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의 햇살만으로는
두꺼운 구름을 뚫지 못해
어둠이 드리운 숲길에서
마차 하나가 우뚝 서있었다.
마차 주변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다양한 시도와 실패를 겪느라
땀에 흠뻑 젖은 마부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여
마차의 문 앞까지 다가간 마부가
목소리를 높였다.
"나, 나, 나리! 들리십니까?"
침묵.
마차 안의 사람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마부는 침을 삼키고 떨리는 목소리로
최대한 또박또박 말하려 노력했다.
"요전에 말씀드린 그 일이 벌어졌습니다!
별짓을 다 해봤지만, 말들이 겁에 질려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질 않습니다!"
침묵.
마부는 이어지는 침묵을 질책으로 느꼈는지
주절거리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말이라는 짐승은 워낙에 겁쟁이라 이러는
경우가 왕왕 있기 마련이다, 그래도 어지간하면
마부의 요구에 순순히 따르기 마련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최근 들어선 아무리 용을 써도
이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절대로
추잡한 핑계 따위를 대려는 게 아니다,
이런 외진 변경의 마부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자기 말들을 다루는 것뿐인데 오죽하면 이러겠느냐,
제발 너른 마음으로 이 곤경을 이해해달라,
높은 곳에 거하시는 주님께 맹세코
쇤네는 참말로 최선을 다했구먼유!
마부의 절박한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마침내 마차 안에서 답이 들려왔다.
"정숙하시오."
마부의 입이 닫혔다.
마차의 문이 열렸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고귀하신 분들과는
평생 접점이 없던 마부가
적절한 예법 따위를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그보다 천하고 우둔한 자라도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마부는 나리가 눈에 들어오기도 전에 재빨리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성호를 그었다.
양손을 꼭 쥐고 짧게 기도문을 외우며
마음속으로는 자신이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기를 빌었다.
기도를 마치고 살며시 눈을 뜨던 마부는
눈앞의 광경에 기겁하고 말았다.
미처 고개를 들지 못한 마부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붉은 대검이었다.
흑요석 같은 색감의 손잡이와
정확한 대칭을 이루며 천칭처럼 꾸며진 가드,
그리고 불결 모양처럼 이루어진 칼날은
언뜻 아름다운 장신구처럼 보일 법도 하였다.
그러나 호사가도 아니고 멋도 모르는
한낱 마부 나부랭이의 눈엔
그저 피로 물든 채 화염처럼 타오르는
무시무시한 흉기로만 비칠 따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칼끝이 땅을 향한 덕분에
그나마 바지의 청결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불행스럽게도 높으신 분의 심기를 거스른 죄로
목 위가 가벼워질지도 모르겠다는 염려 탓에
몸은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기도를 마친 후에도 아래만을 바라보고 있는
마부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검의 주인이 그를 향해 목소리를 내었다.
"고개를 드시오."
마부는 그제야 나리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귀족 같은 외모를 한
묘령의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여름 햇살 아래의
호수가 그러하듯 푸르렀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겨울에
소복이 쌓인 눈처럼 희었다.
아무런 치장도 없이
골반까지 흘러내리는 흰 머리카락은
그녀가 걸친 깔끔한 판사 로브의
어두운색과 대비되어
무어라 말하기 힘든 조형미를 더했다.
아름다운 조각상이 떠오르는 법관의 모습은
젊어 보이는 외견과는 반대로
모든 자세와 행동에 배어있는
절도로 인해 완성되었다.
그녀는 검은색 폼멜 위에
양손을 올려놓은 채 곧게 서서
엄숙한 눈으로 마부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 덕분에 차마 법관의 눈을
피할 수 없던 마부는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며
그녀의 오른 어깨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얹혀 있는 붉은 손이 보이지 않는 시늉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나리의 입이 열렸다.
"그대와 계약을 맺을 당시 들은 내용을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소.
마을에 진입하기 전에 마차가 멈추는 것 또한
이미 예정되었던 바이니, 괘념치 않소."
마부가 감사의 말 비슷한 소리를
쥐어짜는 사이 법관 나리는
명명백백한 사실을 선포하듯 말을 이었다.
"그대의 보수는 마차 안에 두었소."
마부의 눈이 빠르게 마차를 향한 사이
법관이 말을 끝냈다.
"오늘은 공사다망하여
이만 그대와 인사를 나누고 가봐야겠소."
법관은 말을 마친 후 일체의 머뭇거림도 없이
숲길을 따라 걸어 나갔다.
마부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즉시 동시에 세 가지 일을 하려다가
그만 몸이 하나뿐이라는 난관에 봉착해 버렸고,
빠르게 우선순위를 정한 후
제일 먼저 마차 안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단 한 실링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삯이 남아있었다.
마도학자의 것이든 사람의 것이든,
성직자의 것이든 심판관의 것이든 처형자의 것이든,
돈은 돈이다.
마부는 헤벌쭉 웃고는 돈을 챙긴 후
마차의 방향을 튼 뒤 마부석 위로 올라탔다.
말들은 반대 방향으로 머리를 향하자
언제 반항을 했었냐는 듯 투레질을 하며
알아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말을 쏘아본 후
더 늦기 전에 고개를 돌려
씀씀이 좋은 법관 나리의 뒤통수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대로 쭉 가시면 그 마을이 나올 겁니다!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마부는 약간의 손익계산과 노파심을 담아
자신이 법관의 모습을 본
마지막 사람이 되지 않길 바라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
.
.
하늘 높이 솟은 태양의 기운을 막는
우중충한 하늘 아래에서
숲길을 걷던 법관의 눈에
마을의 윤곽이 들어왔다.
아직 맨눈으로 간신히 보일 정도의
거리가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녀의 주변에는
해괴한 기운이 팽배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깊은 숲속임에도
새의 지저귐 한 번 들리지 않았고
법관의 눈길이 닿는 곳 그 어디에도
작은 동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발길이 줄어든 숲길은 잡초로 무성해져
산 자에게 달라붙는 망자의 손길처럼
법관의 발과 로브에 엉겨 붙었다.
울창하다 못해 우거진 나뭇가지들은
가뜩이나 어두운 숲길에
한 층 더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음모와 수수께끼에게 자리를 제공했다.
이런 기이하고 기괴한 분위기만으로도
말처럼 섬세하고 겁이 많은 동물이라면
기피할만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불쌍한 짐승들이
이곳을 기피하는 이유가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법관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법관이 신중하게 주변을 살펴보는 사이에도
그녀의 다리는 거침 없는 걸음을 이어나가
시나브로 마을에 가까워졌다.
마을의 윤곽이 선명해질 무렵,
마을 내부에서 드문드문 보이던 인영이
먼 곳에서 다가오던 그녀를 발견했다.
인영 중 일부는 삼삼오오 떼를 지어
낯선 법관의 도착을 기다리듯 서있었고
몇몇이 허둥지둥 마을 어딘가로 떠났다.
그녀가 마을 앞에 다다랐을 무렵에는
아까 떠났던 이들이 부른 것으로 보이는
듬직한 사내가 목례하며 말을 걸었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저는 여기 타뷸라 마을의 촌장입니다.
실례지만 혹시 어떻게 오셨습니까?"
촌장은 일반인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덩치에 맞지 않게 굽신거리며 다가오더니
주변을 살피다가 물었다.
"그리고, 설마하니 혼자 오셨습니까?"
법관은 묵례 후 답했다.
"나는 특별 재판소의 대법관, 디케라고 하오.
이 마을에서 보냈다는 전령과 접하였소."
법관의 말에 촌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그렇다면 그 녀석이
제대로 전달한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혹시 다른 분들도-"
"다만, 이는 홀로 근방을 순례하던 중
우연히 전령과 맞닥뜨렸기 때문이었소.
그 내용이 촌각을 다투는 안건이라 판단했기에
특별 재판소의 공식적인 대응을 기다리기에 앞서
단신으로나마 먼저 오는 편이
적합하다고 판단하였소."
촌장의 얼굴이 일순간 어두워졌으나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점차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아, 그러셨군요,
그러잖아도 마을 사람들 모두
전령을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와주신 법관 나리 때문에
다들 놀란 눈치입니다."
그는 자신이 뱉은 말이
어떻게 들릴 수 있는지
뒤늦게 깨달은 듯 황급히 덧붙였다.
"물론 저희야 당연히 한시라도 빨리
와주시기를 바랐던지라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만,
그래도 그렇지 저희처럼
아는 것 없는 것들의 생각은
한참 뛰어넘는 속도이지 뭡니까."
"신속하고 정확한 정의 집행을 위해선
다양한 수단이 사용되는 법이오."
법관의 변함 없는 답변에
그녀의 심기가 거슬린 기색이 보이지 않아
안심했는지 촌장이 다시 굽신거리기 시작했다.
"이야, 역시 귀하신 나리답게
통찰력이 남다르시군요.
저희로서는 상상도 못 할 방법이 있으신 거겠죠.
어깨에 올려놓으신 그 무시무시한 것도 틀림없이
저희가 모르는 무언가 굉장한…"
"쯧."
갑작스레 혀를 차는 법관에
촌장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의 말이 잘렸다.
"내가 주민과의 대화를 즐기는 것은 사실이나
그대는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오.
안내하시오."
푸른 눈의 냉철한 직시에
촌장은 입을 다물고 앞장섰다.
쩔쩔매며 걸어가는 촌장의 뒤에서
법관은 말없이 주변을 살폈다.
조용하다 못해 황량하기까지 한 마을이었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마을 주민들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촌장과 법관의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다니며
흘끗흘끗 법관을 훔쳐보던 주민들은
법관의 시야가 그들에게 닿을 때면
움찔하고 눈을 피하면서
슬며시 거리를 벌렸다가,
법관이 시선을 거두고 나면
저들끼리 귓속말을 나누며
은글슬쩍 도로 거리를 좁히곤 했다.
작은 사회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이
외지인을 경계심과 호기심으로 대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특별 재판소의 고위직으로서
유럽 각지를 순례해 온 법관에게는
이미 익히 경험해 온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눈에도
타뷸라 마을의 경우는 특수했다.
법관은 몇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뒤따라오는 마을 주민들을 눈여겨보았다.
그 수는 예닐곱 정도에,
하나 같이 꾀죄죄한 복장을 했고,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촌장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들 키는 시원시원하게 컸으나
동시에 비쩍 말라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일부는 팔다리가 여위어 있었고,
몇몇에겐 아물지 못한 상처가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병상에 누워
쉬고 있어야 할 상태인 주민도 보였다.
그럼에도 그들 외에는
마을에 다른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촌구석이라 하더라도
이렇게나 적은 인구수가 정상일 리 없다.
"마을에 사람이 없군."
법관이 먼저 침묵을 깨자
촌장이 기다렸다는 듯 설명했다.
"맞습니다. 지금 보이시는 대로
여기 모인 사람들이 전부죠.
애초부터 그렇게 북적거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모두가 있었을 적에는
적어도 지금의 몇 배는 되었는데,
작금의 사태 때문에……."
촌장이 이를 갈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직후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법관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으나,
그녀에게서 별다른 반응을 읽지 못하자
어물쩍 말을 넘겼다.
"아무튼, 거듭된 시도에도 저희만으로는
도무지 어쩔 방도가 없다고 판단되어
도움을 요청하게 된 것이라,
틀림없이 법관 나리 말고도 더 많은 분이
오실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전령은 특별 재판소로 인도하였소.
만일 특별 재판소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추가적인 지원이 올 것이오."
촌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불안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중얼댔다.
"기왕이면 빨리 와주셨으면 좋겠군요.
전령 녀석이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 '사냥꾼'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제대로 전해드리지 못했을까 봐 걱정됩니다."
"이에 대해선 염려할 것 없소.
사태의 심각성은 이미 충분히 전달받았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그들은 그렇게 자그마한 예배당에 다다랐다.
촌장이 예배당의 문에 손잡이에
양손을 올려놓은 채 잠시 심호흡했다.
그는 문을 열기 전 법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안에 안치해 두었습니다만,
그, 괜찮으시겠습니까?"
촌장은 자신의 걱정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으나 그 의미는 분명했다.
'피 냄새가 나는군.'
법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촌장은 법관 뒤에 거리를 두고 있던
마을 주민들을 향해 눈짓했고,
그 의미를 이해한 주민들은
한 층 더 거리를 벌렸다.
촌장이 힘을 주어 밀자
예배당의 두터운 문이 열렸다.
그곳에선 외딴 마을의 사람들의 급박한 요청에
특별 재판소의 대법관이 나서기
충분한 사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피로 얼룩진 예배당 안에
성직자 복장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처참한 몰골의 시체 주위로
짧은 시간 만에 켜켜이 쌓인
역한 악취가 맴돌았다.
촌장은 예배당 문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참기 힘들다는 듯 한껏 등을 젖혔으며,
그보다도 한참 더 물러나 있던 마을 주민들조차
코를 쥐어 막거나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법관은 서슴없이 시체에 다가갔다.
심약한 사람이라면 가만히 서있는 것만으로도
실신할 위치까지 다가간 그녀는 눈을 감았다.
피범벅이 되어 흐트러진
사제 형상의 사체 앞에서
법관은 성호를 긋고 두 손을 모았다.
짧은 묵념.
법관은 눈을 뜨고 사체를 찬찬히 살폈다.
작은 마을의 앙증맞은 예배당에서 일하는
성직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펑퍼짐하고 단출한 수도사의 로브 복장이었다.
굳이 꼽자면 익숙한 솜씨로
여러 번 덧대거나 기운 자국이 눈에 밟혔다.
그러나 이는 평화로운 마을에서 조용히 일하는
성직자라면 한 번도 겪을 일 없을
얼룩진 피와 찢긴 살점으로 뒤덮여 있었다.
법관이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사체의 상체가 적잖이 손상된 것 같소만,
혹 숲의 야수가 건드린 것이오?"
아직 교회의 문가에 서있던 촌장은
답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아닐 겁니다, 나리!
마을 근처에는 야수는 고사하고
들개조차 얼씬대지 않습니다!"
"그리 보였소.
그럼에도 굳이 확인차 다시 묻겠소.
혹시라도 마을에 남아있는 짐승이
사체를 훼손했을 가능성은 없소?"
"적어도 시신을 건물 안에 안치한 후로는
그런 적 없을 겁니다.
시내에는 이미 가축 한 마리도
남아있지 않거든요.
왜 그러십니까?"
촌장의 질문에 법관은 침묵했다.
촌장이 거짓을 고하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실제로 포식자들이 먹이에 흔히 남기는
장기가 먹힌 흔적은커녕
이빨 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설명되지 않는 점이 너무 많았다.
사망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예리한 관통상에 반하는
투박하고 절제 없는 흉상,
큼직큼직한 상처를 남기며
수도복과 그 아래의 육신을 찢은
거친 열상과는 달리
하나하나는 작으면서도
치명적인 급소만을 노린
숙련된 창상의 위치 등,
단순한 변덕으로 인한 차이라고
치부하기 힘들 정도로
중구난방인 잔재가 남아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짙고 옅은 색의 핏자국이 섞인 수도복,
별다른 흉터가 보이지 않는 맨발,
살짝 어설픈 삭발례 머리 모양까지
모조리 무엇인가 어색하고 기묘했다.
그때 법관의 눈에
피해자의 목에 남은 흔적이 포착됐다.
"목에 매달고 있던 것이
강제로 끊긴 듯한 자국이 남았군.
고인이 생전에 목걸이를 했었소?"
촌장이 머뭇대며 말했다.
"아… 그가 평소 매고 다니던
물건 말씀이라면 맞습니다.
저희가 구슬을 최대한 찾아서
옆에 모아 두었습니다."
확실히 한 때는 묵주의 일부였을
흩어진 묵주알 몇 개와 함께
금이 간 십자가가 고이 놓여 있었다.
촌장이 덧붙였다.
"시신을 발견한 장소 근처에 흩뿌려져 있던 걸
최대한 모으려 해봤습니다만…….
아무래도 많이 빠뜨려 버렸습니다."
법관은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문을 외웠다.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시간이 불편했는지,
촌장이 안절부절못한 모습으로 말했다.
"이제 확실해지셨습니까?
저희가 괜히 도움을 청한 것이 아닙니다!
성직자에게도 이런 악독한 짓을 저지르는
사악한 마귀 같은 녀석이
저희의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한때 저희의 친구이자 이웃이던 이들이
그 악마에게 몇 명이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촌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시라도 빨리 이 비극을 멈춰주십시오!
'인간 사냥꾼'이 언제 또다시 습격해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갈지 알 수 없습니다!"
촌장은 법관을 향해 성큼 다가오며 외쳤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희를 그 악마 같은 존재로부터 구해주십시오!"
법관은 말없이 몸을 돌려 예배당을 나왔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촌장은 뒤늦게서야
허겁지겁 그녀의 뒤를 쫓았다.
법관은 예배당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마을 주민의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두려움에 떠는 것처럼 몸을 숙이며
그녀를 바라보는 주민들 앞에서
법관은 붉은 검을 땅에 꽂고 말했다.
"나의 개인적인 욕심대로라면
그릇된 판결이 내려지지 않도록
보다 차분하게 현 상태와 위험을
직접 확인하고 평가하고 싶으나,
경각을 다투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이를 고집하려는 생각은 없소.
그럼에도 최선을 기해야 하기에
전령에게서 전해 들은 내용과
그대들이 직접 겪은 사태에
불일치가 없는지 확인하고자 하오."
촌장이 법관을 따라잡았을 때
마침 법관은 그녀의 요구를
세 줄로 요약한 차였다.
"그대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시오.
오해가 없도록.
이후 행동에 나서겠소."
주민들은 여전히 경계심과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 듯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막 법관 뒤에 도착한 촌장은
당장의 불안감을 잊게 해줄 말을
들은 듯했다.
촌장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그러고 나면, '인간 사냥꾼'을
죽여주실 겁니까?"
법관이 고개를 돌려 촌장을 보았다.
그녀는 촌장의 눈에 담긴
검붉은 불꽃을 읽었다.
법관이 다시 주민들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때,
촌장의 눈에도 담겨 있던 바로 그 불꽃이
그곳에서도 이글거리고 있었다.
주민들이 눈을 피하지 않으며 물었다.
"그 마귀를 심판해 주실 겁니까?"
어둡고, 짙고, 질척이는 열망이 보였다.
법관은 그녀의 뒤에 서있는 촌장과,
간절한 마음으로 그녀를 주시하는 주민들과,
그들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복수심에게
답했다.
"판결이 내려지고 나면
정의가 집행될 것이오."
.
.
.
타뷸라 마을은 척박한 땅 위에 지어져
숲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마을이었다.
최초의 희생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죽었다.
다음 날
두 번째 희생자는
최초의 죽음이 자신과는
관계없으리라 믿다가 죽었다.
그 다음 날
최초의 생존자가 말했다.
'이 숲속에 사냥꾼이 있어.'
그리고 최초의 생존자는
세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일련의 죽음이 단순 사고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지자 모두는 다 같이 힘을 합쳐
타파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어째서 곧장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소?"
"원체 이렇게 고립되고 외딴곳에선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언제 도착할지는
아무도 모르기 마련이니까요.
저희 문제는 저희끼리 힘을 합쳐
알아서 해결하는 일이 일상입니다.
애초에 마을 밖으로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 중에서
보답으로 드릴 것도 마땅한 것 없는 저희를
선의만으로 도와줄 이가 있기나 할지,
운 좋게 그런 분들을 찾는다 하더라도
전령이 그분들을 찾고 돌아올 때까지
우리들끼리 숲에 출입을 금한 채로
버틸 수 있을지…….
그럴 시간에는 차라리 다 같이
힘을 합쳐 숲을 수색하자,
같은 의견이 대세였습니다."
비록 이번은 전례가 없던 고약한 사태였지만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함께 세월을 겪으며 능력을 증명한 동료들과
목숨도 믿고 맡길 수 있는 끈끈한 정이 있었다.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방안을 시도해 보았고,
성과가 있던 날도 분명히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성과는 바로
사냥꾼의 오두막을 발견한 것이었다.
사냥꾼이 단순한 허구의 존재나
괴담 속 괴물이 아닌
실체가 있는 자라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
모두의 사기가 들끓어 올랐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을 뿐,
사태는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촌장의 말은 설명보다도 넋두리에 가까워졌다.
"그 악독한 녀석은 마치 신기루 같았습니다.
코 앞에서 일렁이면서도
정작 붙잡을 수는 없었죠.
작정하고 오두막을 에워싸서 포위를 시도하면
어느 틈엔가 인원이 하나둘 죽어 나가
진영이 붕괴하기 일쑤였고,
소수 정예를 엄선해 오두막에 침입을 시도해도
그 안에 들어가서 살아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사냥꾼은 오히려 자신의 오두막을 미끼로 삼아
그들을 농락하는 것 같았다.
기댈 수 있던 이웃과 친우들이 목숨을 잃었다.
앞장서서 사건을 해결하려던 자부터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고,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무너지는 나날이 반복됐다.
언제부터인가 그들 사이에서
무력감이라는 역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사냥꾼은 어찌할 수 없는 존재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포기해야 한다.'
"절망에 빠진 이들이 숲을 기피하기 시작하자
모두 서서히 말라 죽어 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기운이 남아있던 친구들은
아예 다른 살 곳을 찾아 피난을 떠났습니다.
남은 살길은 그것뿐이라고 하면서요.
이제 마을에는 도저히
떠날 수 없는 이들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때아니게 가족을 묻어야만 했던
사람들 말입니다."
촌장이 주먹이 새하얗게 될 때까지 꽉 쥐었다.
마치 주민들을 이끌어 온 이로서 줄곧 벼려왔던
분노와 원통함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저 건물에 누워있는 친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든 형제자매를 사냥꾼에게 잃은 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수
그 마귀를 없애려던 녀석이었죠.
마지막까지도 우리 숲에 무지한 이방인들이
과연 우리를 도울 수 있겠느냐,
심지어 사냥꾼을 잡고 나서 우리끼리 처단해야 하니
도움을 불러선 안 된다는 고집까지 부릴 정도였습니다.
그 마음은 백분 이해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결국 사냥꾼은 잡겠다면서 홀로 숲을 돌아다니다…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촌장이 고개를 떨궜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렇게 금방 와주실 줄 알았다면
진작 도움을 요청했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지요."
촌장의 우울한 눈길이 예배당을 향했다.
"녀석이 살아있다면 동의하지 않았겠지만,
이렇게 바깥의 도움을 빌려서라도
원한을 갚고 싶습니다."
촌장이 무릎을 꿇었다.
그는 법관을 올려다보며 빌었다.
"그러니 나리,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제발 저 사악한 사냥꾼을 없애주십시오.
어두웠던 나날을 씻어내는
한 줄기의 빛이 되어 주십시오!"
이에 다른 주민들도 다 같이 머리를 조아리며
한 마디씩 덧붙였다.
"그 잔혹한 살인광에게 복수해 주십시오!"
"나리만이 저희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입니다!"
"파괴와 살육만을 일삼는 '인간 사냥꾼'에게
심판을 내려주십시오!"
그들의 절박한 외침은
차라리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그대들의 요청을 이해했소."
법관으로서 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그대들이 사냥꾼에 대해
아는 바를 전부 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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