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맑은 날에도, 화장한 날에도, 흐린 날에도, 우중충한 날에도, 기쁜 날에도, 슬픈 날에도, 즐거운 날에도, 우울한 날에도, 언제나.
습기에 젖어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모자를 고쳐 쓰다가, 한숨을 쉬고 머리에서 미끄러트린다. 한 손에는 우산을, 다른 손에는 모자를 쥐고 앞을 바라본다.
자연이 자아내는 광시곡. 투둑거리며 떨어지는 빗소리 사이로 끼어드는 불협화음이 있었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가.
“여기서 뭐 해?”
태연한, 천연덕스러운, 뻔뻔하기까지 한 물음에 나는 눈을 흘겼다. 상대는 어느 때처럼 나른한 웃음을 띄우더니 내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바로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진다. 마치 세상 속에 이 정류장이 홀로 고립된 것만 같았고, 세상 사람들 중 오직 나와 소녀만이 외따로 떨어져 나온 것만 같았다.
“그냥.”
빗방울로 뿌옇게 흐려진 세상보다, 옆에 달라붙어 내 뺨 어림을 간지럽히는 검은 곱슬머리가 더 눈에 들어온다.
“비를 보고 있었어.”
나는 뻔한 거짓말을 했다. 상대는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내더니 더는 캐묻지 않겠다는 듯 ‘런던 다리 무너졌네’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경쾌하면서도 우울한 곡조가 빗소리와 어우러져 묘한 화음을 이룬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 소리를 감상하다가, 문득 나는 입을 열어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슈나이더.”
노랫소리가 그쳤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우리 마스터가.”
눈앞이 뿌옇다. 단순히 비가 내리기 때문만도 아니고, 어느새 눈이 눈물이 고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를 돌아보는 슈나이더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은 부옇게 흐려저 있어, 나는 그녀의 루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만을 간신히 알아보았다.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고 말이야.”
시간은 상처를 씻는다. 그러나 바래는 것은 상처만이 아니다.
소녀의 마지막 말이 무색하게 버틴은 조금씩 슈나이더를 잊어가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신이 아니었고, 모든 것을 기억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신은 아니었어도 너무나 선량한 사람이었기에.
“슈나이더······.”
먹장구름이 물러가고 따사로운 햇빛이 지상을 보듬는 날이 와도.
그녀의 삶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미안해······.”
“왜 그래, 마스터?”
“나, 너를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아······.”
네가 어떤 사람인지 기억한다.
오렌지 향기, 밤, 탄환이 장전되는 소리, 뜨거웠던 피, 가족애, 오른쪽 심장, 부드러웠던 손길, 깃털, 폭풍우 증후군,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생각해 보면 그리 각별한 사이도 아니었다. 너와 내가 함께한 시간은 짧았고, 서로에게 총알을 박아 넣으며 가까워진 관계.
세상은 폭풍우처럼 우릴 몰아쳤고, 비바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바삐 달음박질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발밑도 내려다보지 못한 채로, 진창 묻은 신발 바닥에 무엇이 밟혀 죽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깨달은 순간에는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은 다음이었다.
“네, 소원을······.”
내게 있어 이러한 이별은 처음도 아니었고, 마지막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유독 마음이 습기로 축축하게 젖어드는 까닭은.
아마 무수히 놓아 버린 손 가운데 하나를, 겨우 붙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괜찮아, 마스터.”
툭. 흐느끼는 몸을 부드럽게 끌어안는 손길이 있었다.
소녀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나보다도 작았다. 나를 끌어안았지만 마치 내게 끌어안긴 것만 같은 형국 속에서, 그녀는 내가 좋아하던 그 목소리로 나른하게 속닥거렸다.
“내 소원 같은 건, 나 같은 건 잊어버려도.”
“슈나이더······?”
“왜냐하면.”
세상을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세상에 발붙일 자리 하나 없는 처량한 자신을 비웃는 것 같기도 한, 조소 섞인 눈웃음으로.
“나는, 마스터의 꿈일 뿐이니까.”
속삭여 오는 죄책감.
잊지 않았다. 앞으로도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앞으로도 무수히 만날 거품처럼 흐트러질 인연과 파도처럼 스러질 시대 속에서.
네가 언제까지고 내 마음 속에 같은 자리에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어느 날부턴가, 오렌지 향기가 시고 달게 느껴질 것 같았다.
나는 또 폭풍우 속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물기가 마를 날이 없었다.
“미안해, 미안해. 슈나이더. 난, 내가······너의 우산이 되어주기로 했는데.”
“괜찮아, 마스터.”
하늘로 비가 내린다.
꿈이라는 걸 알아도 의식 깊숙이 각인된 거부감은 어쩔 수 없다. 아마, 곧 일어날 일 또한 알고 있기에.
부서지는 빗방울에는 무수한 색들이 담겼다. 기쁜 날, 맑은 날, 슬픈 날, 흐린 날, 우울한 날, 우중충한 날.
어떤 빗방울에는 언제나 내 옆에 있었던 헌신적인 주홍 머리 소녀가, 어떤 빗방울에는 압제와 억제 속에서도 자유를 부르짖었던 유쾌한 해적이.
또 어떤 빗방울에는, 핏방울 같은 깃털들을 흩뿌리며 추락한 플라밍고 한 마리.
“행복해져도 괜찮아, 마스터.”
언제나 한 시대의 끝을 지켜봐야만 하는 시간지기의 삶.
이미 충분한 후회와 상실로 얼룩진 과거, 미래조차 볼 수 없다면 얼마나 서글픈가.
“내 기억에 발목 잡혀 있을 필요는 없어. 마스터는 결국 폭풍우를 거슬러, 1999년의 진실을 지나- 그 이상의 밀레니엄으로 나아가야 할 테니까. 그렇지, 마스터?”
슈나이더는 웃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미소를 떠올릴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 창백한 강아지처럼 내게 매달리던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짙게 각인되어 버린 것일까. 그 때도 그녀는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있었지만······.
그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표정을, 나는 도저히 미소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하고, 가볍게 내 귀를 깨무는 목소리.
“날 기억해줘. 내 오른쪽 심장 소리를 기억해줘.”
뭐라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몰라서, 오히려 괜한 말을 꺼냈다가 모든 걸 망쳐버릴 것 같아서.
결국 나는 입을 다물고, 나직하게 속삭이는 소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비가 그치고, 모든 것이 해결되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모두가 웃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눈부신 태양과 파아란 하늘을 보며 날 떠올려 줘. 물거품이 된 수많은 시대에, 폭풍우에 휩쓸려 간 수많은 이들 중에 나도 있었노라고.”
꿈만 같은 이야기지만, 언젠가는 분명 그런 날이 올 것이다.
비가 하늘이 아닌 땅을 향해 내리고, 시간은 뒤가 아닌 앞을 향해 나아가며, 사람들은 구식 달력을 찢어버리고 새로운 달력의 첫 장에는 ‘1’이 아니라 ‘2’를 적는 날이. 나는 틀림없이 그 순간에도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너도, 죽었지만 내 기억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너도. 나와 함께 살아 있는 것이다. 폭풍우의 무수한 빗방울 중 하나가 아니라, 슈나이더라는 한 명의 소녀로. 시찰리아의 오렌지 농장에서 자랐고 우심증이 있던.
나는 너를 잊고, 기억할 것이다.
그러니까.
“행복해 줘, 마스터.”
웃어야겠지.
버틴은 잠에서 깨어나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슬픈 꿈을 꾸었다. 울기도 했고. 하지만 손가락으로 눈가를 문질러 보니 말라붙은 눈물 자국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잠시 지나간 소나기인 모양이었다.
고수추
로긴했으면 릾갤작가 메모했다
야밤에 보니까 진짜 눈물나오네...
저짤이 저렇게 화려했었나
흐아아아아아아앙!!!!!!!!!! 울었!!!!!!!! 울어어었!!!!!!!!!!! - dc App
슴주작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