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전에
1. 찰리 스토리가 나온다고 해서 기다렸다가, 찰리 스토리를 보고 쓰기 시작함.
2. 최대한 공식설정을 참조함. 때문에 리버스1999의 설정을 좋아하는 릾붕이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고 씀. 단, 어디까지나 2차 창작인 만큼 설정 오류가 존재할 수 있음.
3. 레이비스의 ‘낑낑’ 같은 대사나 찰리와 셰익스피어의 연관점, 닉 보텀이 국립 극단에서 잠깐 일을 했던 것 등은 공식 요소임. 다만, 셰익스피어에 대한 찰리의 견해는 창작의 요소.
4. 시리즈 전작의 내용들이 독해에 도움을 줄 수 있으므로 읽는 것도 추천함.
5. 국립국어원 표준보다 게임 내 표기를 우선시함. 단, 오탈자가 존재할 수 있음. 폰으로 쓴 거라 미리 양해를 구함. (~씨는 일부러 붙여 쓴 것)
6. 다들 재밌게 읽어줬으면 좋겠어. 필력이 모자라서 미안하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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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10:34]
“주군, 찰리 단장은 저쪽 편에 있습니다. [새벽에는 무대 위에서 폭군의 가면을 쓰고, 지금은 땀 흘리는 농부의 가면을 쓰고 있죠.]”
앞말은 남자의 목소리. 뒷말은 여자의 목소리. 히스테리성 성격장애. 아니, 메스머의 말을 빌리면, 연극성 성격장애라고 하는 게 옳을지도. 광대씨는 언제나 극장 위에 선 사람 같다. 지금은 팔을 크게 휘두르며, 찰리를 가리킨다.
고개를 끄덕인다. 광대씨는 다른 볼일이 있다며 숲 너머로 사라진다. 드루비스씨의 정원, 숲을 지나면, 작은 밀밭이 나온다. 트렉터도 있고, 다른 농기계들도 있다. 안 어울리는 커다란 천막도 있다. 찰리 극단의 빨간색 천막이다.
굳이 나서서 이곳을 관리하는 찰리. 농기계들은 쓰지 않는다. 낫과 괭이. 그녀에겐 그 정도면 충분할 거다. 극단에서 입은 옷은 던져두고, 편안한 옷을 입은 그녀. 리사와 루이스의 옷차림이 떠오른다. 빨간 옷에 흰색 스트라이프. 멜빵청바지. 그리고 밀짚 모자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농부의 옷차림이다.
“찰리?”
찰리에게 말을 건넨다. 그러나 농사일에 집중하는 그녀다. 듣지 못한다. 그녀는 밀로즈씨... 그러니까 레이비스씨에게 말을 건넨다. 황금빛 밀밭을 허수아비처럼 수호하는 레이비스씨. 물론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정상적이진 않다.
“레이비스씨! 저기,., 저기 참새예요!”
“크르릉, 월월!.”
레이비스씨는 의사였을 적의 언어 능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어쩌면 피클즈와 말이 더 잘 통할지도. 다급한 찰리의 부름에 레이비스씨가 팔을 높이 치켜든다. 개처럼 짖기도 한다. 그러나 참새는 레이비스씨가 만만하다는 듯, 밀을 주워먹기 바쁘다.
“낑낑.”
레이비스씨의 볏짚 머리가 울상이 된다. 풀죽은 그를 바라보던 찰리가 무언가 결심한 듯, 표정을 바꾼다.
“네 이놈! 무엄하구나!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무대 위의 성난 폭군처럼. 아니, 성난 농부처럼. 찰리는 괭이를 이리저리 살벌하게 휘두른다. 그제서야 참새가 놀란 건지 하늘 어딘가로 달아난다. 참새를 쫓아낸 찰리.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휴, 괜찮아요, 레이비스씨. 참새를 쫓아냈어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황무지에 바람이 살랑인다. 밀밭이 바람결을 따라 기울어진다. 풀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마치 파도 소리 같다. 레이비스의 기분이 풀린 걸까. 볏짚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런데, 그 순간 레이비스와 내 눈이 마주친다. 그가 나를 볏짚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레이비스... 레이비스... 야오오오옹.”
레이비스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찰리. 곧, 나와 눈이 마주친다. 그러자 찰리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가 황급히 괭이를 내려놓고 허리를 숙인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타임키퍼씨가 오신 줄 몰랐어요. 오... 옷차림도 이런데...”
“괜찮아, 찰리. 일하는 중인데 방해해서 미안해.”
찰리의 말에 답한다. 그러자 찰리가 다시 괭이를 주워든다. 소극적인 자세로 레이비스씨의 옆에 선다. 레이비스씨가 내게 손을 흔든다. 고개를 살짝 숙여 목례한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이세요? 타임키퍼씨. 혹시 베이비 코엔이 필요해서 오신 건가요?”
고개를 젓는다. 9월 11일. 한 달마다 있는 날. 오늘 내가 이곳까지 온 건 찰리에게 말을 전하기 위해서다. Z씨와 진행 중인 접견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다른 용무도 있다. 이야기의 전말은 이랬다.
[9/4 11:22]
“타임키퍼, 이번 접견은 정말 제가 참관해도 되는 건가요?”
“응. 물론이지.”
재단의 회색 건물. 그 중에서도 본청. 창백한 햇살이 대리석 복도를 비춘다. 나와 소네트는 Z씨의 집무실로 향하고 있다. 은근히 설레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다. 그녀가 자신의 주황 머리를 베베 꼬면서 말한다.
“사실 궁금하긴 했거든요. 접견이 끝나고 나면, 당사자들끼리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친해지는데, 어떤 과정이 있는지 늘 궁금했어요.”
사실 소네트를 접견에 들일 생각은 없었다. 부정의 의미가 아니라 ‘무’의 의미다. 들이기 싫었다는 게 아니란 뜻이다. 접견은 개인적인 사유의 유출을 막기 위해, 형식적으론 나와 접견자들만 동행한다. 접견이 끝나고도 일화에 대해선 따로 알리지 않는다. 오로지 Z씨에게 보고할 뿐이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예외였다. Z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소네트’를 참관시키라고 연락했다. 게다가 곧 있을 회의에서 접견의 후보자를 알려줄 테니, 나와 소네트에게 자신의 집무실로 오라고 말했다.
“마법 같은 건 없어. 단지 다들 자신감을 얻었을 뿐이지.”
“자신감이라...”
소네트는 마도학자들의 대인관계에 대해 깊이 고찰하는 모양이다. 일단... Z씨의 집무실 앞까지 왔다. 검은색 문. 하얀색 문손잡이.
“아, 타임키퍼. 제가 노크할게요.”
노크 안 하는 버릇은 고쳐지질 않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Z씨의 집무실인데. 아무튼 소네트가 대신 노크한다. 살며시. 똑. 똑.
“네. 들어오세요.”
문 안에서 허락의 목소리가 들린다. 문손잡이는 내가 돌린다. 먼저 방에 들어선다. 소네트가 그 뒤를 따른다. Z씨는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책상 위엔 김이 피어오르는 Z씨의 머그컵. 그리고 손님용 찻잔 두 개.
“타임키퍼의 제1 조수 소네트입니다.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하길. 타임키퍼와 함께 Z씨의 집무실에 방문하라고 하여 이렇게 왔습니다. 현재 시각은 오전 11시 26분입니다. 마크씨는... 안 계시군요.”
오랜만에 Z씨의 앞에 서서 그런가. 소네트가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 우려와 달리 Z씨는 그렇게 격식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아니다. Z씨가 머쓱한 웃음을 짓더니 우리에게 말한다.
“마크는 요즘 출장 때문에 바쁘거든. 의자는 오른쪽 서랍 옆편에 있네. 접이식 의자야.”
“네, 감사합니다.”
소네트가 격식 있는 자세로 딱딱한 발걸음을 옮긴다. 접이식 의자 두 개를 가져와서 Z씨의 맞은편에 놓는다. 그리고 펼친다.
“앉게나, 버틴, 소네트.”
자리에 앉는다. 소네트도 이어서 앉는다. Z씨가 차를 건넨다. 무슨 차일까.
“갈기모래가 티베트 원주민들에게 얻어온 차라더군. 꽤나 향이 좋아.”
내가 먼저 마시지 않으면, 소네트는 절대 입에 대지 않을 거다. 때문에 먼저 마신다. 무슨 차지? 특별한 맛은 아니다. 홍차의 일종 같다. 그런데 묘한 박하 향이 난다.
이어서 소네트가 한 입 마신다. 그녀는 마음에 들었는지 눈을 휘둥그레 뜬다.
“맛있는 차네요. Z씨, 감사합니다.”
소네트가 또 다시 고개를 숙인다. Z씨가 이만하면 됐다 싶은 건지 손사레를 친다.
“입맛에 맞았다면 됐네. 그보다, 오늘 자네들을 여기로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접견 때문이 맞네.”
역시, 접견 때문이었나.
“버틴이 써준 보고서를 상부에선 꽤 괜찮은 반응으로 보고 있어. 인간 사회에서도 경직된 관계와 업무 효율은 점점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는 편이니까. 감정의 컨트롤만 된다면, 마도학자들의 친밀도를 쌓는 게 확실히 업무 효율에 도움이 된다고 보더군.”
Z씨가 말을 하다 끊고, 나를 본다. 눈을 깊이 마주친다. Z씨의 까만 눈동자엔 무엇이 담겼을까. 그녀는 머그잔 속 차를 한 입 마시더니, 내게 말한다.
“그동안 수고해줘서 고맙네. 버틴. 앞으로도 더 부탁하네.”
“네, 감사합니다.”
정작 나보다 기쁜 건 소네트인 것 같다. 그녀의 얼굴에 기쁨이 잔뜩 드러난다.
“그런데, 이번 접견 대상도 정해진 건가요?”
내가 묻는다. 앞으로의 일 얘기로 돌아올 참이다. Z씨는 안경을 고쳐 쓰더니 서랍에서 서류를 몇 장 꺼낸다.
“소네트, 자네는 오페라에 대해 잘 알고 있나?”
그러자 소네트는 제1 방어선 학교에서 있었을 적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모양이다. 턱을 매만지면서 그녀가 답한다.
“네... 아무래도 이탈리아와 연관이 있기도 하고. 꽤 흥미가 있어서 공부를 많이 했었어요. 16세기 말부터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음악극을 말씀하시는 거죠?”
유감스럽게도 나는 잘 아는 바가 없다. 학교에선 공부를 거의 안 했으니까. 그래도 오페라를 본 적은 있다. 아무래도 유명한 극이고, 마도학자 배우들도 있다 보니.
“자네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군.”
Z씨가 나를 보며 말한다. 고개를 끄덕인다. 자세히 모르는 건 사실이니까.
“그런데, 접견과 오페라가 어떤 관계가 있는 건가요? Z씨.”
소네트가 Z씨에게 묻는다. 마침 내가 궁금했던 부분이다. Z씨가 묘한 표정을 짓는다. 표정에 무엇이 묻어나오는 지 모르겠다.
“이번에 재단의 의원들이 한 가지 안건을 냈어. 폭풍우로 인해 수많은 역사와 문화가 유실되고 있는 상황이야. 그러다 보니 그것들을 보존하자는 움직임이 예전보다 커지고 있어. 그런데... 단순히 자료의 보존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것 같아.”
Z씨가 눈을 감는다. 뭔가 뒷말이 더 있는 것 같다. 차분히 기다린다. 곧이어 그녀가 말을 잇는다.
“이번에는 ‘문화’의 보존에 대한 이야기일세. 역사와 문화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니까. 문화도 어찌 보면 역사의 한편이라고 볼 수 있겠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재단에서 ‘오페라’라는 예술의 형태를 보존하려고 하네. 그것도 직접 오페라를 열어서 말이지.”
오페라를... 연다고?
“후원은 소더비 가문과 메스머 가문... 등등. 여러 곳에 이미 말을 해둔 모양이야. 곧 오페라를 열어야 하고, 재단의 수뇌부들도 많이 참석하게 되겠지. 문제라면, 음악이나 연극과 밀접한 마도학자가 굉장히 흔치 않다는 점이네.”
Z씨가 눈을 뜬다. 피곤한 눈이다. 확실히... 피곤한 일이다. 높은 사람들의 자기만족으로 밖에 들리지 않으니 말이다.
“유감이지만... 얼마 없는 인재들 중에서도 대부분은 타임키퍼 소대에 존재하지. 자네도 알다시피... 자네 소대에는 찰리의 극단이 존재하고, 또한 보이저도 있잖나. 물론 음악 쪽은 보이저 혼자만 맡게 하진 않겠지만...”
그러자 듣고 있던 소네트가 옆에서 입을 연다.
“그런데... 찰리씨는 오페라와는 크게 관계가 없어요. 오페라는 연극의 하위 분류라고 볼 수 있음에도 엄연히 다른 형태의 예술이니까요. 게다가 보이저씨는 음악을 연주할 줄은 알지만...”
소네트의 걱정이 무엇인진 알겠다. 찰리의 입장에선 해본 적도 없는 오페라를 해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보이저의 경우는 문제가 더 크다. ‘연주’를 할 줄 아는 것과 ‘합주’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미 끝난 사항이야. 소네트. 마크와 내가 막아보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우리들조차 뒤늦게 안 탓이 커. 때문인지 마크에게 없던 출장이 생기기도 했고. 무쪼록 그 부분은 미안하게 생각하네.”
...
“이런 연유로 이번 접견은 보이저와 찰리로 진행해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오페라에 대한 지식이 있는 소네트, 자네가 참관인으로서 필요하고.”
그녀가 말을 마치고 자료를 건넨다. 보이저와 찰리에 대한 자료. 그리고 오페라에 대한 자료까지 있다. 장소와 시간까지. 장소는 재단 내 대강당. 그리고 시간은... 9월 31일 오후 6시.
“왜 하필 찰리인가요. 배우라면 마릴린씨도 있고, 그 외의 인간 배우로도 충당할 수 있을 텐데요.”
내가 묻자, Z씨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말할 게 있는 듯, 답을 시작한다.
“이번 오페라는 ‘주세페 베르디’의 ‘맥베스’일세. 재단 내에서의 첫 오페라고,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극본이지.”
주세페 베르디? 맥베스?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때, 소네트는 옆에서 들어본 적이 있다는 듯, Z씨의 말을 대신 잇는다.
“베르디는 1800년대의 작곡가예요. 1847년에 맥베스를 처음 공연했고, 프란체스카 마리아 피아베가 대본을 썼죠. 맥베스는... 그러니까... 셰익스피어의 이야기가 원조예요. 그가 맥베스 국왕의 일생을 희극으로 만들어냈거든요.”
셰익스피어... 설마... Z씨는 소네트의 말이 필요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자신이 하던 말을 잇는다.
“알다시피 찰리와 셰익스피어는 깊은 연이 있네. 그녀가 바로 셰익스피어의 외손녀니까. 윗선의 사람들도 당연히 알고 있는 내용이고. 이왕 셰익스피어의 내용을 토대로 한 오페라가 진행된다면, 찰리의 연기로 보고 싶은 것도 나름의 이유겠지.”
불만사항이라면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의미는 없을 것이다. Z씨가 이미 노력했을 거다. 그럼에도 윗선의 횡포를 모두 막아내진 못한 거고. 어쩔 수 없다. 내 선에서 어떻게든 해결하는 수밖에.
“괜찮겠어요? 타임키퍼?”
소네트가 걱정스런 눈으로 묻는다. 솔직히 자신은 없다.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아마도.”
[9/11 11:00]
그래서 이곳에 있다. 찰리의 앞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베르디의... 아무튼 그런 내용들을 내가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 설명하기 어려우니, Z씨가 소네트를 참관시킨 거겠지.
찰리는 묘하게 겁먹은 눈치다. 하기야 내가 이렇게 불쑥 나타나는 경우가 없으니.
“혹시... 저희 타임키퍼씨 소대에서 잘린 건 아니죠?”
...
“아니야. 설령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내가 막을 거야. 약속해. 그런 건 걱정하지 마.”
1650년대에 활동한 찰리. 그녀가 오페라를 알까. 안다고 해도 할 수 있을까. 소네트에게 속성으로 듣기론, 오페라는 주로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발전했다. 게다가 찰리가 활동하던 곳은 호국경으로부터 예술 박해를 받던 시기의 영국이다.
희망이 없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해야겠지. 일이고, 어쩌면... 근래 극장 위에 설 일이 없던 찰리에겐 기회일 테니까.
“찰리, 혹시 무대에 오르고 싶은 생각은 없어?”
내가 묻자 찰리는...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전혀요. 저는 이렇게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게 좋아요. 농사를 하고... 소 젖을 짜고... 이런 게 좋은데... 좋은데... 설마... 아니죠?”
...
“일단, 오늘 접견이 있어. 너도 소문을 들었겠지만, 매월 11일에 진행되는 재단의 정식 임무야. 오늘은 너와... 보이저가 접견을 하게 될 예정이고.”
찰리는 ‘보이저’라는 이름에 눈을 휘둥그레 뜬다. 상상도 못한 일인 듯, 그녀가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한다.
“보... 보이저씨랑요? 접견은... 소더비씨가 말해주셔서 알고 있었지만... 보이저씨는...”
납득이 안 되는 반응은 아니다. 보이저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아니, 안 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도 그녀와 함께 생활하면서, 몇 마디 들은 게 없다. 심지어 찰리는 보이저와 외근 임무가 겹쳐서 간혹 나갈 일이 있다. 같이 일을 한 사이임에도 저런 반응이 나온다는 건...
“찰리, 보이저랑 얘기해본 적 없어?”
내가 묻자 찰리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눈가가 빨개진다. 울 정도의 일인가 싶지만...
“괜찮을 거야. 보이저에겐 내가 잘 말해놓을게.”
그렇게 말해둔다. 조금이나마 그녀가 안심했으면 한다. 하지만 찰리는 진정하지 못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타임키퍼씨는... 보이저씨랑 얘기해본 적 있으세요?”
...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약간의 거짓말을 얹는다.
“보이저는 말 수가 적을 뿐이야. 얘기해본 적은 있어.”
“무슨 얘기를 했어요? 저... 정말 감이 안 잡혀서...”
“그야... 그... 티폰 만화 영화에 관한 이야기였어.”
말도 안 되는 거짓말. 소더비와 보이저가 티폰이 나오는 영화를 본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또한 나는 그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다. 다만 내 목에서 나오는 거짓말은 이 정도뿐이다. 그나마 보이저와 친한 소더비나... 미스 라디오에게 미리 언질이라도 구할 걸 그랬나. 찰리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기가 어렵다. 이 정도면 그녀도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눈치채리라.
“타임키퍼! 보이저씨를 모시고... 어?”
그때, 뒤에서 소네트의 목소리가 들린다. 숲 방향에서 소네트. 그리고 학생복 차림의 보이저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보이저는 이곳의 방문이 처음인 듯,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그녀는 곧 나와 찰리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본다. 말 없이 그녀가 손을 흔든다.
“안녕, 보이저.”
인사를 건넨다. 그러자 보이저가 조용히 미소를 짓는다. 바람이 분다. 보이저의 우주빛 머리카락도. 소네트의 주홍 머리카락도. 찰리의 은발도. 레이비스씨의 짚머리도. 전부 바람에 휘날린다. 톱햇을 붙잡는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아... 앗! 제 모자가!”
그때, 찰리의 밀짚 모자가 바람에 날아간다. 레이비스씨가 급히 손을 뻗는다. 닿지 않는다. 찰리가 어쩔 줄 몰라한다. 밀짚 모자는 바람을 따라 점점 멀리 간다. 소네트가 자신의 완드를 꺼냈을 무렵, 보이저의 손에는 어느새 바이올린이 있다. 그녀가 연주를 시작한다. 나는 이 음악이 무엇인진 알 수 없다. 하지만 낯익은 음악.
바이올린 소리와 함께 하늘에 성운이 나타난다. 반짝이고 흐릿한 성운. 그 사이로 투명하고 작은 손 하나가 내려온다. 그것이 찰리의 밀짚모자를 낚아챈다. 곧, 성운이 우리 쪽으로 움직인다. 손도 우리 쪽으로 향한다. 그 손이 보이저의 눈앞까지 내려온다.
보이저의 바이올린이 순간의 반짝임과 함께 사라진다. 그녀가 찰리의 밀짚 모자를 받는다. 성운과 투명한 손이 함께 사라진다.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 1악장이었어요. 대단해요 보이저씨! 독주였지만 완벽한 연주였어요.”
소네트가 학교에서 배웠을 것 같은 지식을 말한다. 소심한 박수도 함께다. 보이저는 살며시 웃으며 찰리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그녀의 모자를 건넨다.
“어... 미... 미안해요!”
찰리가 감사 대신 사과를 한다. 바람이 멎는다. 순식간에 정적이 흐른다. 보이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찰리가 벌벌 떨다가 허리를 숙인다. 그 다음 보이저가 내민 모자를 받는다. 그녀는 작은 모자로 자신의 얼굴을 최대한 가린다.
“그... 그게...”
찰리가 우물쭈물하는 동안, 보이저가 자신의 손을 건넨다. 찰리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찰리, 악수하자는 뜻이야.”
내가 말한다. 그러자 보이저가 고개를 끄덕인다. 찰리는 순간 총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멍해지더니, 곧 손을 내민다. 두 사람이 쑥쓰러운 악수를 한다. 소네트가 다시 박수를 친다.
“레이비스... 멍멍! 야옹! 짹짹!”
레이비스씨가 기쁜 건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정확히는 의성어에 가깝다. 그러자 보이저가 레이비스씨에게도 손을 건넨다. 레이비스씨도 밀짚 손을 건네고, 두 사람이 악수한다. 보이저가 말한다. 말... 일까. 아주 가녀리고, 깊고, 바이올린 선율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멍멍. 야옹. 구구구.”
[9/11 12:50]
소네트는 두 사람을 데리고, 접견실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나는 먼저 집무실로 향했다. 서류 몇 가지를 챙겼다. Z씨에게 받은 서류다. 오페라에 관한 자료, 두 사람의 접견 내용을 담을 노트. 악보와 대사집 등등.
전보다 많아진 서류뭉치. 생각보다 무겁다. 양이 꽤 되는 모양이다. 전부 읽어보진 않았다. 극본이나 악보는 내가 봐도 알 수 없다. 방어선 학교에서 노래를 불렀을 때처럼, 기초적인 악보만 볼 수 있다.
... 안 좋은 기억이다. 그 시절은.
접견실로 가는 복도는 조용하다. 여행가방의 로비도 오늘은 비었다. 물론 테라스 밖, 정원에 물을 주는 드루비스씨가 있다. 다만 그녀는 오늘따라 심란한 모습이다. 꽃이 죽어가기라도 하는 걸까. 그래서 인사를 하지 못했다.
보이저. 그리고 찰리. 보이저가 과연 오늘은 입을 열까. 찰리. 그녀는... 20세기의 사람들과 어루지낼 수 있을까.
접견실 문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연다. 아, 노크. 하지만 이미 문은 열렸다.
“어서오세요, 타임키퍼.”
열린 문 사이로 소네트가 반갑게 인사한다. 그러다 말고 화들짝 놀라서 일어난다. 그녀가 내게 다가온다.
“무겁진 않으셨어요?”
그녀가 내 서류들을 받는다. 고개를 저으며 답한다.
“괜찮아.”
소네트가 서류를 정리해서 테이블 위에 놓는 동안, 나는 그녀들의 얼굴을 살핀다. 보이저는 여전히 소련의 교복 차림. 반짝이는 금별 머리장식. 그리고 우주를 담은 것 같은 깊은 눈동자. 찰리는... 복장을 갈아입었구나. 늘상 입는 연극 복장이다. 중절모에 선명한 하늘빛 부브리 깃털. 그리고 망토.
보이저가 내게 손을 흔든다. 찰리는 조용히 노트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부끄러움을 잘 타는 소녀. 말이 없는 소녀... 아니, 존재. 두 사람의 접견.
“접견을 시작할게.”
자리에 앉는다. 소네트가 서류 정리를 마쳤다. 펼쳐진 서류 중에서 일단은, 접견 보고용 용지를 가져간다. 품속에서 펜을 꺼낸다. 두 사람에게 말을 잇는다.
“오늘로 6번째 접견이야. 보이저, 그리고 찰리. 두 사람이 대상이고. 소문을 들어서 알겠지만, 접견은 마도학자들 내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함이야. 외근 임무에서 최대한의 팀워크를 발휘하기 위해선, 마도학자들 간의 호흡이 중요하니까. 특히, 우리 타임키퍼 소대는 단독 임무가 적은 관계로... 더더욱 이런 요소가 필요하고.”
숨을 잠시 고른다. 평소라면 이 정도 브리핑에서 끝났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오늘은 확실한 목표가 있으니까.
“다만 오늘 접견은 좀 더 특별해. 재단 내에서 그...”
뭐였더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베스였는데. 그러자 옆에서 소네트가 눈치껏 대신 말해준다.
“주세페 베르디의 맥베스예요. 이번에 재단에서 정식으로 오페라 공연을 하기로 했어요. 그 무대 위에 찰리씨와 보이저씨가 올라가줬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때문에... 그것과 관련돼서 협의드릴 것도 있고...”
... 소네트도 이런 말을 하기엔 뭔가 미안했던 모양이다. 솔직히 좋게 보일 모습은 아니다. 오페라니, 문화 보존이니. 그런 게 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까. 윗사람들의 사리사욕 정도로 비춰지진 않을까. 몰랐던 건 아니다. 보이저면 몰라도. 찰리에 관해서 몰랐던 건 아니란 뜻이다. 그녀가 무대에 오르는 걸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 정도는. 그럼에도 일이라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을 해야 한다는 게. 양심을 찌르는 느낌이다.
그때였다. 어느샌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 손을 누군가가 잡아준다. 분명 사람의 손과 닮았지만 미묘하게 차가운 감촉. 그럼에도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손.
“괜찮아요.”
보이저가 입을 연다. 그녀의 ‘문장’을 듣는 건 이번이 거의 다섯 번째다. 보이저의 말에 소네트도 찰리도 놀란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보이저의 목소리는 거의 들어보지 못 했을 테니까.
“고마워, 보이저.”
내가 답하자, 보이저가 다시 입을 닫고 조용히 미소만 짓는다. 그러다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아까처럼 자신의 바이올린을 소환한다. 약간의 반짝임과 함께 소환된 바이올린. 그녀가 연주를 한다. 나는 무슨 연주인지 알 수 없다. 찰리도 이것이 무슨 음악인지 알 수 없는 것 같다. 처량하면서도. 어떤 남자의 절규가 들릴 것만 같은, 보이저라면 평소 연주하지 않을 것 같은 음악.
“이건... 보이저씨?”
놀란 건 소네트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놀라면서 나도 ‘설마’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설마. 이게...
보이저가 고개를 끄덕인다.
“타임키퍼, 찰리씨. 이건...맥베스의 아리아인 ‘피에타 리스페토 아모르’ 악보예요. ‘연민도, 존경도, 사랑도.’라는 뜻이죠. 보이저씨는 이걸 어떻게...”
소네트가 휘둥그런 눈으로 보이저를 바라본다. 그녀는 머릿결을 넘기면서, 검지 끝을 입술에 대며 치켜세운다. 나는 저것이 무슨 제스처인지 안다.
“비밀.”
그녀가 말한다. 그러고선 산들바람처럼 머리를 좌우로 조금씩 흔든다. 무언가 기쁜 모양이다. 무쪼록... 보이저가 이 음악을 안다면 나로선 다행이다. 다행은 다행인데... 수 십 가지의 문제 중, 한 가지만 해결됐을 뿐이다.
두 사람의 의향.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갖는 마음.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 조금 들뜬 마음을 진정시킨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찰리, 보이저. 일단은 먼저 접견을 하자. 이후의 얘기는 접견 뒤로 미루고.”
내가 입을 열자, 보이저는 자신의 바이올린을 소멸시켰다.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찰리는 자신의 노트를 자신의 무릎 위에 덮듯이 내려놓는다.
“그런데... 저기... 보이저씨는 말을 할 수 있는 건가요?”
찰리가 묻는다. 보이저 치곤 오늘 꽤나 많이 말했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확신이 안 서는 모양이다. 보이저는 찰리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본다. 찰리는 여전히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시선을 내린다.
두 사람의 접견. 생각보다 쉽지 않다. 막막하던 참에 소네트가 입을 연다.
“당연히 보이저씨도 말을 하죠. 단지... 말 수가 적을 뿐이에요.”
UTTU 잡지 인터뷰에서도 보이저편에선 골머리를 앓았다. 오죽하면 판도라 윌슨씨가 푸념을 늘어놓을 정도였으니. 오늘만이라도 그녀가 말을 많이 하게 할 순 없을까.
“보이저, 너는 찰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너무 원론적인 질문이었을까. 정작 보이저는 미소를 지으며 찰리를 바라볼 뿐이다. 아마도...
“좋게 생각하고 있구나.”
대충 그런 뜻이겠지. 어쩌다 찰리를 봤는데,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갑자기 입을 연다.
“저... 저는... 보이저씨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 물어본 건 아닌데. 찰리가 그렇게 말하자 보이저가 부끄러운지... 얼굴이 상기된다. 보이저도 시선을 내리고, 찰리도 시선을 피한다.
“그... 그러면 마도술에 대한 이야기는 어떨까요? 저는 제 완드로 시를 쓰면, 그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어요. 이를 테면 이렇게요.”
소네트가 그녀의 완드, 유리펜을 꺼낸다. 너무 위험한 마도술만 발동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소네트니까...
“머나먼 이국 땅에서는 오직 달만이 나의 벗이로구나.”
그녀의 영창과 함께 탁자 위에 작은 달이 떠오른다. 그녀의 마도술은 물리적인 형체를 만들 수 있다. 그녀가 만들어낸 작은 달이 조명 빛을 받으며 은은하게 빛난다. 곧이어 흩어지듯 별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찰리씨는 어떤 마도술을 쓸 수 있나요?”
“저는... 보잘 것 없는 환상을 보여줄 뿐이에요.”
찰리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녀의 마도술은 인물 프로필이 담긴 서류에도 적혀 있다. ‘유의미할 정도의 정신적 외상을 입힐 수 있는 환상.’ 그녀는 얼굴에 다른 가면을 쓰고 연기함으로써 환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주로 연극의 무대장치로서 활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를 테면 가짜 화염을 만들어낸다거나, 가짜 천둥. 가짜 폭풍. 소네트가 시의 이미지를 물리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생각하면, 꽤 다른 분야의 마도술이다.
“그렇군요. 마치 갈라보나씨의 마도술 같은 걸요?”
소네트가 말하자, 찰리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부정한다.
“아녜요. 저는... 그저 환상일 뿐. 갈라보나씨처럼 환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능력은 없어요. 저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닌 걸요.”
그녀의 낮디 낮은 자존감이 언어에서 느껴진다. 소네트가 뭐라고 말해야 할 지 어려워할 무렵, 보이저가 바로 옆에서 찰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보이저씨?‘
찰리가 보이저를 바라보며 이름을 부른다. 보이저는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이다. 아마 위로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보이저는... 악기 연주를 토대로 환상을 만들어낼 수 있어. 어떻게 보면 찰리 너와 가장 상통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보이저의 마도술. 그걸 내가 대신 설명해준다. 물론 보이저의 마도술은 다른 마도학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녀는... 마도학자라고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사람이 아닌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보이저씨는 연주도 잘하고, 소네트씨는 시를 잘 쓰죠. 저는... 잘하는 게 없는데...”
“그렇지만 찰리씨는 무대 위에서 연극을 할 때, 연기를 정말 잘하잖아요!”
“그것도... 제 진정한 모습은 아닌 걸요. 어쩌면 핏줄 때문에 그나마 할 수 있는 걸지도 모르고...”
찰리의 우울이 시작된다. 소네트가 또 다시 난처한 얼굴을 보인다. 애매한 상황이 지속된다. 실마리가 없을까. 핏줄... 핏줄?
“찰리, 셰익스피어가 너의 외조부지. 그분은 어떤 분이셨어?”
핏줄이라는 실마리로 어떤 질문이든 해본다. 이런 부류의 사람에겐 본인에 대한 질문보단 주변에 대한 질문이 낫다. 찰리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 고개를 약간 숙이고 턱을 어루만진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답한다.
“네... 그게... ‘희극’이고, 그저 창작물이었지만... 할아버지는 여느 마도학자가 그러했듯 희극에 광적으로 몰입해 있었어요. 닉 보텀씨도 어쩌면 그 희생자일 테고요.”
...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보이저도 소네트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찰리는 곧, 주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알아챈 것 같다. 이야기를 잇는다.
“한 여름 밤의 꿈이라는 ‘희극’이 있어요. 외할아버지가 쓴 작품이죠. 외할아버지와 닉 보텀씨가 활동하던 시대는 제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의 시대예요. 외할아버지의 희극을 토대로 닉 보텀씨는 국왕 극단에서 연기를 했고... 마치 저주와도 같은 마도술로 인해 당나귀 머리로 변해버리셨죠.”
레이비스씨. 보텀씨. ‘저주’라고도 볼 수 있는 마도술로 자신의 형태가 변해버린 마도학자들. 그들은 이들 말고도 몇몇 존재한다.
“위대한 작가였을지는 몰라도 좋은 분이셨을지는... 모르겠어요. 사실 외할아버지가 셰익스피어라는 것도 저는 너무 늦게 알게 돼서...”
보이저와 소네트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어쩌면 나도 그랬으리라. 찰리에게 셰익스피어란 작가는 좋은 사람이... 맞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그 핏줄을 자랑스러워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곧 있을 오페라에서 그녀는 셰익스피어의 핏줄로서 연극을 해야 할 수도 있다. 과연 찰리는 이에 동의할까.
설명을 했다. 보이저와 찰리에게. 두 사람에게 오페라 제의가 들어왔고, 재단의 윗선에선 두 사람이 함께 오페라에 출연하길 원한다고. 보이저에겐 음악을, 찰리에겐 배우를 맡기고 싶다고.
소네트가 탁자 위에 분류한 서류도 함께 보여주었다. 보이저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서류를 봤지만, 찰리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불안감에 휩싸인 얼굴이었다.
“찰리, 맥베스를 알고 있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데.”
내 물음에 찰리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소심하다. 알긴 안다는 뜻 같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쉬운 일이 될 건 아니다. 영어로 연기했을 그녀가 오페라를 한다는 건 ‘이탈리아어’로 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익숙치 않은 언어로 잘 알지도 못하는 연극을 ‘오페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오페라는 기존의 연극과 달리 ‘노래’로 서사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아요. 영국에서 연극을 하던 찰리씨에겐...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소네트가 말한다. 설명이 충분할지는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동의를 구해야 한다. 동의를.
“찰리, 할 수 있겠어?”
그녀에게 묻는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그녀의 의사니까. 그리고 만일 그녀가 거절한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서 이들의 마음을 보호해야 한다. 그것이 내 역할이니까.
“저는...”
찰리는 금방 말을 잇지 못한다. 재단의 임무라는 압박감도. 나의 부탁이라는 점도. 동시에 그런 큰 무대 위에 올라간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단순한 연극이 아닌 ‘오페라’라는 점도.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거다. 머릿속에 생각이 든다. ‘거절’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
“저는... 못할...”
그때였다. 보이저가...
“찰리.”
그녀의 이름을 짧게 부른다. 찰리가 놀란 눈으로 보이저를 본다.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
“하지만 저는 버틴과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찰리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완벽한 문장 구사에 놀란 건... 찰리 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소네트도. 모두가 놀랐다. 동시에 보이저의 마음이 진심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녀가 입을 연다는 건 정말로 흔치 않은 일이다. 그리고 흔치 않은 만큼, 지금 했던 말은 모두 진심일 테다.
“찰리, 함께 도전하고 싶어요. 당신은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인 걸요.”
“보이저씨...”
보이저의 말에 찰리는 눈을 감는다. 5초간 침묵이 흐른다. 곧, 그녀가 자신의 노트로 얼굴을 가린다. 다시 3초가 흐른다. 그녀가 노트를 내린다. 드러난 얼굴에는 아주 당당한 표정을 가진, 다른 찰리가 있었다.
“핫. 그 어느 무대에 서 있건, 그 어느 관객이 나타나건, 사람들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내가 있어야겠지. 좋은 말이야, 보이저. 그 어느 곳이든, 나만을 위한 무대가 되리라.”
... 승낙... 인가?
“... 죄송해요. 죄송해요! 저만을 위한 무대란 건 거짓말이에요! 저만을 위한 무대가 아닌 모두를 위한 무대예요. 보이저씨도, 타임키퍼씨도, 소네트씨도... 그리고 다른 모든 분들도요.”
... 금방 돌아와버렸구나, 찰리.
“그러니까, 찰리. 오페라에 나가겠다는 거지?”
“네? 네... 그러니까...”
찰리는 맥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쩌면 가장 그녀다운 동의일지도 모른다. 소네트가 말 없이 입을 벌린 채, 박수를 친다. 보이저는 또 다시 바이올린을 소환하더니, 그녀가 가장 기분 좋을 때 연주하는 음악을 들려준다. 아마도...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런 이름의 곡이었다.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 1악장
[9/31 5:30]
9월 31일. 접견일로부터 고작 20일 남짓의 짧은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찰리는 이탈리아어를 소네트에게 배우고, 여러 시청각자료를 시청했다. 보이저는 찰리와 함께 맞추다가도 재단의 음악 극단과도 합을 맞춰야 했다. 들리는 이야기론 보이저의 ‘합주’는 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생각 이상으로 오페라의 준비는 순조로웠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렇다.
“솔직히 말해서 놀랐네, 버틴. 자네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확신이 없었거든.”
Z씨가 안경을 치켜세운다. 이곳은 재단 부속건물의 대강당이다. 창백한 재단의 건물들과는 다르게, 본격적인 예술의 전당 같이 생겼다. 나뭇결이 느껴지는 무대 단상과 레드카펫. 그리고 레드커튼까지. 넓다란 강당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즐비하고, 산란된 빛이 강당 전체를 밝게 밝힌다.
본디 임시 회견장으로 쓰였던 곳이다. 때문에 대강당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이번에 완전히 오페라 하우스처럼 만들기로 했는지, 예전에 왔을 때보다 상당히 변했다. 개조의 개조를 거듭한 덕분일까.
“저도 큰 확신은 없었어요. Z씨. 하지만 보이저가 찰리에게 용기를 줬죠.”
자리에 앉아, 닫힌 커튼 너머로 열심히 준비중일 그녀들을 상상한다. 묵음으로 마지막 리허설을 하고 있을 찰리, 바이올린을 테스트하고 있을 보이저.
“자네의 보고서에서 대충 파악했네. 보이저가 말을 하다니. 신기하더군.”
오른쪽 자리에 앉은 Z씨가 말한다. Z씨는 2층 귀빈석에서 관람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오히려 그녀는 내게 2층에 가서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나도 거절했다. 소네트와 나, Z씨는 강당의 중단 언저리에 앉았다. 곧, 재단의 인원들. 그리고 수많은 마도학자들이 강당 안으로 몰려들었다. 자리는 틈 하나 없이 붐볐고, 시간은 조용히 흘러만 간다.
“17시 59분. 곧 시작이에요. Z씨, 타임키퍼.”
소네트가 시간을 알린다. 톱 햇을 벗고, 무릎 위에 올려둔다. 뒷사람에 대한 배려다. 잠시 뒤쪽을 바라본다. 여행가방 안의 마도학자들에게도 전단을 나눠줬었다. 그들도 전단을 본 것인지, 외근을 나간 인원을 제외하곤 대부분 참석했다.
사교인처럼 정숙히 앉아 있는 드루비스씨. 레굴루스와 소란스레 떠드는 소더비. 레굴루스 머리 위에서 돋보기를 든 미스터 APPLe. 하품하며 보드카를 들이키는 릴리아. 헤드폰을 벗고 눈을 감고 있는 콘블룸. 피클즈와 책자를 들고 대화 중인 갈라보나씨. 에이시를 무릎 위에 둔 멜라니아. 화려한 옷차림으로 나란히 앉아 있는 테넌트, 이터니티씨, 센츄리온. 그 외에도 이곳저곳에 앉아 있는 타임키퍼 소대.
“타임키퍼 소대원들도 많이 참석했군. 이번 오페라가 성공한다면, 재단에서도 자네의 특혜를 더 많이 봐줄 수 있을 거야. 버틴.”
공연 시작 전, Z씨가 조용히 속삭인다. 곧이어 6시가 되고, 강당의 조명이 모두 꺼진다. 무대 위를 감춘 커튼이 걷히고, 단 하나의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찰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듣기를, 그녀가 맡은 역할은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 1인 2역이다. 성난 폭군과도 같은 연기에는 맥베스를 조종하는 맥베스 부인이 훨씬 어울리겠지만...
곧이어, 오페라가 시작된다. 어느 정도 각색을 마친 건지, 광대씨도 등장한다. 찰리의 극단원들도 함께다. 많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다들 뛰어난 연기력과 노래 솜씨를 가졌다. 찰리 역시도 마찬가지다. 처음으로 해볼 오페라임에도 그녀는 기 죽지 않고 자신의 노래와 연기를 이어나갔다. 무대 위는 찰리 극단의 마도술로 한층 더 화려해진 터다. 가짜 피가 마치 생생한 선혈처럼 흩뿌려지고, 예언을 하는 마녀들의 복장은 단순한 소품보다 한층 더 기괴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 몰입감이 생생하다. 찰리 극단만의 특징일 것이다. 무대 한편에선 재단의 음악극단과 보이저가 연기를 잇는다.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음악을 이어가는 다른 바이올리니스트와 다르게 보이저는 평온한 표정이다. 하지만 그녀의 바이올린 활은 어느 때보다 현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연극이 무르익고, 맥베스의 하이라이트 부분인 피에타 리스페토 아모르 차례였다. 극 초반의 맥베스 부인 파트 아리아도 해낸 찰리였다. 점차 폭군이 된 맥베스. 그가 가진 권력들이 결국, 부질없던 것임을 깨닫고 한탄하듯 부르는 아리아. 그것이 연민도 존경도 사랑도. 피에타 리스페토 아모르다.
극단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모두 바이올린을 멈추고, 보이저의 아련한 솔로가 시작된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걸맞는 알맞은 음악.
그런데...
관객들이 웅성인다. 반대로 목소리가 흘러나와야 할 무대는 고요하다. 찰리의 침묵으로 인해, 관객들이 소란스러워진다. Z씨가 눈을 가늘게 뜨고, 소네트는 안절부절 못한다. 그녀가 내게 묻는다.
“어떻게... 된 거죠? 찰리씨는?”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 아래의 찰리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다. 기억하기론 이 부분에서 찰리가 침묵할 이유는 없다. 남은 가능성은 하나다. 찰리의 평소를 담당하던 인격이 새어나온 것. 이대로라면 찰리가 도망가고 말 것이다. 위험하다. 이대로 찰리가 멈춰버린다면...
“Perfidi! All'Anglo contro me v'unite!”
... 뭐?
“타임키퍼, 보이저씨가... 이탈리아어를?”
소네트가 놀란듯 말한다. 놀랄 만하다. 그것은 전혀 격앙된 목소리도, 한탄스런 목소리도 아니었다. 보이저의 작은 목소리. 전혀 오페라에 어울리지 않는 일반인의 노래였다. 하지만 보이저는 분명히 또박또박 오페라 속 이탈리아어를 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바이올리니스트의 아리아에 관객석에선 이런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계획된 건가?”
“바이올리니스트인 줄 알았는데 노래도 하나 봐.”
어쩌면... 어쩌면 보이저가 만들어준 기회였다. 보이저가 노래를 멈추고 찰리를 본다. 생긋 웃는다.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만을 잇는다. 찰리는 멍하니 보이저를 바라보다가 기어코 눈물을 흘린다. 익숙하지 않았을 이탈리아어, 수백명의 관객, 셰익스피어의 핏줄. 찰리는 아마도 눈물과 함께, 그 모든 부담을 덜어놓기로 한 것 같다.
그녀는 보이저의 연주에 따라. 어쩌면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 가장 하이라이트인 아리아를 부르기 시작한다. 훨씬 처량하고. 훨씬 초연한, 진짜 배우의 목소리로.
“찰리의 아리아... 어쩌면 찰리와 보이저의 아리아일지도 모르겠군. 그게 ‘독창곡’이란 뜻의 아리아에 성립하는 문장인진 모르겠지만 말이야.”
Z씨가 나지막이 말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내 귀에만 작게 들렸을 뿐, 공연장 어디에도 퍼져나가지 못한다. 이미 공연장의 소리는 찰리와 보이저에게 압도되었고, 관객들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감히 말할 수 있다. 이 공연이 끝나면 분명,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질 것이라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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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엔 누굴 쓰지
이 집 맛집이네
디시가 긴 글 보기 좋은 플랫폼이 아니다보니 정독하는 애들 드물텐데 이 시리즈 각잡고 읽어보면 개재밌음 다들 저장함에 박아두고 나중에라도 읽었으면 좋겠다
정성추
재밌다 마도학자 다 다뤄줄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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