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전에.
1. 표기는 국립국어원 표준보다 게임 내 표기를 우선함. (단, ~씨는 띄어쓰는 게 맞으나 의도적으로 붙임)
2. 네크롤과 클릭의 배경 상 연관시킬만한 점을 엮어서 쓴 글. 공식 느낌 나도록 썼으나, 어쨌든 2차 창작이므로 설정 오류가 존재할 수 있음.
3. 의외의 내용들이 공식 설정인 경우가 있음. (클릭이 할 짓 없으면 하늘 날아다니거나, 네크롤이 피공포증 있는 것, 안안 리가 ‘안안’이라고 부르는 걸 좋아하는 것 등) 게임의 세세한 설정 좋아하면 글이 도움 될 듯.
4. 시리즈 전작의 설정이 일부 연관될 수 있으므로 읽으면 독해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음.
5. 출연하는 인물들은 전부 음성, 물품, 문화 등에서 설정 및 말투 파악함. 안안 리는 못 뽑아서 나무위키 참조. 그 외엔 출석 날짜별 짜투리나 공식트위터 피셜, X트림 텔런트, 마도학자 1분요약 참조했음. 단, 참조한 공개 설정은 한섭 기준임.
6. 무쪼록 재밌게 읽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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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네크롤로지스트의 약속
[8/9 11:22]
“벌써 5번째. 시간이 미묘하게 빠른 것처럼 느껴지지 않나. 버틴.”
Z씨가 말한다. 그녀가 안경을 치켜세운다. 창밖을 본다. 재단의 하얀 대리석 건물들. 단단하다. 매끄럽다. 그리고 깔끔하다.
“자네는 지난 시간 동안 접견을 하면서 무얼 느꼈나.”
그녀가 묻는다. 시선을 떨군다. 내 앞에 놓인 찻잔을 본다. 중국식 잔에 놓인 자스민이다. 상큼한 향. 차를 한 모금 한다. 따뜻한 차가 목을 타고 넘어간다.
“저는...”
뭐라고 답을 할까. 형식적인 답이 필요할까. 아니, Z씨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다. 나라는 개인에 대한 질문이리라.
“다양한 마도학자들에 대해서 알게 됐죠.”
그렇게 답한다. 사실대로. 그러나 이것마저도 Z씨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눈을 살며시 감고 고개를 젓는다.
“자네 마음의 변화에 대해 묻는 거네.”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는 Z씨. 그녀가 손끝으로 내 명치를 가리킨다. 마음의 변화라. 그 순간마다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간 있었던 일들에 관해 정리한 적은 없다.
지금 당장 말할 수 있는 건... 그냥 솔직한 마음.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내가 말하자, Z씨는 본인의 얼굴이 그려진 잔을 내려놓는다. 그녀의 시그니처 머그컵. 잔에서 나오는 김이 점점 희미해진다. 차가 식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리라.
“그래. 안도감. 좋은 변화라고 생각하네. 자네는 늘 쫓기듯이 살았을 테니.”
Z씨가 그렇게 말한다. 후에 서랍을 연다. 매끄럽게 열린 서랍에선 서류들이 튀어나온다. Z씨는 장갑 낀 손으로 맨 위에 놓인 서류를 꺼낸다. 그것을 내게 건넨다.
“읽어보게.”
접견과 관련된 내용으로 시작된 Z씨와의 미팅. 그리고 그녀가 건넨 서류. 당연하게도 5번째 접견의 멤버일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서류의 내용은 엉뚱하게도 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다양한 장면이 있다. 전부 필름 사진이다. 이 방면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알 수 있다. 이 필름 사진들은 모두 원본이다. 필름에 난 상처들이 그것을 반증한다. 폭탄이 떨어지는 장면. 사람들이 절규하는 장면. 전란의 어두움들이 사진 속에 담겨 있었다.
페이지를 넘긴다. 글자들이 빼곡하다. 사진에 대한 설명이다. ‘강렬한 입맞춤’, ‘시계 소녀의 불타는 상점’. 누구의 작명 센스인지 알 것 같다. 그런데... 그 중 눈에 띄는 한 사진이 있다. 아주 익숙한, 그렇지만 어린 얼굴이.
그 사진 속에는 하늘을 응시하는 한 소녀가 있다. 폭격의 장면을 찍은 것일까. 사진 한편엔 제목이 적혀 있다. 굉장히 날려 쓴 글씨체다. 사진의 급박함을 보여주듯.
‘유령을 보는 의사’
그 사진 속 풍경은 분주했다. 의사들이 환자들을 돌본다. 흑백임에도 핏자국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든다. 팔이 없는 사람. 다리가 없는 사람. 의사들의 시야는 아래를 향한다. 환자는 바닥에 누워 있다. 의사들은 서 있거나 앉아 있다. 시선이 아래를 향하는 건 당연하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멀쩡한 병원 침대를 구하는 거란 쉽지 않았을 테니.
그래서 눈에 띄는 거다. 왜 사진 한 가운데의 소녀는 허공을 보는 걸까. 만일 폭격의 한 장면이었다면 도망가는 의사들이 찍혀야 하지 않았을까.
오히려 그 소녀의 표정은...
공허를 담고 있었다. 동시에 기묘한 평온을 보이기도 했다.
“Z씨. 이건...”
Z씨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뒷짐을 지고 창문 앞으로 간다. 블라인드의 그림자가 Z씨의 얼굴을 가린다. 그녀가 어둠 속에서 말한다.
“행복 속에서 살아온 마도학자들도 있을 걸세.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사람들도. 하지만 대부분의 마도학자들은 자네도 알다시피 세상의 이면 속에서 살아야 했지.”
Z씨가 블라인드를 올린다. 곧, Z씨의 절반을 삼켰던 해의 그림자가 사라진다. 온전히 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춘다. 그녀의 안경테가 빛난다.
“타임키퍼. 네크롤로지스트와 클릭과는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나?”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 모두 재단의 일과는 별개로 바쁜 사람들이다. 한명은 황무지의 풍경을 찍느라. 다른 한 명은 묘비 박물관의 관장 일을 하느라. 그럼에도 대화를 나눠본 적은 있다. 그 수가 많지 않을 뿐이다.
“다음 접견은 그 둘인가요?”
내가 말한다. 그러자 Z씨는 내 쪽을 돌아본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 두 사람 모두 2차 세계대전의 참상 속에 서 있던 사람들이지.”
뭔가가 헷갈린다. 네크롤로지스트는... 독일어를 쓰긴 해도 독일인은 아니다. 리히텐슈타인 출신이다. 그곳은 종전까지 독일의 침공을 받은 적이 없다. 작은 나라이면서, 중립국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류를 더 읽어본다. 네크롤로지스트의 페이지를 넘긴다. 리히텐슈타인 바두츠 출신... 그리고 의사 지망생.
“1939년부터 시작된 전쟁. 그녀는 전쟁터에서 의사의 길을 걷고 있었지. 하지만 이내 자신이 태어난 땅으로 돌아가 박물관을 차렸어. 1941년의 일일세.”
그녀가 의사의 길을 걷고 있었다고? 처음 듣는 얘기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의사의 길을 포기한 걸까. 네크롤로지스트의 페이지 한 구석엔 그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특이사항... 블러드포비아...”
피공포증. 다시 그녀가 찍혀 있던 사진을 본다. 바닥에 널린 피투성이 환자들. 하늘을 보는 네크롤로지스트.
“의사 지망생으로서 피공포증은 굉장한 약점이네. 물론 가상몽유 치료법과 심리학 상담을 동반한다면 치료하기 어려운 건 아닐테지. 하지만 그때는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었어. 독일의 메스머 가문이 리히텐슈타인과 어떤 관계였을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중립국이면서 나치와 껄끄러운 관계였던 나라 중 하나였네. 아마 메스머의 치료법을 받아들이기엔 시기상 어려웠을 거야. 아니... 가상몽유 치료법이 라플라스에 도입된 건 1943년의 일이었으니, 이미 늦었던 걸지도 모르겠군.”
Z씨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적어도 이번 접견에서 나눌 이야기들은 알 것 같다. 실마리가 잡혔다. 그런데... 그 전에 한 가지. Z씨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있다.
“Z씨. 다름이 아니라 그... 마틸다가...”
내가 말하자 Z씨는 웃음을 짓는다. 차를 한 모금 마신다.
“얘기는 전달 받았네. 재단의 보조교사로서 접견에 참여하길 희망한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마틸다가 미리 얘기해뒀구나. Z씨라면 어떻게 반응할까. 곧 그녀가 안경을 고쳐쓰며 말한다.
“버틴, 자네의 판단에 맡기지. 타임키퍼 소대원들에 대한 접견이야. 자네의 판단이 중요하지 않겠나?”
[8/11 09:34]
문을 연다. 체크무늬 장롱. 둥근 탁자. 그리고 시원한 시트러스 향. 여행가방 속 마틸다의 방이다. 다른 마도학자들에게 있어 여행가방 숙소는 곧 집이다. 그러나 그녀에겐 이곳이 별장에 가깝다. 재단시설에도 그녀의 방이 마련되어 있고, 그녀는 보통 그곳에 있는 걸 선호한다. 마틸다가 내 소대에 편재된 건 맞다. 하지만 그녀의 정체성은 재단의 보조교사에 더 가깝다. 때문에 재단의 방을 더 선호하는 듯하다. 단지... 아주 가끔 볼일이 있어서 여행가방에 들어오곤 한다. 자신의 제1조수 소더비를 보러 온다거나... 소네트를 보러 온다거나... 오늘은 마침 그녀가 자리에 있다. 그녀는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른 채, 수정구를 매만진다.
“자... 자... 조금만 더...”
수정구로 무언가 찾는 거라도 있을까. 그녀는 의자에 앉아 있다. 뒤로 다가간다. 어깨를 두드린다.
“잠깐만... 지금 중요한... 어?”
뭔가 잘못됐다는 듯, 그녀가 뒤를 돌아본다. 3초 정도 멍하더니,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녀의 어깨 너머, 수정구를 본다. 수정구엔 무엇이 떠오르고 있을까.
“소네트?”
수정구 속, 소네트의 주황색 머리카락이 비춰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유리펜으로 무언가를 쓰고 있다. 아마도 시 한 편이 아닐까.
“너... 너! 버틴! 노크 좀 하고 들어오라니까!”
아, 노크. 마틸다는 들켜선 안 될 것이라도 보인 듯, 황급히 수정구를 자신의 몸으로 감싼다. 이미 다 봤다. 딱히 새로울 것도 없다.
“봤... 어?”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거짓말 할 이유는 없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그녀가 답한다.
“그러니까... 나는... 재단의... 위대한 규율 보조 교사로서... 타임키퍼의 조수가 혹여나 딴짓을 하고 있진 않을까 하고...”
“소네트는 지금 휴가야. 마틸다.”
마틸다의 시선이 이곳저곳 산만하게 튄다.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머리를 쥐어뜯는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서 수정구를 방 구석에 치워버린다. 팔짱을 끼고 내 앞에 선다.
“어쨌든, 내 방엔 무슨 일인데?”
까먹은 건가?
“오늘 접견이야.”
내가 말하자 그녀가 잠깐 멈칫한다. 5초 정도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말한다.
“그... 그 정도야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고.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까먹었던 모양이다. 정작 그녀의 제스처는 당당해보인다. 늘 그렇듯, 왼손 검지로 자신의 천재적인 두뇌를 가리킨다. 아무튼 접견까지 시간이 많지 않다. 클릭과 네크롤로지스트도 요 근래 보지 못했다. 개인적인 사유 때문일 거다. 외근이 많은 사람들도 아니니까.
“1시까지 접견실로 오면 돼.”
그러자 마틸다는 기쁨에 취한 사람처럼 행동한다. 허리를 굽히고, ‘아싸’라고 혼잣말한다. 그러다가 나랑 눈이 마주친다. 그녀가 헛기침을 세 차례 정도 한다. 그러고는 목을 가다듬고 내게 말한다.
“당연한 수순이지. 재단에서도 이 마틸다님은 꼭 필요한 존재니까.”
... 재단 수뇌부의 의지와 관계 없이, 내가 결정한 거란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마틸다가 참여해보고 싶다고 했고, 그뿐이다. 그녀는 자존감이 넘치는 한편, 오만하거나 타인을 깎아내리진 않는다. 있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그런데 버틴. 이번 접견은 누가누가 하는데?”
그녀가 묻는다.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이나, 양쪽 눈이 모두 반짝인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해도 그녀의 호기심이 눈에 드러난다. 모종의 기대감도.
“네크롤로지스트와 클릭이야. 일단 접견이 끝나기 전까진 비밀에 부쳐줘.”
내가 말한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한다.
“물론이지. 이 마틸다님의 입은 아주 무거운 편이라고. 그런데... 혹시 소네트는 안 와?”
그녀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묻는다. 소네트? 그녀는 휴가다. 애초에 접견에 참여한 적도 없다.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이다.
“소네트는 원래 접견에 참여하지 않아. 마틸다.”
그러자 마틸다는 ‘어라’하면서 머리를 긁적인다.
“타임키퍼의 제1 조수인데... 접견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
“개인적으로 민감한 내용이 담길 수도 있어. 원칙적으로는 나와 접견 대상자들을 제외하곤 들어오지 않도록 하고 있고. 물론 이번 경우엔 너의 상황을 고려해서 참관을 허락했지만...”
마틸다의 실망한 표정이 얼굴에 드러난다. 파란색 홍채가 아래로 떨어지고,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다.
“아... 알겠어.”
그녀가 궁시렁거린다. 무슨 말인지 들리진 않는다. 한숨이 나온다. 그녀의 사리사욕엔 관심 없다. 중요한 건 네크롤로지스트와 클릭을 찾는 일이다.
“이만 나가볼게.”
마틸다는 힘 없이 손을 흔든다. 나름의 배웅이리라. 복도로 나온다. 로비로 향한다. 나무 바닥이 삐걱인다. 허공의 미세먼지가 햇살에 반짝인다. 복도를 걷는 건 나 혼자뿐이다. 그런데 내가 가는 방향에서 말소리가 새어나온다. 로비 쪽이다. 그곳에 다다르니, 세 사람이 모여 있다. 정확히는... 한 사람은 기하학적 인테리어의 창틀을 매만지며, 열심히 무언가를 말한다. 다른 한 명은 귀를 파고 있다. 마지막 한 사람은 깍지를 껸 채로 난감해한다.
“이 창틀은 기하학적으로 아주 아름다운 직사각형이야. 그것도 여러 개가 겹쳐 있어. 특히 위쪽은 세로가 소수인 13cm로 이루어져 있고, 가로는...”
37의 하늘빛 눈동자가 반짝인다. 그녀는 여행가방 로비 창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확히는 설명이라기 보단 본인의 감상일 테지만... 여행가방에 온 뒤로 마도학자들에게 수에 대해 강연하길 좋아하는 그녀다. 문제라면 그걸 듣고 있는 마도학자가 콘블룸과 릴리아라는 점이다.
“우와... 그런데 37씨. 죄송하지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엄청난 내용이라는 건 알겠지만...”
콘블룸이 은발 머리를 긁적인다. 바로 옆에 선 릴리아는 아예 37쪽을 보지도 않는다. 그저 보드카만 들이키며 이 지루한 상황이 끝나길 바라는 느낌이다.
“모르겠다고? 나는 정말 쉽게 설명하고 있는데. 13의 아름다움은..”
37이 말을 이어가자, 이번엔 릴리아가 말한다.
“이봐 애송이. 세상만사 감으로 살아가는 거야.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 때, 그렇게 복잡한 숫자놀음을 하면 바로 추락하고 말 거라고.”
그러자 37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한다. 잠시 후, 그녀가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말한다.
“애송이? 그런데 키는 릴리아 네가 더 작잖아. 나는 163cm고, 너는 154cm야. 9cm가 차이나는 걸? 애송이라는 표현이 붙으려면...”
37의 악의 없는 순수한 답변에 릴리아가 “뭐야?” 하면서 호기롭게 달려든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들 중 가장 키가 큰 콘블룸이 릴리아를 막는다. 37이 릴리아를 비꼴 의도는 없었을 거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물론 키 작은 소련 여자가 받아들이기엔 좋지 않은 내용이겠지만.
그래도 콘블룸과 릴리아. 많이 친해졌구나. 입가에 미소가 살며시 번진다. 끼어들지 않는 편이 나을 거다. 그녀들의 일상일 뿐이고, 나도 내 할 일이 있으니까.
곧이어 어느 방문 앞에 도착한다. 팻말에 이렇게 쓰여 있다.
‘깊은 잠에 든 이들의 안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복도에선 조용히 말씀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공손하고 정갈한 글씨체. 네크롤로지스트의 방이다. 문손잡이를 잡는다. 아니지. 노크를 먼저 해야지. 문을 두드린다. 똑똑. 그러자 안쪽에서 창백하면서도 따스한 목소리가 들린다.
“들어오세요.”
문을 연다. 방안은 소네트가 본다면 기겁할만할 모양새다. 벽을 수놓은 묘비와 추모비. 어두운 커튼이 쳐진 방. 한가운데 책상 위엔 촛불이 놓여 있다. 방을 어둡게나마 밝히고 있다. 칸지라의 점집도 이것보단 밝을 것이다. 블로니와 조슈아가 영화 각본에 대한 영감을 찾을 때, 딱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은 좋아했었지. 그때와 같다. 넓지 않은 방인데, 그 빈 공간들마저 유리전시장에 둘러싸인 묘비로 가득하다.
“안녕하세요. 타임키퍼씨. 비좁은 방이라 죄송해요. 망자들을 모실 공간이 넉넉치 않아서...”
그녀는 여전히 묘비박물관에서의 습관이 남은 듯하다. 그녀의 고향에 세웠던 묘비박물관은 폭풍우에 휩쓸렸다. 재단 내에서 비슷한 공간을 마련해주긴 했으나, 그녀에겐 그것만으론 부족했던 모양이다.
“괜찮아. 네크롤로지스트.”
내가 말하자, 그녀는 ‘아차’하더니 방구석 어딘가로 가서 무언가를 꺼낸다. 찻잎과 찻잔.
“금방 물을 데울게요.”
그녀의 예의에는 언제나 감탄하게 된다. 굉장히 예의바른 사람이다. 정작 그녀 본인은 자신이 산 자에 대한 예의를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오히려 친해지기 어려웠으리라. 뭐랄까. 다가가기에 어려운 면모가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수많은 망자들과 친구가 되어 별로 개의치 않는 모양이지만.
“그런데 네크롤로지스트. 원래 커피를 마시지 않았어?”
내가 묻는다. 그도 그럴게... 그녀는 잠을 잘 못잔다. 망자들의 소리가 밤에 더 심해지기라도 하는 걸까. 그래서 그녀도 멜라니아나 갈라보나씨처럼 커피를 달고 사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녀가 머쓱한 투로 답한다.
“그게, 37씨가 커피원두를 너무 싫어하셔서... 이참에 차에 맛을 들이려고 바꿨어요.”
37과 네크롤로지스트. 둘은 과연 어떤 대화를 할까. 37의 말이 떠오른다. ‘갈색 콩을 우린 액체를 마신 사람들이 모두 나가기 전까진, 내 방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갈 거야.’ 유감스럽게도 원두와 콩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 다만 37의 관점에선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배려가 넘치네.”
“네. 망자들과 오래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타인에게 맞추게 되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또한 산 사람의 바람을 듣는 것도 좋아하는 일 중 하나랍니다. 물론... 산 사람에 대한 배려가 뛰어난 건 모르겠습니다만...”
그녀가 차를 우린다. 그동안 중앙에 놓인 책상 옆 의자에 앉는다. 검은색 중절모. 가슴 언저리에 달린 흰 국화 브로치. 그녀가 완드를 겸해서 들고 다니는 이름 없는 묘비까지. 그녀는 연일 비슷한 행색이다.
“옷이 불편하진 않아?”
그러자 그녀는 괜찮다는 듯 답한다.
“네. 익숙해져서요. 언제 어디서나 예의를 갖추고 있는 게 망자들에 대한 예우일 테니까요. 게다가...제 옷은 거의 이런 것 뿐이기도 하고요.”
언젠가 들은 적이 있긴 하다. 그녀의 옷은 비슷한 게 10벌이 넘는다고. 차가 다 우러났는지, 그녀가 내게 잔을 건넨다. 이건...
“알베르트씨가 생전에 좋아하던 잉글리쉬 애프터눈이에요. 추천을 받아서 샀는데, 맛이 괜찮더라고요. 지금도 제 옆에서 향기를 맡고 있답니다.”
음. 괜히 차에서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그래도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유령... 아니면 부활했다고 볼 수 있는 마도학자들도 재단 내에 많다. 폴터가이스트도. 클릭도. 그리고... A나이트씨도 어떻게 보면 유령이니까.
“일단, 본론부터 얘기할게. 네크롤로지스트. 오후 1시에 접견이 예정되어 있어. 들은 바가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이번 접견 대상은 너와 클릭이야.”
내가 말하자, 네크롤로지스트가 고개를 끄덕인다. 놀란 기색이 없다. 콘블룸이 얘기라도 한 걸까. 내가 묻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연다.
“다이애나씨가 얘기했어요. 오늘 제 접견이 있을 거라고.”
... 다이애나씨는 또 누굴까. 그녀에게 타인의 사생활이란 존재하는 걸까. 이 방의 묘비만 해도, 크고 작은 것을 합해 30개는 넘어갈 것 같다. 저 묘비들 하나 하나에 모두 영혼이 깃들었다고 생각하면... 나는 언제고 혼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소네트에겐 비밀로 해야겠다. 그녀는 귀신이라면 지나칠 정도로 무서워하니까.
“이미 준비는 마쳤어요. 망자분들께 양해를 구했죠. 그런데 클릭씨와는 얘기가 된 건가요?”
... 그게 문제다. 클릭이 어디에 있을까. 평소라면 황무지 어딘가에서 사진을 찍고 있으리라. 오늘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단 게 문제다.
“아니, 이제 얘기해야 해.”
내가 말하자, 그녀는 옅은 미소를 띠면서 내게 말한다. 그것도 내가 필요한 정보를.
“클릭씨는 지금 황무지의 달빛 부두에 있다고 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허공 어딘가에 목례를 한다. 아마도 그녀의 망자 친구들이 알려준 것이리라. 나도... 그녀가 바라본 쪽에 목례한다. 그러자 그녀가 웃으면서 내게 말한다.
“에밀씨는 이미 떠나셨어요. 말씀은 제가 전달드릴게요.”
그러면서 그녀는 품속에서 메모지를 꺼내 메모하기 시작한다. 망자들의 부탁과 산자들의 부탁. 온갖 ‘부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녀에겐 필수 용품일 거다.
[8/11 11:22]
황무지에는 수 많은 건축물들이 존재한다. 대부분은 마도학과 여행가방의 신비한 힘으로 만들어낸 ‘모조품’들이다. 그 중에서도 달빛 부두는 황무지 서쪽에 위치한다. 별빛 계곡 쪽에 있는 거대한 호수에 위치한 부두. 에메랄드빛 호수의 별빛들이 반짝인다. 전망이 좋아서 여러 마도학자들이 방문한다. 티타임을 즐기기에도 좋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조용한 편이다. 마릴린이 왠지 모르게 공허한 눈으로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그 옆에는 테넌트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서 있다.
둘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모양이다. 무슨 얘기를 하는진 모르겠다. 꽤 멀리 있어서다. 굳이 끼어들지 않기로 한다. 시간이 많지 않고, 나는 클릭을 찾아야 한다. 부두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비어있는 탁자들과 고요히 정박된 배. 클릭은 어디에 있을까.
“반가워요. 절 찾으시는 것 같은데.”
썰렁하고 얇은 남자 목소리. 하마터면 심장이 터질 뻔했다. 소리는 위에서 들린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위를 본다. 클릭이 하늘에 떠 있다.
“맞아. 널 찾고 있었어. 클릭.”
바람이 분다. 톱 햇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붙잡는다. 클릭은 좋은 장면이라는 듯, 자신의 사진기로 내 모습을 찍는다. 찰칵 소리가 울린다.
“완벽한 초점. 그리고 구도. 손가락 틈새로 비춰진 은색 눈동자. 버틴 아가씨의 사진 모음집에 한 장 추가되겠네요.”
허공을 부유하던 그가 천천히 땅으로 내려온다. 그의 완드인 ‘테이아 VI 카메라’의 렌즈가 반짝인다.
“이런 곳은 안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내가 말한다. 클릭은... 여전히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혼이기도 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종군기자임에 감사한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사진을 찍으려고 한다. 이따금 환상을 만들어내서라도 말이다. 그런 그가 평화롭기 그지 없는 달빛 부두에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내 물음에 그는 자신의 사진기를 매만진다. 이내 느린 톤으로 답한다.
“별 의미는 없어요. 할 게 없으면 그저 하늘을 떠다니곤 하거든요.”
...
“그런데, 제가 닿을 수 있는 높이는 정해져 있죠. 저라고 해도 자력으로 구름을 넘을 수는 없거든요. 릴리아씨에게 부탁해보려 했지만... 안 내키는 모양이더군요.”
“내가 나중에 릴리아에게 부탁해볼게.”
내가 말하자 클릭이 미묘한 웃음을 짓는다. 솔직히 말해서, 그가 웃는 얼굴이 무섭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에게 악의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아무튼 본론을 말할 때다. 시간이 없다.
“클릭.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접견이란 게 있어. 네가 오늘 참여해줬으면 해.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게 꺼려질지도 모르겠지만, 꼭 협조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야.”
내가 말하자, 그는 사진기를 자신의 카메라 케이스 안에 넣는다. 멍하니 하늘을 보기 시작한다. 뭐라도 보이는 걸까.
“물론이죠. 버틴 아가씨의 부탁이니까요. 1시까지죠 접견실로 가면 되나요?”
“어... 오늘 네가 접견이란 걸 알고 있었어?”
“아뇨. 단지 매달 11일 1시에 접견이 열린다는 건 알았어요. 아무래도 오늘은 제 차례인 것 같고요. 매달 접견 때마다 여러분들의 사진을 찍었죠. 전부 사진집에 모아두고 있어요. 제목은 ‘마도학자들의 만담회’죠.”
그러면서 그가 케이스 안에 든 사진 몇 장을 건넨다. 놀랍게도... 겨울씨와 소더비가 찍힌 사진. 갈라보나씨와 피클즈가 찍힌 사진. 크리스탈로와 이터니티씨가 찍힌 사진. 비교적 최근에 했던 릴리아와 콘블룸의 사진도 있다. 심지어 그들이 접견 이후에 지내는 모습까지도 찍혀 있다.
겨울씨와 소더비가 서로 티폰 만화를 시청하는 모습. 갈라보나씨와 피클즈가 함께 독서하는 모습. 크리스탈로의 간병을 이터니티씨가 보는 모습. 그리고 콘블룸과 릴리아의 비행사진...
“이건...”
“소중한 자료가 되겠죠. 복사본이... 필요할까요?”
고개를 끄덕인다. 그간 접견이 성과가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사진에 나와 있으니 말이다. Z씨가 재단에 최종보고를 할 때도 꽤나 유의미한 자료가 될 거다.
“고마워. 클릭. 생각도 못했어.”
내가 말하자, 종군기자는 당연한 의무를 행했다는 듯, 무표정으로 답한다.
“‘필요한 기록’인 걸요.”
[8/11 12:58]
접견실 앞. 이미 다들 와 있으려나. 문손잡이를 잡으려다 만다. 습관이 중요하겠지. 문을 두드린다. 안에서 명랑한 프랑스 억양이 들린다.
“들어와!”
문을 연다. 접견실은 여전하다. 회색 소파 3개. 가운데엔 원형 테이블. 천장엔 주홍색 조명. 창문은 기하학적 모양으로 나무판자를 덧댄 모양. 왼쪽 구석엔 다과가 놓여 있다. 물론 사람들은 2달 전과 다르다. 네크롤로지스트, 마틸다, 클릭. 세 사람 모두 이곳에 있다. 다만...
“클릭. 너는 안 앉아도 돼?”
구도가 이상하다. 네크롤로지스트와 마틸다가 함께 앉아 있고, 클릭은 옆에 서 있다. 아니, 서 있다기 보단 떠 있다. 내 자리는 비었다. 생각해보니 소파가 3개라...
“클릭씨는 저렇게 서 있는 게 편하다고 했어요. 타임키퍼씨.”
네크롤로지스트가 국화 브로치를 매만지며 말한다. 클릭은 별 말 없이 서 있다. 마틸다는 팔짱을 낀 채다. 뭔가 불편한 얼굴이다.
“접견인데. 네크롤로지스트와 클릭이 같이 앉아 있는 게 낫지 않을까.”
그 말 그대로다. 마틸다에게 일어나 있으란 뜻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 자리에서 마틸다가 중요한 건 아니다. 마틸다도 눈치가 없진 않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클릭이 괜찮다며 그녀를 막는다.
“앉아 있든 서 있든 같아요. 살아 있는 사람이 앉는 편이 낫겠죠.”
... 클릭의 말에 마틸다가 눈을 찡그린다. 그리고 나를 흘겨본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클릭의 거절이다. 아니, 배려다. 어쩔 수 없지. 고개를 끄덕인다. 마틸다는 다시 자리에 앉고, 다리를 꼰다.
시계를 본다. 13:00. 정확히 접견 시간이다. 숨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내 앞에 선 이들에게 말한다.
“오늘은 5번째 접견이야. 대상은 여기 있는 두 사람. 네크롤로지스트와 클릭. 접견은 공식적으로 재단에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하나의 ‘임무’야. 접견을 시행하게 된 이유는 마도학자들 간의 관계를 개선해서 업무 효율을 증진하고자 함이고. 그리고...”
눈을 마틸다 쪽으로 둔다. 그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코를 벌렁이며 말한다.
“재단의 규율 보조 교사, 마틸다 부아닉도 함께 참관할 예정이에요. 물론... 그러니까... 당신들의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죠. 때문에 타임키퍼를 도우면서도 여러분을 감독하기 위해 온 거고요.”
중간말은 왜인지 내 말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 같다. 마틸다가 왜 이곳에 있는지... 아니, 정확히는 있게 됐는지는 아니까. 유감스럽게도 그 이유인 소네트는 이곳에 없지만 말이다. 먼저 입을 연 건 네크롤로지스트였다.
“접견에 대해서는 망자분들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특별한 주제는 없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 된다고...”
그녀가 말을 흐린다. 오늘이 다른 분위기란 걸 눈치 챈 걸까. 오늘은 크리스탈로의 접견 때처럼 하나의 이유가 있다. 나는 알고 싶다. Z씨가 건넨 네크롤로지스트의 사진에 대해서.
품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낸다. 낡고, 오래된 사진. 지금과는 대비되게 하얀 가운을 입은 그녀가 나온 사진.
“네크롤로지스트. 이 사진 본 적 있어?”
그녀에게 사진을 건넨다. 그녀가 받는다. 옆에서 마틸다가 얇게 뜬 눈으로 유심히 본다.
“이건... 네크롤로지스트씨잖아? 그런데 왜 하얀 옷을 입고 있지? 그리고... 하늘을 보고 있어.”
마틸다의 눈에도 기묘한 사진이었던 모양이다. 네크롤로지스트는 말 없이 사진을 보다가 내게 묻는다.
“이 사진은... 어떻게...”
그때, 하늘에서 ‘찰칵’ 소리가 울린다. 클릭이다. 그가 천장 가까이에서 우리의 모습을 찍었다.
“사진 속 사진.”
그의 작품 명이 정해진 모양이다. 네크롤로지스트가 멍하니 그를 바라본다. 그러다 자신의 완드인 훼손된 묘비를 매만진다. 마치 마틸다가 수정구를 만지듯.
“버틴. 설마... 클릭씨가 이 사진을 찍은 거야? 그래서 접견을 하는 거고?”
고개를 끄덕인다. 100% 확실하진 않지만, 그건 클릭이 찍은 사진일 거다.
“이때의 모습을 남긴 사진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네크롤로지스트가 중얼거린다. 마틸다는 규율 보조 교사로서 궁금한 걸 묻는다.
“네크롤로지스트씨. 하얀색 옷도 있었어요? 뭔가 상상이 안 가요.”
그녀의 물음에 네크롤로지스트는 시선을 돌린다. 그녀의 눈빛이 아련하게 느껴진다. 그녀가 이야기를 꺼낸다. 어쩌면 꽤 오래됐으면서도, 또 어쩌면 얼마 되지 않았을 이야기를.
“저는 피 공포증이 있어요. 의사를 꿈꿨고, 전쟁터에 의학적 도움을 주기 위해 나갔지만... 제게 피 공포증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어요.”
그제야 마틸다는 그 사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것 같다.
“설마... 클릭씨가 종군기자였으니까... 이게... 2차 세계대전의 사진이면... 이 검은 물 같은 건 전부...”
마틸다의 눈이 떨린다. 보기 어려운 걸 본 사람처럼. 마틸다의 추측이 맞다. 사진에 나와 있는 사람들. 엄밀히 말하면 환자들의 옷은 모두 젖어 있다. 사진 상으론 새까맣게 보이는 무언가로. 그리고 그것들은 전부 피다. 새빨간 피.
“세상에. 네크롤로지스트씨...”
네크롤로지스트에겐 그 상황이 지옥 그 자체였을 것이다. 피 공포증을 가진 사람이 피로 가득한 곳 한 가운데에 서 있다.
“전쟁이란 전염병은 많은 것을 앗아갔어요. 재산도. 땅도. 그리고 사람의 목숨도. 저는 늘 누군가를 돕고 싶었고, 그래서 의사의 길을 걸었어요. 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을 깨닫고는 그 참상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어요. 정식 의사는 아니었지만... 의료 종사자임에도 환자를 돌볼 수 없었죠. 저는 그 무엇도 책임질 수 없었어요.”
마틸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씁쓸한 표정으로 듣는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준다. 정작 네크롤로지스트는 담담한데도 말이다.
“그날, 많은 환자들이 망자가 되었고, 하늘로 떠올랐죠. 이건 그 모습을 찍은 사진 같네요. 수많은 이들이 하늘에서 한탄였어요. 왜... 왜 자신을 죽게 내버려뒀냐고.”
마틸다는 사진 속 네크롤로지스트처럼 하늘을 본다. 그녀의 눈에도 비치는 망령이 한 명 있다. 클릭.
“클릭씨도... 설마... 그때 저곳에 있었나요?”
그러자 클릭은 마틸다의 옆으로 내려온다. 그녀의 옆에 서서, 사진기를 자신의 사진기 케이스에 넣고 말한다.
“제가 찍은 사진이 맞아요. 하지만 그때는 이미 이런 몸이었죠. 사진을 찍기 적합한 몸.”
그가 퀭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본다. 네크롤로지스트가 아까 하던 말을 잇는다.
“결국, 저는 의학적 재능이 없단 걸 깨달았어요.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갔죠. 묘비 박물관을 세웠고, 이름 없는 묘비들을 모았어요. 때로는 누군가가 전달해주기도 했죠. 저는 망자들의 부탁들 들어줬고, 그것이 제게 있어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종의 속죄예요.”
네크롤로지스트가 사진을 내려놓는다. 마틸다는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는 듯, 입만 끔뻑거렸다. 클릭은 허리를 굽히고, 사진을 보며 입을 연다.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저곳엔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같은 인간을 죽였고, 그 사이엔 소수의 마도학자들도 끼어 있었죠. 저는 종군 기자이고, 그런 사람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 아니, 존재죠.”
클릭의 말이 끝나자, 네크롤로지스트가 클릭을 바라본다. 비록 산 사람 눈은 잘 마주치지 못하는 그녀지만, 망자의 눈은 곧잘 마주친다. 그녀가 클릭에게 감사와 물음을 건넨다.
“추억을 기억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클릭씨. 덕분에... 제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저도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네요. 그런데... 클릭씨는 왜 지금도 계속해서 사진을 찍는 건가요. 혹시 그것이... 당신의 원념인가요. 당신을 죽게 만든... 원념.”
언젠가 안안 리에게 들은 적이 있다. 망자들은 원념을 해결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현상세계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고. 네크롤로지스트도 망자에 대해 비슷한 관점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원념. A나이트처럼 사물에 깃든 유령이거나, 폴터가이스트처럼 명확한 원념과 목적을 가진 존재들. 그 사이에서 클릭은 유독 알 수 없는 존재이긴 하다. 누군가를 괴롭히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사물에 깃든 건 아니다. 카메라는 그의 완드일 뿐, 영혼이 깃든 사물이 아니다.
클릭은 오랜 시간 침묵을 잇는다. 괜히 카메라를 다시 꺼낸다. 그리고 창밖의 사진을 찍기도 한다. 고요 속에서 사진기의 ‘찰칵’ 소리만이 방을 울린다. 클릭이 답을 한 건 무려 4장의 사진을 더 찍고 나서의 일이었다.
“네크롤로지스트 아가씨. 당신은 망자들의 원념을 들어주겠지만, 저는... 제가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단지 이 몸 상태에 적응하는 것이 오래 걸리지 않았고, 별 문제 없었어요. 오히려 제 일을 더 잘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네크롤로지스트에겐 일종의 사명처럼 느껴졌던 일. 그건 망자의 부탁을 이루고, 완전히 떠나보내는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클릭의 말대로. 그에겐 그런 소망이나 원념이 없다. 이미 죽었음에도 사명이 있을 뿐.
“전쟁은 끝나지 않았어요. 네크롤로지스트 아가씨. 화약의 연기가 자욱해지냐, 조금 걷히냐의 차이일 뿐이죠.”
클릭의 말에, 네크롤로지스트의 표정은 한 층 더 슬퍼진다. 그때, 마틸다가 클릭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클릭씨는... 계속 그대로 있고 싶으신 거예요?”
“부아닉씨, 저는 그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록을 남길 뿐이에요.”
클릭의 눈에는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 것일까. 그가 달빛부두에서 본 광경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눈엔 정말로 그저 별빛이 아름다운 호수와 부두가 있었을 뿐일까.
“제게 필요한 건 필름 뿐이에요.”
죽은 자와 대화를 하는 이가 있다. 그는 산 사람과 거리를 두지만, 그럼에도 외롭지 않다.
죽은 이가 있다. 그는 산 사람과 거리를 두지만, 그럼에도...
“외롭지 않으세요? 떨어지는 포화 속에 홀로 서 있는 건.”
어느샌가 마틸다가 수정구를 꺼내놓았다. 수정구에선 오묘한 빛이 떠오르더니 하나의 광경이 비쳐줬다. 폭연과 먼지가 도시를 뒤덮는다. 하늘 위에선 폭탄들이 비처럼 쏟아진다. 그나마 걸을 수 있는 곳은 모두 지뢰 투성이다. 죽은 이들의 몸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고, 우리는 그 광경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클릭이 바라보는 세상이었다.
마틸다의 말에 클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저 가만히 수정구를 응시하다가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한 장 남긴다. 찰칵. 소리가 울린다.
“수정구 속 나의 세상... 지뢰... 지뢰... 아니야... 나는...”
곧 접견은 중단되었다. 클릭의 형체가 흐릿해졌고, 금방 어딘가로 사라졌다. 마틸다는 그가 혹시라도 소멸한 건 아닐까 걱정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찾을 기세였다. 하지만 네크롤로지스트가 그녀를 말렸다. 클릭은 멀리 간 게 아니라고. 잠시 쉬어야 할 필요가 있을 뿐이라고.
접견이 끝나고, 자리를 옮긴다. 나의 집무실로. 네크롤로지스트와 마틸다에게 자리를 마련하고, 앉아서 보고서를 쓰기 시작한다.
“버틴... 접견이 이대로 끝나고 괜찮은 거야?”
...
“내가 상황을 통제하지 못했어. 내 탓이야. 미안하게 생각해.”
나의 말에 마틸다도 침울했는지... 그녀로선 정말 의외의 말을 건넨다.
“내가... 규율 보조 교사로서... 아무것도 도움을 주지 못했어... 미... 미안. 버틴, 네크롤로지스트씨.”
의기소침한 그녀의 말에 집무실은 잠시 고요를 찾는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보고서에 쓸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클릭이 분명 무언가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다는 걸 느껴서다. 네크롤로지스트는 내 방 한켠의 책장을 손으로 매만진다. 무표정한 그녀가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우리에게 말한다.
“여러분.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제가... 제가 클릭씨의 묘비를 찾아보고 싶어요.”
클릭씨의 묘비? 하지만...
“클릭씨의 묘비는 이미... 폭풍우에 휩쓸렸을 거예요. 찾을 수 있을까요?”
마틸다가 내 의문을 대신 말해준다. 네크롤로지스트가 우리 쪽으로 돌아본다. 그녀는 손에 든 훼손된 묘비를 매만지며 말한다.
“타임키퍼씨가... 버틴씨가 우리 모두에게 약속했잖아요. 언젠가 1999년으로 돌아가기로. 그때가 된다면, 클릭씨의 묘비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 그녀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허리를 굽힌다.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타임키퍼씨의 힘이 되도록. 우리들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고마워요. 버틴씨, 부아닉씨.”
그제야 마틸다도 기운을 차린 걸까.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선 헛기침을 한 번 한다. 그리고 늘 그랬듯, 가슴을 편다. 당당한 자세로 선다. 그리고 그녀가 말한다.
“나도, 재단의 일원으로서. 더 열심히 노력해야지. 우리들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무... 물론, 재단의 정식 조사원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도 하고... 그리고...”
... 이런 상황이라면 나도 한 마디 해야겠지.
“반드시 지킬 거야. 원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 그리고 마틸다에 대해선... 그래. Z씨에게 잘 얘기해볼게.”
그러자 마틸다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녀가 부끄러운 듯 말한다.
“Z씨에게... 잘... 하... 하하하. 역시. 이 마틸다님이 없으면 안 된다니까!”
역시 알기 쉬운 사람이다.
[8/13 10:33]
“보스! 저기 반투명한 기자한테 다가가보면 안 돼? 저렇게까지 눈에 보이는 귀신은 오랜만에 봐서... 그러니까... 그냥 얘기만 나눌게.”
로비, 창문. 네오 사이언스 퇴마 사무소의 소장 안안 리는 지금 내 옆에 서 있다. 창밖, 드루비스의 숲 위에는 클릭 씨가 떠 있다. 홍콩 출신의 퇴마사는 지금 고스트 캐처를 클릭에게 조준 중이다.
한숨이 나온다.
“안안. 만일 네가 그 기계를 클릭에게 사용하면... 다음 달 월급 책정. 기대해도 좋을 거야.”
안안 리의 약점. 돈. 아무래도... 네크롤로지스트의 일. 폴터가이스트와 클릭 같은 유령 마도학자들의 존재로 인해... 안안 리의 사무소 수입은 날로 적어졌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돈에 굉장히 민감한다. 항상 재단의 사무소에 파리만 날린다고 슬퍼하니까.
“아냐. 보스. 그런...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러니까. 그냥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거지. 귀신은... 그러니까... 나에겐 에너지원으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일단 마도학자는 마도학자잖아. 절대 전자레인지 킬 전기세가 모자라서 그런 건 아니고...”
요즈음 네크롤로지스트는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다. 클릭과 둘 사이의 변화는 거의 없다. 그대로라고 해도 무방하다. 처음엔 접견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Z씨에게 보고할 거리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미세한 변화는 있었다. 네크롤로지스트는 요즈음 마틸다와 가까워졌다. 둘이 친해진 것도 있겠으나, 네크롤로지스트에게 필요한 자료가 있어서에 가깝다. 2차세계대전의 기사를 찾기 위해 ‘불필요한 정보 자료실’의 자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자료 찾기에 의외의 재능을 보인 제1 조수 소더비. 그리고 자료실 방문 권한을 가진 마틸다. 둘은 사흘 밤낮으로 네크롤로지스트에게 필요한 자료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전달했다. 그 뒤로 네크롤로지스트는 묘비 돌보기와 함께 자료를 탐색하는 일까지 더불어, 바빠졌다. 때문에 외근 일수가 줄었고, 그 자리는 유감스럽게도 피클즈가 채우고 있다.
클릭도 특별한 변화는 없다. 그런데... 묘하게 네크롤로지스트의 방 주변을 멤돌곤 했다. 확실한 건진 모르겠지만, 그녀의 방 주변에선 오래된 사진기의 셔터음이 곧잘 울려퍼졌다. 어쩌면 모종의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버틴씨, 무슨 생각해?”
안안 리가 묻는다.
“아무것도 아니야. 안안.”
곧이어 드루비스씨가 숲에서 나온다. 창가 쪽 입구를 통해 로비로 들어온다. 그녀는 늘상 앉아 있던 완드 공방을 바라보다가, 우리 쪽으로 눈을 돌린다.
“좋은 아침이에요. 버틴씨, 안안 리씨.”
“반가워. 드루비스씨.”
내가 답한다. 그런데... 옆에 서 있던 안안이 어느새 내 뒤에 있다. 뭔가 잘못했다는 듯, 난색으로.
“숨을 필요 없어요. 안안 리씨. 숲을 스치는 바람소리는 제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거든요.”
...
“보... 보스. 고해성사할게. 하... 한 번만 용서해줘. 내가... 정말 돈이 없어서... 라면 물을 끓이려고 나뭇가지 몇 개를 잘랐는데...”
...
“죄 없는 나무가 상처를 입은 만큼, 당신도 상처로 보답해야 하지 않을까요.”
드루비스씨가 섬뜩한 웃음을 짓는다. 안안 리는 이내, 자신의 고스트캐처를 내팽개치고 복도 어딘가로 도망간다. 광둥어로 ‘살려줘!’ 소리가 울려퍼진다. 레굴루스만 사고를 치는 줄 알았는데... 안안 리도 만만치 않구나.
그때, 카메라 셔터음이 울린다. 찰칵.
“나이스 캐치. ‘숲의 문지기와 도망가는 나무꾼.’”
클릭이 어느새인가 우리 옆에 떠 있다. 그가 드루비스씨에게 사진을 한 장 건넨다.
“완드를 깎으면서 노래를 부르는 당신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완드 공방의 아일랜드인.’ 이게 제목이에요.”
-끝-
오 오랫만에 올라왔네 선개추 후정독
재밌게 잘 읽었어요
아무 생각 없이 배치했던 달빛 부두가 실제로 황무지에 존재하는 건물로 나오니까 룽하네
"필요한 기록"도 공중제비 돌았음
세계관 이해도랑 애정 진짜 미쳤는데 내가 블루포치 사장이었으면 얘랑 계약해서 공식소설 집필시켰다..
릴리아 전시규격은 아마 다리 구부리고 있는 채로 재서 그럴 텐데 이렇게 보니 실제로 키가 작다는 설정이어도 갭모에네 ㅋㅋ 어차피 빗자루 타면 누구보다 시점 높아진다고 ㅋㅋ
파비아가 릴리아랑 동일 키인 것도 파비아가 앉은 자세라 그런 것 같아. 벌룬파티 키도 엄청 크게 나오는데, 헬륨풍선 높이까지 키에 포함시킨 것 같거든. 애들끼리 상호작용 최대한 시키는 걸 목표로 하고 있고 차팔이 형이 애들 개인스토리 좀 많이 풀어줬으면 하는 바람이야. 덕분에 열심히 쓰고 있다 고맙다
진짜로 이겜 캐릭 한명한명 배경설정 정교하지만 도감에서밖에 못보는데 이런 식으로 서사 갖춰서 조명해주고 스토리에서 못만나는 애들끼리 상호작용하는 거 보니까 개재밌슴 100편까지 써주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