 않은 인기척이,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 근원지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리며 기웃대는 당신은, 창문을 거쳐오는 흐릿한 빛을 받으며 입을 맞추고 있는 두 소녀를 발견한다.
키와 체구가 작은 흑발의 소녀가 정열적으로 입맞춤을 이어나갔다. 주홍머리의 소녀는 이따끔 저항의 뜻을 보이는 듯 고개를 돌리려고 시도하거나 몸을 비틀었고, 그 틈새에 잠시 입술이 떨어지는 찰나에 산소를 보충하기 위해 헐떡거리는 듯한 작은 탄성이 튀어나왔으나 그 소극적인 움직임들은 추격자에게 끈질기게 따라잡히며 금세 침묵되었다.
“지금 여기서 이러면 안돼. 타임키퍼가 지시한대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 파티 준비를...”
듣는둥 마는둥 슈나이더는 손가락 사이로 주홍빛 머리카락의 폭포를 쓸어넘기며, 단추가 풀리며 살결이 살짝 들어난 목에 애틋한 쪽 소리를 내며 수차례 부드럽게 키스를 하자, 불만의 목소리는 점점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으로 바뀌었고 곧 달뜬 숨소리로 대체되었다.
소네트는 임무를 나갈 때 마다 항상 입는 단정한 제복 차림이었다. 두꺼운 천이 피부에 밀착되어 있는 그 의복이 거슬렸는지, 슈나이더는 옷 밑부분의 앞섬을 풀어해쳤다 - 이 과정은 급하거나 거칠게 헤치지 않고 옷이 손상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진행돼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현 상황에서 자신의 여유를 과시하는듯 했다 - 가장 밑부분부터 버튼을 톡 소리가 나게 하나씩 차례대로 튿어내고, 옷을 양옆으로 살살 비틀며 잡아당기자 장력에 의해 서로 교차돼있던 두개의 가죽 끈 끝부분들이 고리들을 통과해 스르륵 빠져나와, 멀끔했던 옷은 끈이 풀려 벌어진 구두 꼴이 되어 이리저리 흐트러지며 그 밑에 감춰져 있던 뽀얀 속살을 드러냈다.
방해물을 치워낸 슈나이더가 소네트의 허리를 손등으로 살짝 스치자 놀란듯 숨을 헉 하고 들이마쉬는 소리가 났다 - 이러한 반응을 즐기며 배 부근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딱히 의도해서 관리 한 적은 없었으나 재단에서의 모든 교육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한 우등생 답게 그녀의 살결은 부드럽고 매끄러웠으며, 피부 밑에는 복근이 적당한 피하지방층에 덮혀있었다. 낯선 손길이 닿을 때 마다 움찔거리며 근육이 수축하는 것이 눈으로 보였고 또 손 끝으로 느껴졌다. 그곳에서 잠시 미적대던 다섯개의 손가락들은 이윽고 미끌어지듯 몸의 능선을 거슬러 올라가며 겨드랑이 바로 밑까지 침투하고 소네트가 가쁘게 숨을 들어마쉴 때 마다 드러나는 갈비뼈가 만드는 굴곡들을 간지럽히듯 쓰다듬으며 그 모든 과정을 기록했다.
흉부를 향하는 낯선 자극에 순간 소름이 돋은 소네트는 깜짝 놀라 슈나이더의 팔을 붙잡았지만 슈나이더는 자신을 어설프게 저어하려는 의지를 털어내듯 가볍게 뿌리치고 한쪽 손으로 수줍게 솟아난 봉우리를 살짝 움켜쥐었다. 아- 하는 탄식과 함께 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반대쪽 손은 복부쪽에서 놀다 슬금슬금 아래쪽으로 기어들어갔다. 아직 벗겨지지 않은 정장 바지의 지퍼만 살짝 내려보고 누구도 침범한적 없는 공간에 손을 내딛었다. 직접적으로 큰 자극되지 않도록 아주 조심히 속옷을 타고 내려가, 달랑 천 한장을 사이에 두고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장 은밀한 곳과 마주댔다. 면 섬유의 약간 까끌까끌함과 만족스러운 축축함이 지문을 통해 느껴졌다.
이 시점에서 슈나이더는 한발자국 물러서기를 선택한다. — 굳이 멈출 이유는 없었으나, 어째서인지 소네트의 눈치를 보고 허락을 받고 싶었다. 말로 표현할 필요도 없이, 그저 잇따른 자극 때문에 한껏 풀어진 소네트의 눈을 지긋이 올려다보며 다음단계로 넘어가도 되는지 눈빛으로 조용히 물었다.
얼굴을 잔뜩 상기시키고 숨을 쌕쌕대며, 그만 멈춰야 한다고 머리속에서 희미하게 울리는 이성적인 목소리와 몸의 본능 사이에서 말 없이 갈등하며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귀엽다고 생각했다.
흔히 정치에서 기권표는 사실상 찬성측을 지지하는 사람의 소극적인 동의표시라고들 한다. 섹스도 마찬가지다. 슈나이더는 조심스럽게 상대의 상의와 바지, 그리고 속옷까지 모두 벗긴 후 자연스럽게 쇼파로 살짝 밀쳐 눕혔다. 역시나 소네트는 별다른 추가적인 저항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소네트의 건강한 피부와 대비되는 자신의 창백한 뺨을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 가져다대고 귀에 속삭였다.
“그간 마냥 고지식한 아줌마인 줄 알았는데… ”
“이렇게 음흉한 면이 있을줄이야~”
창밖에서 잘려나오는 희미한 빛에 나체를 드러내며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 소네트를 보며 자신이 여유를 잃어가며 행동이 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당장 원했다. 예쁜 곡선을 그리며 솟아있는 가슴 부근을 쓰다듬다가 정상의 돌출부를 살짝 꼬집자 몸이 반응하며 비틀렸다. 그 정직한 반응에 자신의 몸 역시 가볍게 전율하는 것을 숨기며 슈나이더는 목부터 쇄골까지 쪽 소리를 내며 빨아 자신의 흔적을 남겨갔다.
—
사근사근 내리던 보슬비는 해가 가라앉을수록 자신감을 점점 키워나갔다. 이윽고 구름에 가려져 미약한 빛을 내뿜는 태양의 마지막 시선이 지평선 밑으로 자취를 감추자, 거친 비바람이 여행가방 겉을 세차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버틴의 여행가방 속은 글자 그대로 꽉 들어찼다. 전투를 하며 곤두세웠던 신경을 가라앉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1929년의 마지막 파티를 즐기기 위해 사람들이 식탁으로 모여들었다. 첫 몇분간은 주린 배를 체우고 입에 기름칠을 하느라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와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 멀리 떨어져있는 음식을 받아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자와 바닥이 마찰되는 소음 외에는 침묵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정도 배를 따뜻하게 불린 사람들이 서로 안부를 묻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 소더비 씨의 물약은 매우 훌륭했다. 약간의 오차가 있긴 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유머스러운 상황이 여럿 연출되어 파티 분위기를 더욱 끌어올려줬다. 사람들은 지위, 경제력,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왁자지껄하게 뒤섞였다.
하지만 소네트는 지난 24시간동안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였음에도 차마 마음 편히 음식을 삼킬 수가 없었다. 가방 밖의 난민들, 그리고 가방 안의 인원 대다수는 불과 몇십분만에 그 자리에 없었던듯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모두가 겉으로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지만 그중 몇몇의 짙어진 눈가에서 공포와 불안을 느낄 수 있었고 — 그 그림자는 소네트의 마음까지 길게 드리웠다. 결국 눈 앞의 진수성찬을 두고 따뜻한 홍차를 홀짝거릴 뿐 이었다.
게다가 소네트의 왼쪽에는 타임키퍼가 앉아있었다. 물 한 모금 조차 입에 대지 않은 그녀를 보고 아마 마음속으로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거라 짐작했다. 버틴의 탓은 아니었지만 그런 그녀의 존재는 현재의 소네트에게 상당한 압박이었다 - 그래서 위로의 말을 하고싶어도 입술이 옴싹달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바싹 말라가는 목구멍을 적시려는 듯 남은 홍차를 모두 들이킨 소네트의 시선은 버틴이 앉아있는 왼편을 피해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흘러가, 나란히 앉아 화기애애하게 저녁식사를 즐기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과 핏빛 눈동자를 똑 닮은 자매에서 정지했다. 그중 키가 더 작고, 더 가까운 쪽이 소네트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작고 예쁘장한 얼굴의 흑발 소녀는 곧바로 소네트를 직시하지 않고, 타임키퍼의 얼굴을 잠깐 골똘히 응시하다 소네트와 눈이 마주쳐서야 그녀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순간 목이 매어오며 가슴속에서 지난 하루동안 쌓인 울분이 끓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소네트는 슈나이더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할말이 있는데 잠깐 괜찮을까?”
—
가방 밖의 날씨는 쌀쌀했다. 차가운 빗방울이 거센 풍향에 길을 잃은 체 이리저리 사선으로 소용돌이치며 소네트의 얼굴에 불시착했다. 두 소녀는 비를 피하기 위해 난민들을 위해 설치되어 있던 천막들중 가장 구석지고 조용한 곳으로 들어갔다.
슈나이더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소네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줌마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으려나~ …혹시 저번에 그일 때문이야?”
“앞으로 너의 처사에 대해서 생각해봤어.”
하지만 소네트는 딱딱하고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안그래도 언젠가 그 일에 대해서도 따지려던 참이었지만, 그보다는 지금 슈나이더의 태도에 화가 났다. 버틴이 지금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면서, 옆에서 꼬리치면서 분위기도 못읽고 마스터, 마스터… 충동적으로 그녀의 서글서글하게 웃음을 지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쉰 소네트는 악의가 담긴 문장을 익숙치 않게, 하지만 한글자 한글자를 또박또박 뱉어내었다.
“재건과 전투에서 우릴 도와준건 고맙지만 재단의 소속이 되고 나서부터는 좀 더 상식적으로 행동했으면 좋겠어. 우리는 너를 돕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너는 도움이 안되네. 더이상 타임키퍼를 방해하지 마.”
그 말을 듣는 슈나이더의 얼굴이 일순간에 굳어졌다.
사실 객관적으로 그렇게 틀린말을 한것도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고 순간 약간 통쾌한 기분도 든 소네트였지만, 직감적으로 자신이 해서는 안될 말을 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 소네트는 타인의 감정을 상처입히고 그 상대를 초연하게 무시하는 것에 익숙치 않았다. 당황한 소네트는 순간 여유를 잃고 당혹과 분노가 서린 슈나이더의 표정을 보며 뒷걸음쳤다.
“아줌마, 나는 재단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그 딱딱하고 틀에 박힌 규칙을 따를 필요도 없고. 만약 재단이 처음부터 나에게 존중의 뜻을 보였다면 나와 내 가족은… 하지만 이제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
점점 더 회색으로 탁해지는 하늘에서 슬쩍 자리를 비운 구름의 틈세를 뚫고 은은하게 내려오는 달빛이 내리비춘 슈나이더는 화난 것 같아 보이기도, 또 슬퍼보이기도했지만 무엇보다도 부숴질 것 같이 창백했다.
“짧은 이야기 하나 해줄까? 사실 그리 오래된 이야기도 아닌데~”
대답이나 동의를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슈나이더는 곱슬거리는 머리칼에 송글송글 얹어져있는 빗방울 구슬들을 몇번 털어내더니 말을 이어갔다.
“‘폭풍우’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부터 나는 이 재앙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대책을 강구했어. 처음에는 역시 재건의 손에 가입을 하려 했었지. 애초에 폭풍우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그 자신들이 유일한 구원자들인 것 마냥 거들먹대는게 그놈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재건의 손은 극단적인 친 마도학자 성향의 집단… 순혈 마도학자는 자시고 빌어먹을 반쪽짜리 혈통도 없는 평범한 인간들인 내 가족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들 수 있을리가 없었지. 혼자서 나름 여러모로 조사를 해왔지만 성과는 없었고 그러다 모든걸 잃었다고 생각했던 도중 성 파블로프 재단이 머리속에 떠올랐어. 그래, 마도학과 관련된 일이라면 전세계적에서 가장 저명한 존귀하신 분들이 해결책을 찾지 못했을리가. 나는 재단의 시카고 지부에 도움을 요청했어.”
“…”
“하지만 돌아온건 노골적인 경멸과 메몰찬 거절… 나는 다시 끝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던져졌지. 결국 어쩔 수 없이 재건의 손을 속여서 일을 무마하고자 했어. 나와 내 가족들을 폭풍우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약속을 받는 대가로 재건의 간부 일원이자 주점 ‘월든’의 점장인 포겟미낫의 수하로서 그가 의뢰하는 더러운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기로 했어… 그 전말은 너도 아다시피...”
슈나이더는 소지와 약지를 접은 손을 들어 중지와 자신의 관자돌이에 대고, 총을 쏘는 시늉을 하였다.
“이제와서 가소로운 거짓말로 내 가족들을 돌려보낸 놈들의 구둣짝이나 핥으라고? 하지만 살아남을수만 있다면 이런 만들다만 천막 아래라도 숨어 들어가야겠지, 안그래~?”
“나, 나는…”
최후의 변론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머리속에서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죄책감의 불씨가 산불을 이루어 가슴속 구석구석에서 춤추며 타올랐다. 슈나이더는 폭풍우의 예정된 피해자로서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도움을 받아야 할 입장이었으나 자신과 타임키퍼 곁에서 재건의 손에 대항해 같이 싸워주었다. 게다가 소네트는 슈나이더의 과거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조금도 없었으나 감정에 휩쓸려 그녀의 행동에 대해 멋대로 경솔하게 결론지어버렸다. 좀 전 슈나이더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재단의 실수로 인해 그녀의 가족들은 곧 다가오는 폭풍우에…
소네트는 결국 소용돌이 치는 마음과 상대의 기세 앞에서 위축되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미안해…”
“됐어. 교훈은 네 ‘아름다운 세상’의 감춰져 있던 추악한 일면을 배운걸로 충분하니까. 그리고 어차피 나중에는 너에게 전해질 이야기기도 했고.”
슈나이더는 울먹이는 소네트를 향해 몇 발자국 다가갔다.
비바람은 어느때보다 거셌지만 그들의 주위에만 적막이 깔리는듯 귀가 먹먹해졌다.
창백한 곁가지가 오른쪽 어께에서 뻗어나와, 소네트의 뺨 옆에 곱게 땋아 내려온 주홍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넌 너무 착해서 탈이야. 불쌍한 아줌마… 앞으로 고생길이 훤히 보이네~”
그렇게 말하고 턱을 살짝 당겨와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코로 숨을 들이마쉬자 진한 오렌지꽃 내음이 비강을 타고 머리속을 가득 체우며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것은 어느때보다 훨씬 달콤하고 부드럽고 어두웠다.
슈나이더는 소네트보다 십몇분정도 뒤에 자리에 착석했다.
둘은 아무 일이 없었던 것 같이 식사를 마저 하며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파티의 시끌벅적함에 조금씩 적응되어갈 때, 예정돼있던 폭풍우가 찾아왔다.
주변의 비마도학자들이 하나 둘 씩 빗방울과 함께 넓은 잿빛 하늘의 품으로 돌아갈 때
사모하는 마스터의 품에 안긴 슈나이더는 사실 자신은 마도학자가 아니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망연자실한 버틴의 품 안에 붉은 깃털과 검은 정장, 그리고 약간의 시트러스 향 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게 그 둘의 만남은 시작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
1929년을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지 며칠이 지났다.
한 시대의 마지막 생존자가 된 여행가방속 마도학자 동료들은 기관 직원들과 개별 ‘면담’과 위험도 측정을 위해 재단 내의 개인 독방을 지정받았다.
타임키퍼는 심리학적 병세로 인해 II형 등급의 트라우마 판정을 받고 재단의 방침에 따라 인공수면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정신상태는 4년전과 마찬가지로 강제적인 치료를 위해 제압하거나 감금할 정도로 병약한 상태는 아니었다. 메스머의 말에 따르면 이 모든건 타임키퍼의 건강과는 무관하고, 오직 그녀를 통제하기 위한 명분이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 소네트의 가슴 속 어딘가가 응어리가 생긴 듯 쭉 불편해왔다.
직속 상관이 부재중인지라 소네트에게 내려오는 지시사항 역시 크게 줄어들었다. 재단 내에서 정식적으로 일하게 된 이후에 이렇게 한가한 주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유년기 시절부터 받아온 교육지침에서 강조한 근면함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속에 자리잡은 여러 복잡한 감정들 때문인지, 그녀는 모처럼 찾아온 휴가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편히 쉴 수 없었다. 한동안 안절부절 오지랖을 펼쳐가며 다른 여러 부서들의 사소한 허드렛일을 도왔으나 결국에는 하는 일 없이 멍하게 앉아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긴 시간동안 홀로 사색에 잠긴 소네트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가 앉았던 자리를 손바닥으로 두어번 털어주고, 이제는 명확해진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여닫이문을 소리 없이 열자 나타난 기다란 복도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성 파블로프 재단의 복도는 잘 배치된 피아노 건반같이 생겼다고 소네트는 항상 생각했다. 양 옆으로 하얗고 평평한 흰 건반같은 사각기둥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펼쳐쳐 벽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위아래로 길쭉한 창문들이 외부세계의 편린을 받아들이며 검은건반처럼 흰건반의 빈자리를 메꾸어준다. 정오가 지나 태양이 기울어가면 미처 보살피지 못한 어두운 자국들이 늘어지게 소네트의 발밑에 깔렸는데 그 형세로 인해 바닥에는 흰건반과 검은건반의 색이 서로 뒤바뀐 네거티브 흑백 필름에 담은 피아노 건반 카펫이 펼쳐졌다.
서두르는듯 속도를 높힌 소네트의 옆으로 무수한 건반들이 스쳐지나갔다. 발걸음을 재촉해서인지 드리운 그림자 위로 발을 빠르게 디디며 도-레-미-파-솔-라-시 — 가 뒤섞이는 화음의 환청이 스타카토의 경쾌한 빠르기로 들려오는 듯 했다. 이따끔 들려오는 인사에 답하며, 오른쪽, 왼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모퉁이를 돌자 굳게 닫힌 문과, 그 옆의 경비원이 앉아있는 직원창구가 눈에 들어왔다. 살짝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소네트는 유리로 이루어진 창을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안녕하세요. 전 재단의 타임키퍼 제 1 조수 소네트입니다. 직원 번호는 SF38000000801102Y 입니다. 방문 자격을 등록을 요청합니다.”
“반갑습니다 소네트씨. 신분증을 제시해주세요.”
소네트는 신분증을 꺼내 제시했다.
신분증을 스캔한 경비원은 잠시 서람을 뒤적이더니 종이뭉치가 꼽혀있는 클립보드를 꺼내고, 신분증과 함께 소네트에게 돌려주었다.
“어디를 방문하실 예정인거죠?”
“업무적인 일로 재료구역 101실에 볼 일이 있어요.”
“여기에 서명하시고, 주의사항은 따로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직원 번호는… 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정신병동같이 티끌 하나 없는 완벽히 하얀 사각형 방인 재료구역 101실에는 단 하나의 물건만 놓여져 있었다. 조만간 재단의 연구진에게 연구용 물품으로 회수가 될 운명인 타임키퍼의 여행가방은 주인을 잃고 구석에 외롭게 방치되어있었다.
소네트는 여행가방을 열어재꼈다. 가방에서 대기하던 마지막 인원인 드루비스까지 1929년에서 온 동료들이 상부의 지시로 모두 자리를 비운 지금, 제 1 조수로서 가방이 회수되기 전에 내부의 청결함을 유지시켜 타임키퍼의 체면을 살리는 것은 그녀의 의무 중 하나였다.
소네트는 팔 다리를 조심스럽게 놀리며 여행가방의 사각형 입구를 지나, 원래라면 2차원적 개념인 바닥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이어져 있는, 빛 한줌조차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3차원의 통로를 지나 버틴의 가방속에 들어갔다.
이곳에 들어올 때는 항상 다른 사람과 함께였기 때문에 이토록 적막이 흐르는 것은 소네트에겐 처음이었다. 다양한 시간대의 흔적이 방 안에 뒤섞여 시간 자체가 어떻게 흘러야 할지 혼란스러워 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창문 밖 호수에서 산들바람을 맞는 것 처럼 잔잔하게 파도치지만 그 속에는 멈출 수 없는 부드러운 힘이 내재돼있는 물이 원인일까. 방해요소가 없는 가방의 내부 공간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이 조용하고 고요하였다. 동료들이 정리정돈을 제법 열심히 했는지, 가방 내부는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청결했다 — 다만 이상하게도 방 구석구석에서 떨어져 있는 씨앗들에서 푸릇푸릇한 식물들이 뿌리를 내리고 싹이 뻗어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처음에는 이 초록 불청객들을 뽑아버리려고 했다가, 자신이 들어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방 안에 있던 사람이 식물과 숲을 마도학으로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드루비스라는 것을 다시 떠올렸고 그녀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난장판을 만들지는 않았을거라는 믿음에 바닥 틈세에서 삐져나온 덩굴줄기와 씨름하는 것을 포기했다.
소네트는 삐뚜러진 상자와 책 몇개를 반듯하게 정리하다가 책장 위에 소더비 씨가 가장 아끼는 토끼장난감이 얹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필시 워낙 급하게 떠나느라 활발하고 약간 덤벙대는 소더비 씨가 미쳐 챙겨가지 못한 것이다. 이후 직접 방문해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소네트는 책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그러다 겉눈질로 뭔가 발견하고 그대로 멈추었다.
책장 앞, 라디오나 cd 플레이어로 보이는 기계더미 위에, 반듯하게 잘 포개진 옷가지가 있었다 — 소네트가 너무나도 잘 아는 옷이었다. 잿빛 검정색 정장, 그리고 피처럼 붉은 깃털장식.
소네트는 옷을 주워올리고 별 생각 없이 양 손으로 들고 가볍게 털었다. 섬유 사이사이에 깊이 스며들어 있던 오렌지꽃 향이 물씬 퍼져나오며 정장 주머니에서 종이봉투가 툭, 하고 떨어져나왔다.
봉투를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힌 소네트는 뒷면에 뭔가가 적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꽉막힌 아줌마’에게]
소네트의 심장이 한박자 내려앉으며 엇박으로 뛰었다.
타임키퍼는 이 편지를 읽어봤을까?
어릴 적 학교에서의 수업태도와는 무관하게, 잘 교육받은 숙녀인 버틴이라면 아무리 호기심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를 절대 함부로 열어보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소네트가 나중에 가방에 들어오게 될 것을 예측하고 이 자그마한 문서를 주머니에 그대로 남겨뒀을지도 모른다
약간 긴장하며, 소네트는 종이봉투의 내용물을 조심스럽게 꺼내었다.
봉투 안에는 단면이 깔끔하게 겹쳐지도록 접쳐있는 종이 편지와 폭력적으로 마구 구겨졌다가 다시 펴낸듯한 작은 종이조각이 있었다.
단순히 호기심에, 소네트는 구겨지는 과정에서 잔잔한 바람이 부는 날의 바다같은 굴곡이 자글자글한 쪼가리를 먼저 펼쳐보았다. 종이에는 매우 불쾌한 악필로 ‘거지는 꺼져라’ 라고 적혀있었다.
발신인이 본인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고자 한 내용인가 싶어 종이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미간을 잠깐 찡그린 소네트는 그것을 주머니에 넣어두고 곱게 접힌 다음 편지지를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두번째 편지에는 이전의 것보다는 장문이었다. 소네트는 찬찬히 글을 읽기 내려갔다.
안녕, 마스터를 호시탐탐 노리는 표독한 아줌마~
염치없게도 몇가지 부탁을 하기 위해서 짧게 편지를 남기려고 해.
이 편지를 본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겠지
그리고 넌 내가 거짓말쟁이 배신자 유다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거야.
나는 마스터에게 기도하는 한편 마스터의 피와 살로 만들어진 빵을 받고도 내 죄를 자백하지 않았고
이기적이게도 그녀에게 입을 맞추어 나의 주군임을 인정하는 낙인을 찍어버렸어.
하지만 마스터는 모두를 구원해야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개인이 짊어지기에는 너무 큰 부담을 홀로 힘겹게 얹고 있는 소녀일 뿐이야.
나는 마스터의 곁에 있어줄 수 없으니
네가 나를 대신해서 마스터 잘 보살펴줘.
두번째 부탁은 나를 위한거야.
아마 봉투 속에 다른 종이가 있던 것을 봤을거야. 깜찍하지 않아? 재단에서는 글씨 똑바로 쓰는 법은 혹시 안가르치나봐.
그 종이는 내가 폭풍우를 피할 수단을 찾던 도중 성 파블로프 재단의 시카고 지부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받은 선물이야.
조금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지만… 혹시 그걸로 그놈들 엿먹여줄 수 있겠어?
물적 증거로써 어느정도 가치인지 나는 판단하기 힘들지만, 재단의 존재가 조금이라도 인류와 마도학자가 평화와 공존에 도움이 되기를 염원하는 너에게 필요 할 것 같기도 해서 넣어뒀으니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이 되면 좋겠네.
그리고 이게 내 마지막 부탁이야
그간 너를 고지식하고 꽉 막힌 사람으로 알고 있었지만 지난 며칠간 내 오해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어.
속은 아주 따뜻하고 부드럽지만, 단단한 겉껍질에 쌓여있어서 미처 그걸 보지 못했던거지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밑에 고개를 내밀려고 하고 있는 부드러운 떡잎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그래서 이 부탁을 들어주기 더 힘들거란걸 알아 —
모든 일이 끝난다면, 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주면 좋겠어.
나의 존재는 너에게 가치관과 인간관계에 혼란을 가져올 뿐이야.
시간만 허락해 주었다면, 내 고향 시칠리아에서 오렌지라도 대접하고 싶었는데 아쉽네.
이제 그만 나를 잊어줘.
잘가, 소네트.
단단한 겉껍질에서 빠져나와 숨겨왔던 싹을 틔워서 네가 따라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길 바랄게.
슈나이더
가방 세계의 태양이 창밖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며, 창문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황금빛 햇살 줄기가 주홍빛 머리를 내리쬐었다.
역광으로 얼굴에 드리운 짙은 음영이 소네트의 표정을 가려주었다.
잘가, 슈나이더.
평온이 너와 함께하길.
소나이더는 항상 이런 애틋한 결말밖에 있을 수 없는걸까
왜 어째서 먼지엔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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