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에서 장문 쓰기 참 불편하네
불편을 끼쳐서 미안해
상편 하편으로 나눠 올림. 점점 쓸수록 길어지는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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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츠키가 홋카이도(맥주가 유명한 곳)에서 길거리 생활을 했던 점, 드루비스가 맥주와 관련된 점을 엮어서 썼음.
2. 사츠키의 수갑에 대해선 여전히 풀리지 않은 떡밥이 많음. 때문에 약간의 추측을 더했음. 1.7 사츠키의 스킨을 기준으로, 수갑의 체인은 변경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임. 동시에 수갑 자체가 문신과 더불어 그녀의 완드 같은 역할을 함. (1차 매개체는 문신임) 아무튼 일부 창작의 영역이라 사츠키 스토리가 나오기 전까진, 그냥 이럴 수도 있겠구나 정도로 봐줬으면 하는 바람임.
3. 혼혈 마도학자는 마도술이 썩 대단하지 않다는 묘사가 나옴. (버틴도 ‘혼혈이라’ 마도술 능력이 좋지 않다는 묘사가 있음) 사츠키의 경우 예외일 수도 있긴 하지만, 확실한 바는 없기에 아래와 같이 묘사함.
4. 영국인은 맥주를 에일이라 부름. 다른 나라에선 비어라고 부름. 언어 문화적으로 다르게 불리기에, 본문에서도 버틴은 맥주를 에일이라 부르는 것으로 묘사함.
5. 벚꽃도 폈는데 즐겁게 읽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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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균열이 간 벽, 깨진 거울 속 얼굴. 생채기 투성이에 산발 머리. 기억도 안 나는 쓰레기통에서 주웠던 허름한 옷. 하지만 양손은 자유로웠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메이지 유신. 서양 문물과 우리나라 문물의 융화. 다이쇼 덴노 아래, 홋카이도의 눈 덮인 진흙길은 포장도로가 되었고, 그 위엔 철도가 건설되었다. 우리나라는 아름다웠고, 거리엔 더 아름다운 사람들이 가득했다. 화양절충. 기모노 위 하카마를 걸친 여자들과 중절모를 쓴 남자들이 걸어다닌다. 그리고 저들은 ‘인간’이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마도학자도 아니다. 그 사이 애매모호한 지점에 나는 서 있다. 길 위에 버려졌고, 살아남아야 했다. 다행인 것은 내겐 이 악몽의 시대를 버틸 수 있는 능력 한 가지가 있단 것이다. 수많은 마도학자들은 완드를 통해 자신의 마도술을 제어한다. 그 완드는 지팡이 모양이기도, 카타나 모양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겐 그런 사치스런 물품을 가질 여력조차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혼혈인 내게 남은 미약한 마도술. 그것을 제어하는 것에 큰 어려움을 겪진 않았으니까.
오늘 장소는 이곳이다. 개척사맥주양조소 인근. 새빨간 벽돌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저곳이 양조소다. 물론 양조소 내부가 목적지는 아니다. 인근 상가 골목이 내가 일을 할 곳이다.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낸다. 골목. 엽전 하나를 던져두면 준비는 끝이다. ‘살아남아야 한다.’ 스스로 속삭인다. 2분 뒤, 어느 남성이 골목에 들어온다. 정장 차림. 외국인? 아니, 일본인. 그가 바닥에 떨어진 엽전에 눈을 들인다. 그가 허리를 숙였고, 나는 그의 앞으로 다가간다. 비틀거리다가 일부러 부딪힌다.
“뭐야!”
아마도 상류층일 남자에게, 나 같은 하층민은 다락방에 사는 쥐새끼 한 마리일 뿐이다. 고개를 숙여 사죄한다. 물론 진심은 없다. 목소리가 기억에 남지 않도록, 말은 아낀다. 어차피 내가 입은 옷가지는 내일이면 바뀔 것이다. 남자는 더러운 것이라도 만졌다는 듯, 옷과 손을 툭툭 턴다. 그러고선 바닥에 있는 엽전 하나를 주워간다. 여의주를 문 용이 새겨진, 고작 5전짜리 엽전. 대신 그는 말 한 마디를 놓고 간다.
“재수 없긴.”
그는 모를 것이다. 나의 친구, 산토끼들이 그의 코트 안주머니 속 지갑을 물어왔다는 걸.
벚꽃색으로 빛나는 산토끼들이 내 목의 벚꽃 문신 속으로 돌아온다. 내 손에는 어느새 남자의 지갑이 들려 있다. 연다. 엽전이 많다. 남자가 주운 엽전의 몇 십 배는 되는 돈이다.
고개를 든다. 어느새 넓은 거리에 나와 있다. 전철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승객들은 꽉 차 있고, 저 중 어느 자리도 나의 것은 아니다.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마찬가질 것이다.
어디선가 벚꽃잎이 흩날린다. 그 수가 많진 않다. 끝의 끝까지 살아남은 에조야마자쿠라. 오늘은 몇 월일까. 사츠키(5월)일까. 홋카이도의 늦은 봄.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 ??:??]
손목에는 처음 보는 팔찌가 채워져 있다. 아니, 이건 팔찌가 아니다. 나는 어딘가로 걷고 있다. 어디에 가는 거지? 형체 없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고 있어. 그들이... 나를 이렇게 불러. ‘마도술을 쓰는 좀도둑’.
다음 장면은 감옥 앞. 자신을 혼슈의 어느 마도학자라고 소개한 사람. 그의 얼굴이... 새까맣게 칠해져 있다. 마치 먹물처럼. 검은 구멍 같기도 하다. 그가 말한다. 오니 같은 거친 목소리로.
“넌 두 팔을 잘라내지 않는 이상, 평생 그걸 차고 있어야 할 거다. 하지만 그러면 네 목숨도 끝이겠지.”
다시 손목을 바라본다. 나는 이 팔찌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건 수갑이다. 마도술을 제어하는 수갑. 또는 영원히 벗을 수 없는 꼬리표.
“네 년은 아바시리 형무소로 가게 될 거다. 전 일본에서 가장 악명 높은 형무소라고 볼 수 있지. 겨울이 오면 너의 발과 손, 귀. 모든 곳이 바깥부터 얼어붙고, 썩어 들어갈 거다.”
감옥. 그곳이 길거리보다 더한 곳일까. 신문을 덮고 잠에 들던 내게, 그곳이 정녕 지옥일까. 그가 얼굴을 들이민다. 아마도 나를 유심히 본다.
“잠깐, 너. 순혈이 아니잖아.”
그 마도학자의 얼굴을 알 순 없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다. 여느 소매치기 짓을 했을 때, 내가 그들에게 부딪혔을 때.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표정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쥐새끼를 보는 표정. 연민도, 무엇도 없는. 그저 혐오의 눈빛.
인간에게도. 마도학자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나는 사랑받을 수 없다. 내 이름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째서 살아남아야 했는가.
[10/3 12:33]
라플라스 재활센터. 이곳에 오는 건 굉장히 멀미나는 일이다. 당했다고 생각한다면, 당한 것이 있으니까.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간단하다. 사츠키 때문이다. 최근, 그녀가 두통을 호소했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진통제도 듣질 않았다. 때문에 라플라스로 향했고, 그녀에게 내려진 처방은 ‘가상몽유 치료’였다.
나로선 굉장히...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당한 것이 있으니까. 그래도 사츠키에게 가상몽유 치료를 사용하기로 결정한 건, 그녀 본인의 의지였다. 마주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던 것 같다.
하루가 지났고, 라플라스에 다시 왔다. 재활센터 704호에 그녀가 있다. 그곳으로 가야 한다.
“하여간, 여기는 언제 와도 알코올 냄새로 가득하다니까.”
릴리아가 코를 찡그리며 말한다. 그녀는 뭐랄까. 내가 라플라스에 간다고 하면 늘상 동행한다. 그녀 역시도 일전의 일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릴리아. 네 보드카에서도 알코올 냄새는 나지 않아?”
내가 묻자, 그녀는 자기 술통을 들어올리며 답한다.
“즈브로카의 향기와 알코올 냄새는 엄연히 달라. 하긴, 너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즈브로카? 그건 또 뭐지. 그녀가 술을 들이킨다. 한 모금도 아니고 여러 모금. 그녀가 입에 대는 술은 대체로 독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저렇게 마셔도 괜찮은 걸까.
“캬하, 이 맛이지. 이래야 병원 냄새가 지워진다니까.”
뭐가 다른 걸까. 그런 건 중요하지 않겠지. 중요한 건 사츠키의 상태다. 엘레베이터가 딩동 소리와 함께 멈춘다. 문이 열리고, 우리 둘 다 내린다. 주변을 살핀다. 왼쪽은 720호로 시작한다. 오른쪽은 708호. 아마... 오른쪽에 있을 확률이 높을 것 같다.
“나만 따라와, 버틴.”
의기양양한 릴리아가 눈을 흘기더니, 내게 따라오란다. 그녀가 오른쪽으로 간다. 하긴,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재활센터 복도를 따라 걷는다. 708, 707... 704호. 병실의 유리창 안으로 하얀 환자복을 입은 그녀가 보인다. 여전히 팔에 수갑이 채워진 채, 유리로 된 둥근 마스크 같은 걸 쓰고 있는 사츠키.
그리고 메스머 주니어도 있다.
메스머는 우리가 밖에 있다는 걸 알아챈 듯,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그녀는 예민하니, 엘레베이터에서 우리가 내릴 때부터 눈치챘을 수도. 긴장이라도 한 걸까. 릴리아가 병실 문을 열어 젖힌다. 나와 그녀, 모두 병실로 들어간다.
삭막한 공기가 흐른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메스머다. 그녀가 돌아보지 않고 말한다.
“꼴등이랑 술주정뱅이가 왔네. 사츠키 때문에 온 거라면 걱정하지 마. 치료는 잘 끝나가고 있으니까.”
차갑고 사무적인 목소리. 굳이 답하진 않는다. 서로 용건만 전하면 된다... 이런 건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옆에서 릴리아가 비꼬듯이 답한다.
“콘스탄틴의 말 잘 듣는 강아지님께서, 우리 사츠키를 영원히 잠재우진 않을까, 걱정을 안 할 수가 있나?”
메스머가 회전 의자를 돌려, 릴리아를 정면으로 마주본다. 그녀의 눈은 평온했지만 은연 중에 분노가... 아니면 원망 같은 감정이 느껴진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마.”
그녀의 다소 격양된 목소리. 릴리아는 코웃음치며 답한다.
“흥.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만. 유리창이라도 한 번 더 부숴버리면 정신 차리려나? 너, 그 마약쟁이랑 함께 인기 투표 꼴등인 건 알지?”
릴리아의 도발에 메스머의 표정이 완전히 구겨진다.
“이래서 마도학자 녀석들이란. 감정에만 치우치고 이성이라곤 쥐뿔도 남아 있지 않지. 다들 미쳤어.”
“뭐야? 그러는 네 녀석도 마도학자...”
“그만.”
중재가 필요할 때다. 릴리아와 메스머 사이에 서서 둘을 중재한다.
“싸우러 온 게 아니야. 사츠키의 상태를 알아보려 온 거지.”
하지만 둘의 신경전은 멈출 생각을 않는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러다 사츠키에게 영향이 가면 곤란한데...
“버틴, 릴리아, 메스머! 여러분, 모두 여기에 계셨군요!”
그때, 바깥에서 익숙한 미성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모두의 시선이 병실 입구에 집중된다. 거기엔 라플라스 연구복 차림의 X와...
“아,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글이 서 있었다. 나긋하게 웃는 X와 어리둥절한 표정의 이글.
“뭐야, 라플라스 녀석들이 셋이나... 머리 아프구만.”
릴리아가 농담조로 말한다. 그러자 X는 그 말에 잘못된 것이 있다는 듯, 능글맞게 웃으며 답한다.
“하하. 저희는 로렌츠 연구소 소속인 걸요. 물론 라플라스의 산하 기관이긴 하지만, 엄밀히 소속은 다르답니다.”
옆에 서 있는 이글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동의의 표현일 거다.
“무슨 일이야. X.”
내가 묻는다. 그러자 X가 자신의 노트를 공중에 띄우더니 펼치기 시작한다. 촤르륵, 넘어가는 그의 아이디어 노트. X는 어느 페이지를 찾는 모양이다.
“특별한 일은 아니에요. 그저 제 발명품을 실험하고 싶어서 당신을 찾고 있었죠. 그런데 마침 접수처에서 이글이 번뜩이는 눈으로 버틴을 찾았어요.”
... 이글의 눈썰미가 좋은 건 사실이다. 그런데 날 찾아낸 건 그녀의 눈썰미 때문일까. 아니면 라플라스의 하얀 제복과 다르게, 내 옷이 눈에 띄어서였을까.
“그 정도면 굉장히 특별한 일로 들리는데. 하지만 여긴 병실이야. X.”
내가 답하자, X는 머리를 긁적인다. 메스머는 이 소란스러운 상황에 싫증이 났는지 사츠키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런데...
“메스머씨... 타임키퍼씨... 여긴...”
몽롱함과 일본어 억양이 섞인 어색한 영어.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돌아간다. 사츠키가 깨어났다. 메스머가 가상몽유 장치를 해제한다. 마스크를 벗기고, 사츠키의 얼굴 앞에 손가락을 흔든다.
“몇 개로 보여?”
손가락은 두 개다. 사츠키의 시선이 고요히 메스머의 손가락을 따라간다. 곧이어 그녀가 답한다.
“두... 개요.”
메스머가 그 말을 듣고, 카르테에 무언가 적는다. 아마 우리는 그걸 봐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가상몽유 장치의 전원을 끈 메스머는 구두굽의 또각이는 소리를 내며 문 밖으로 나간다.
“끝났어. 1층에서 퇴원 수속을 밟으면 돼.”
곧장 메스머는 사라졌다. 릴리아는 메스머가 복도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문밖 경계를 멈추지 않는다.
“하여간 골치 아픈 녀석이라니까.”
릴리아가 혼잣말을 한다. 사츠키는 한창 몽롱한 채로 천장을 응시한다.
“사츠키. 괜찮아?”
그녀에게 다가가 묻는다. 그러자 그녀는 기력이 없는지 조금은 힘 없이 웃으며 답한다.
“네... 소녀는 괜찮습니다.”
그래도 웃는 걸 보면 괜찮은 것이리라. 그녀는 매사 긍정적인 사람이었으니, 잘 이겨내겠지.
“일단... 조금 더 안정되면 퇴원하자. 짐은 나와 릴리아가 들게.”
사츠키에게 말하자, 그녀는 뭔가 정신을 차린 듯, 이불을 걷는다. 허리를 굽혀서 앉는다. 그녀가 입을 연다.
“아... 아니에요! 제가... 제가 들게요 타임키퍼씨. 소녀의 짐인 걸요.”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우리 옆에 이글이 불쑥 얼굴을 내민다. 그녀의 손에는 평소 사츠키가 즐겨 입는 옷가지가 들려 있었다.
“사츠키씨의 가방에서 꺼냈어요. 갈아 입으시면 될 것 같아요.”
“어머... 가... 감사합니다, 이글씨.”
... 역시 눈치가 정말 빠르구나. 이글이 X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러자 X가 난감한 웃음을 짓고는 말한다.
“하하, 저는 남자니까, 나가 있을게요.”
그가 곧, 문을 닫고 나간다. 복도쪽 창가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문 바로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릴리아는 보드카를 한 모금 더 마신다. 그러곤 사츠키의 짐을 챙겨 든다. 여분의 옷가지와 세면 도구 정도.
“난 나가서 저 괴짜 녀석이랑 떠들고 있을게. 심심할 것 같거든.”
곧, 릴리아도 나간다. 병실에는 나와 이글, 사츠키만이 남는다. 사츠키가 옷을 받아든다. 그녀의 수갑에 걸린 체인이 짤그락 소리를 낸다. 문득, 이글이 묻는다.
“그런데 사츠키씨. 수... 그 장신구를 낀 채로 옷을 갈아입으실 수 있나요?”
생각지도 못한 점이다. 하지만 분명한 의문이기도 하다. 수갑을 끼고 옷을 입을 수 있나? 그러자 사츠키의 주변에 산토끼 두마리가 떠오른다. 벚꽃 빛으로 발광하는 산토끼. 그것들이 사츠키의 수갑에 달라붙더니... 놀랍게도... 걸려 있는 체인을 풀어버린다.
“약간의 마도술을 응용하면, 쇠사슬 정도는 풀 수 있어요. 단지... 이 장신구를 완전히 풀진 못할 뿐이지요.”
뱀이 똬리를 틀듯, 체인이 병실 바닥에 널브러진다. 그녀가 환자복을 벗고, 자신의 기모노를 집어든다. 속옷 차림의 그녀. 그런데...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나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문신이다. 목에서 어깻죽지까지 그려진 벚꽃 문양의 문신. 하지만 그녀에게 섣불리 물어볼 수는 없다. 그녀에겐 아픈 과거였을 테니까.
“환복하는데 3분 39초가 소요되는 편이시네요.”
... 이글이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사츠키가 옷을 갈아입고, 앞치마를 툭툭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글은 이유 모를 무뚝뚝한 박수를 쳤다. 사츠키가 괜히 쑥쓰러운 얼굴을 보인다. 아무튼... 슬슬 돌아가볼까. 여행 가방으로.
잠깐. 내 지갑... 어디 갔지?
[10/4 13:24]
어제, 사츠키의 퇴원 이후의 일이다. 여행 가방 안까지 X와 이글이 따라왔다. X의 용무는 간단했다. 꽃향기가 나는 탄산음료를 만들 수 있는 발명품을 실험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드루비스씨를 찾고 싶어했다. 아무래도... 드루비스씨라면 꽃향기만 맡아도 종류를 맞힐 정도로 예민하니까. 음료 향의 정확성을 높이는 것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드루비스씨는 황무지의 숲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고요하고, 우거진 숲에서 드루비스씨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X가 날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답했다. 매일 정오 즈음에 그녀가 로비 밖, 정원에서 꽃을 돌볼 거라고. X는 용무가 끝난 뒤, 이글과 함께 로렌츠로 돌아갔다.
사츠키는 방에서 쉬도록 했다. 그녀가 가상몽유의 꿈 속에서 무엇을 봤는진 묻지 않았다. 상태가 나아진 후 물어보는 게 나을 거라 판단했다. 릴리아는 사츠키의 짐을 내려놓고 제노 아카데미에 볼 일이 있다면서 여행 가방을 떠났다.
그렇게 오늘이 됐다. 오전 11시 쯤, Z씨에게 전화가 왔다. 시기가 시기이니, 곧 있을 접견의 후보를 알려주려는 것이리라. 때문에 바로 재단 본부로 향했다. 그렇게 Z씨의 집무실 앞. 오랜만에 노크의 필요성을 떠올린다. 문을 두드린다. 똑똑.
“들어오세요.”
Z씨의 허락에 문을 연다. 낯익은 집무실. 중국어로 무언가 쓰인 화이트보드. 김이 피어오르는 그녀의 잔.
“왔군. 버틴.”
Z씨가 잔을 들이키며 가볍게 눈인사를 한다. 고개를 숙여 목례한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나는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Z씨. 호출하셔서 왔습니다. 접견 때문인가요?”
내가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래. 자네 노력 덕분에 지난 접견도, 오페라도 성공적이었지.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버틴.”
“저는 마땅히 한 게 없습니다. 보이저와 찰리가 잘 해낸 것일 뿐입니다.”
“여전히 칭찬에 인색하군 그래. 가끔은... 웃어도 돼. 그 정도 칭찬에는.”
...
“접견 대상이 정해졌나요?”
내가 묻자, 그녀는 여느때처럼 책상 아래 서랍에서 서류를 꺼낸다. 저번 접견보단 서류가 가볍다. 특이사항이 없다는 뜻일까.
“버틴, 어제 사츠키가 가상몽유 치료를 받았다고 전해들었네. 메스머의 보고서가 내 쪽으로도 들어왔어.”
... Z씨도 알고 있었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유달리 할 말은 없다. 나는 그 카르테에 대해 모르니까. 하지만 Z씨는 눈을 조용히 감더니,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린다. 그러다 곧, 입을 연다.
“사츠키가... 어떤 과거를 보냈는지 들은 적이 있나?”
고개를 끄덕인다. 완전히 모르는 건 아니다. 재단에서 그녀를 분류한 서류, 그녀와의 대화에서 얻은 내용. 그리고 UTTU 잡지에서의 인터뷰 내용까지. 들을 수 있는 내용들은 대체로 들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녀에겐 어두운 과거가 있다. 소매치기로 생계를 어렵게 유지하던 그녀. 하지만 그녀는 이제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지금의 그녀는 현재, 미래를 보고 있다. 그게 내가 아는 사츠키다.
“그녀가 꿈에서 마주했던 걸 메스머가 기록한 게 있네. 자세한 내용은 서류에 쓰여 있지만, 대략적인 내용을 요약해주자면... 가상몽유 치료에서 과거를 마주했던 모양이야.”
“과거를요?”
“그래. 다이쇼 시대, 그녀의 행적이 홋카이도에 머물렀을 때의 과거.”
Z씨가 그 말과 함께 내게 서류를 건넨다. 그녀의 진료록에는 그녀의 뇌파 패턴, 꿈에서 마주한 것들을 활자화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녀가 꿈에서 마주한 것은... 과거. 그 중에서도 가장 어두웠던 과거였다.
“최근 두통의 원인이...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이란 건가요? 하지만 사츠키는 과거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라고 파악했었습니다. 긍정적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죠. 제가 아는 바와... 다릅니다.”
문자 그대로. 내가 아는 사츠키라면... 이럴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때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또는 대단한 일화가 아닌 것처럼 말하는 그녀였다. 하지만 Z씨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버틴. 자네가 타임키퍼가 됐던 날... 기억하고 있나?”
...
“네. 당신에게 우산을 전해 받은 날이었죠.”
거꾸로 내리는 비. 서서히 조각나며 소멸해가는 나의 친구들. 우산은 아래에서 올라오는 빗방울을 막아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Z씨는 우산을 들고 있었고, 내게 그것을 건넸다.
“지금의 자네는 그 과거를 마주하더라도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네. 하지만 버틴. 우린 사람이야. 어떤 이유가 없더라도, 갑자기 덮쳐오는 폭풍우처럼. 이겨냈던 과거가 어느 날 화살이 되어, 하늘에서 내리꽂을 때도 있는 법이지.”
...
“그녀에게 그런 하루가 있었을 뿐이네. 그래서 그녀는 가상몽유 속에서 자신의 기억을 마주해야 했던 거지. 그 덕에... 조금 나아졌을지도 모르겠군.”
...
“그녀가 카페에 있을 적, 그녀를 위해주던 사람들은... 폭풍우가 지나고 모두...”
... Z씨가 말을 잠시 멈춘다. 어떻게 정리해서 말해야 할 지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어.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선 알고 있었을 거야. 그녀가 사랑하던 사람들... 모두를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게 됐다는 걸.”
...
“우리가 미래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각자가 있었던 오늘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 사람들도... 고리도 이사벨라도 모두... 만날 수 있을까요.”
... 말이 흐리다. 안개처럼. Z씨가 답한다.
“자네의 마음 속, 은연 중에 떠오르는 불안감들이... 사츠키에게도 똑같이 있었을 거야.”
... 납득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납득이 된다. 곧, Z씨는 사뭇 어두웠던 표정을 푼다. 업무를 할 때처럼, 미묘하게 웃는 표정으로 바꾼다. 그녀가 내게 다른 서류들을 건넨다. 서류에는 두 사람의 사진이 있다. 사츠키. 그리고 드루비스씨...
“이번 접견은 드루비스와 사츠키야. 두 사람의 마도학적 능력은 수치상으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나. 드루비스가 훨씬 우위에 있지. 어쩔 수 없네. 그녀는 몰락한 귀족일 지언정, 이름 있는 가문의 순혈 마도학자니까. 하지만 두 사람의 마도술은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어. 상성이 잘 맞지. 때문에... 두 사람으로 선정했네. 버틴.”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나도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다. 일을 해야 한다. 재단의 임무를. 접견. 벌써 7번째인가. 드루비스씨와 사츠키. 두 사람이 서로 대화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 없다. 외근은 함께 자주 나가는 편이었지만... 두 사람이 실제로 무슨 대화를 했는지 알 수는 없다.
“이번에도 잘 부탁하네.”
어려운 일이 될 것만 같다. 왜인지.
[10/11 10:21]
여행가방의 황무지 속 식물들. 그것들은 바깥 세계의 식물들과 생장 속도가 다르다. 개화 시기 역시 제멋대로다. 그것들을 모두 제어할 수는 없다. 황무지의 라이트 온실이라면 모를까.
콘블룸에게 전해 듣기를, 드루비스씨는 요즈음 황무지의 ‘깊이 잠든 숲’ 쪽에서 자주 활동한다고 한다. 완드 제작이 질린 걸까. 그럴 리는 없다. 그것은 그녀 나름의 직업이기도 하니까. 때문에 그곳으로 향한다. 우거진 숲. 아직은 황무지에 햇살이 내리니, 카벙클 무리가 나타날 일도 없다.
나뭇잎 그림자. 조금은 암울하고 어두운 숲. 하지만 고요하다. 그곳만큼 드루비스씨에게 어울리는 곳이 있을까. 드루비스씨를 찾는 것은 썩 어렵지 않았다. 그 숲엔 커다란 고목 하나가 자라고 있다. 사계절 내내 검푸른 잎을 가진 나무가.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그 나무의 가장 굵은 가지 위. 드루비스씨는 그곳에 걸터 앉아 있었다.
“그때처럼 신발이라도 떨어뜨려야 할 것 같네요. 버틴씨.”
마치 첫만남때와 같다. 그녀의 사유지였던 숲, 그녀는 나무 위에서 신발을 떨어뜨렸다. 나는 그걸 주웠다. 그게 첫만남이었다. 물론 나무의 형태가 다르다. 그녀의 옷차림도 다르다. 그녀는 여행가방에 온 뒤로 사교복을 거의 안 입는다. 머리색도 변했다. 금발로 염색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일랜드인의 피를 증명하듯, 고유의 새빨간 머리일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애초에 신발을 신고 있지 않다. 맨발의 드루비스씨.
“오늘은 사양할게. 드루비스씨.”
그녀에게 답한다. 드루비스씨는 손에 들고 있던 완드를 바닥에 툭 떨어뜨린다. 그러자 그 완드가 땅 속으로 스며들듯이 사라지고, 곧이어 굵은 나무 뿌리들이 땅 속에서 솟아오른다. 그녀는 그것을 밟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듯 땅으로 내려온다.
“무슨 일인가요. 모습이 마치 고개를 숙인 물망초 같네요.”
뿌리들이 다시 땅 속으로 돌아간다. 그녀의 완드가 땅에서 솟아오른다. 마치 나무처럼. 드루비스씨는 완드를 회수하고 나를 걱정하듯 묻는다. 하지만 표정은 온화하다.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 용건을 바로 말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다.
“요즘 이 쪽에서 자주 지낸다고 들었어. 무슨 일 있어? 드루비스씨.”
내가 묻자, 그녀는 조용히 고목 옆, 무언가를 가리킨다. 겨우살이에 둘러싸인 무언가였다. 그녀와 함께 그 무언가에 다가간다. 자세히 보니...
“오크통?”
얼떨결에 놀라듯이 말했다. 그러자 드루비스씨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긋하게 말한다.
“이곳은 황무지에서 가장 빛이 안 드는 곳이죠. 서늘하고, 어둡죠. 모두를 위한 켈트 맥주를 만들고 있었어요.”
그렇구나. 그녀가 간혹 에일을 만들겠다는 말은 했었다. 그러니까... 미국식 영어로는 맥주지. 그런데 이렇게 진짜로 만들고 있을 줄은 몰랐다. 릴리아가 좋아하려나? 아니, 릴리아는 에일이랑은 안 맞을지도.
“잘 되고 있었어?”
내가 묻는다. 그러자 그녀는 잠시 오크통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젓는다.
“황무지의 날씨는 변화무쌍하죠. 이곳의 식물들은 혼란스런 날씨에서도 꿋꿋이 자라나지만... 맥주를 만들기에 적합한 날씨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이번이 3번째 시도죠.”
... 하긴... 나도차도 황무지의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적어도 다 맞다. 이곳은 종잡을 수 없다. 그녀 식으로 표현하면, 대지 위의 생명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일어설 것이다. 하지만 섬세한 공정이 필요한 에일 제조는... 이런 환경에서 만들기엔 어렵겠지.
“X가 드루비스씨를 찾았었어. 만난 적 있어?”
내가 묻는다. 드루비스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네. 며칠 전에 왔었죠. 기이한 기계의 실험을 도와달라고 했어요. 제가 해야 할 일은 음료의 꽃향기가 얼마나 자연스러운 건지 알아내는 일이었죠.”
“그래서, 실험은 잘 됐어?”
다시 묻는다. 하지만 대충 짐작은 간다. X의 발명품은 대부분... 그렇게 좋지 않은 결말을 맞곤 했으니까.
“유감스럽게도... 꽃의 향기는 꽃만이 만들어낼 수 있죠. 그것을 만들어내는 건 빗물을 마시고, 바람을 쐬며, 대지를 지탱하는 생명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거짓된 향은 그저 거짓된 향일 뿐이죠.”
...
“식물에 있어선 칼 같네.”
“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X의 탄산음료 제작기는 이렇게 실패하는 건가 보다. 유감이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나는 X나 티토, 레굴루스와 다르게 기계과 친하지 않으니까.
“그게 진짜 용건은 아닌 것 같네요. 버틴씨.”
...
“맞아. 진짜 용건은 아마도 드루비스씨가 짐작하고 있을 거라 생각해.”
내가 말하자, 드루비스씨는 멀리 하늘을 바라본다. 어느새 햇살이 사라지고, 먹구름이 꼈다. 접견일에 있어선 처음으로 흐린 날이 될 것만 같다.
“접견이겠죠.”
그녀가 흘러가듯 말한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가 날 봤을까. 그건 중요하지 않을 거다. 서서히 몰아치기 시작하는 숲의 바람이 그녀에게 알려주었을 테니까.
...
“누구인가요?”
그녀가 묻는다. 짧게 답한다.
“사츠키야.”
그러자 드루비스씨의 표정이 변한다. 저건 어떤 표정일까. 그녀의 표정이 크게 변화하는 법이란 없지만... 저건... 눈가가 내려가고 입술이 일자가 된다. 걱정?
“그녀는 수갑을 차고 있죠. 그게 그녀에겐 족쇄였을까요.”
그녀가 말을 하다말고 나를 본다. 그녀의 녹빛 눈동자에선 이상하게... 슬픔이 느껴진다.
“저는 수갑을 찬 적이 없죠. 하지만 족쇄는 있었어요.”
여우비처럼 애매한 말. 나는 그 뜻을 알 수 없다. 때문에 말한다.
“그 해답이 궁금하다면 오늘 접견에서 알 수 있게 될 거야. 1시까지 접견실로 와줬으면 해. 드루비스씨. 용건은 이게 다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오겠다는 뜻이리라. 고개를 숙여 간단하게 인사한다. 그녀도 목례한다. 돌아서서 다시 로비로 향한다. 사츠키에게 향할 때다. 그녀 역시 오늘이 접견인 것은 모를 테니.
...
소네트한테 맡겼다면 더 편했으려나 싶다. 저번 접견 때는 그녀가 보이저를 찾아와서 편했었는데.
[10/11 11:33]
“雨ニモマケズ, 風ニモマケズ, 雪ニモ夏ノ暑サニモマケヌ, 丈夫ナカラダヲモチ, 慾ハナク, 決シテ瞋ラズ, イツモシヅカニワラッテヰル...”
여행가방에 초대받은 이들의 방은 각자 본인만의 방식으로 꾸며놓은 채다. 어떤 이들은 화려하게. 어떤 이들은 소박하게. 하지만 특색이 드러난다. 소더비의 방이 포션으로 가득하고, 레굴루스의 방이 LP판으로 가득하듯이.
사츠키의 방은 어떨까. 그녀는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른 채, 소리내어 책을 읽고 있다. 그녀만의 취미다. 아마도 시집인 것 같다. 그녀의 방에선 동화책과 시집이 놓은 책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여분의 앞치마는 옷걸이에 걸려 있다.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는 브라질산 원두. 일본 커피에는 비교적 많이 들어가는 우유가 담긴 곽. 드립 커피를 내릴 수 있는 그라인더와 드리퍼까지.
뭐랄까. 근대 일본 카페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배경이다. 방 구석에 놓인 서양식 침대만 제외하면 말이다.
“분홍색 토끼 인형이 인상적이네.”
내가 말한다. 그녀의 침대 위에 그런 모양의 인형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츠키는 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책을 덮는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내게 말한다.
“아... 안녕하세요, 타임키퍼씨. 소녀의 방에 언제부터 계셨던 건가요? 독서에 열중하느라 들어오신 줄도 몰랐네요. 죄송해요.”
“괜찮아, 내가 노크를 안 하고 들어왔는 걸.”
노크를 깜빡했다는 말이 그녀에게 변명이 될까. 사츠키는 쑥쓰러운 표정으로 자신이 읽던 책 표면을 매만진다.
“무슨 책 읽고 있었어?”
내가 묻자, 사츠키는 부끄러운 듯, 목소리를 낮추고 말한다.
“그게... 소네트씨에게 부탁해서 받은 일본 시 모음집이에요. 소네트씨가 직접 만들어주셨는데... 그 중에서 ‘미야자와 겐지’ 작가님의 ‘비에도 지지 않고’를 읽고 있었어요.”
미야자와 겐지라... 누군진 잘 모른다. 하지만 사츠키가 자주 읽던 ‘주문이 많은 요리점’의 작가라는 건 알겠다. 동화책 작가인 줄 알았는데 시인이기도 했구나.
“일본어는 잘 모르겠지만... 좋은 내용일 것 같아서.”
내가 말한다. 그러자 사츠키는 ‘다 들으셨군요...’라고 혼잣말한다. 확실히 본의가 아니든 간에 엿듣는 건 좋지 않은 행동은 맞다.
“미안. 어쩌다 보니 듣게 돼서.”
사과한다. 그러자 사츠키는 손사레를 치며 괜찮다고 웃는다.
“커피라도 한 잔 내려드릴까요? 타임키퍼씨. 아니면 차가 괜찮으세요? 쌀과자도 있는데 바로 내올 수 있어요.”
“괜찮아, 사츠키. 그건 조금 미뤄야 할 것 같아.”
바로 멈춘다. 지금 그녀와 다과를 나눠 먹는 것보단, 드루비스씨도 함께인 채가 낫다. 바로 본론을 얘기한다.
“사츠키, 들은 바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늘 접견이 있어. 그 대상이 너와 드루비스씨고.”
내 말에 사츠키는 잠시 동안 생각하는 듯하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걸까? 그러다 그녀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내게 답한다.
“접견이라면... 그 접견 말인가요? 마틸다씨가 어느 날 아침에 음료를 마시면서 엄청 얘기했었어요.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는데... 소녀의 차례로군요.”
...
“맞아. 그래서 1시까지 접견실로 와줬으면 해. 커피와 다과는 그때 먹는 게 나을 것 같아.”
... 아, 맞다. 잊고 있던 게 있다.
“그런데 사츠키. 혹시 내 지갑 본 적 있어?”
“네?”
“지갑 말이야. 네가 재활센터에서 퇴원하던 날 잃어버렸거든.”
“아... 네... 지갑 말이죠. 소녀는... 그러니까...”
... 정답인 것 같다.
“아니야. 내 방에 있겠지. 신경 쓰지 마. 있다가 1시에 접견실에서 보자.”
“네... 네! 아마 지갑은... 그러니까... 타임키퍼씨의 방에 있을 거에요!”
말을 끝내고 돌아선다. 눈을 살짝 흘깃한다. 최대한 사츠키가 모르게. 그녀의 목에 있는 문신이 빛나고 있다. 아마도 산토끼들이 서랍 속에서 지갑을 꺼내고 있으리라.
“그런데 사츠키. 마틸다는 무슨 음료를 먹었어?”
문득 물어본다. 콧대 높은 그녀가 마실 음료. 고품질 우유? 라떼? 아니면 핸드드립 커피? 그런데 사츠키는 최대한 평범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도둑질 사실을 숨길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듯.
“마틸다씨는 그때 설탕과 시럽을 듬뿍 넣은 코코아를 드셨어요!”
... 코코아?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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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부분부터 동서남북으로 울부짖었다
사츠키 방치대사가 카페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요라서 폭풍우 맞고 끔살당한 세계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렇게 짚고 넘어가니 개슬프네
글이 메타적인 요소도 있고 실제 배경자료 참고한 것도 보이고 ㄹㅇ 고퀄이야..
나도 그 대사 때문에 저렇게 썼어. 워낙 릾 세계관이 애매모호해서 샤르지아 선생처럼 살았으면 좋겠네 - dc App
내용도 분량도 10/10 중간에 나오는 일본 시는 제목이 뭔가요? 번역기 돌리니까 결과가 이상하게 나와서.. 읽는 내내 즐거웠어요
하편에 나오지만 미와자와 겐지의 '비에도 지지 않고' 입니다 - dc App
일하면서 급하게 읽느라 해당 부분을 놓쳤네요 집에서 여유 있을 때 다시 한 번 정독해야 할 듯 감사합니다 :)
몰랐던 시인데 사츠키 캐릭터 컨셉에 ㄹㅇ 잘맞는듯..
ㄴ 조금 여유 생겨서 다시 정독하고 본문에 안 나온 시의 나머지 부분도 찾아서 읽고 있는데 시 내용이 정말 좋네.. 사츠키 볼 때마다 이 시가 떠오를 듯
아 근데 메인스에서 버틴 드황한테 존댓말쓰지 않았나? 나중엔 놓던가?
번역 미스인지는 파악이 안되는데 드루비스 씨라 부르는 건 맞고 반말 존댓말 섞어쓰다 반말이 많아졌어. 버틴이 존대쓰는 사람 중 가장 젊은건 25살 투페 그 아래론 거의 다 반말하더라 - dc App
섹파 구하는건 여기가 제일 쉽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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