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편)에서 이어짐
[10/11 12:58]
집무실에 갔더니 정말로 지갑이 있었다. 중치류 특유의 거대한 이빨자국이 나 있는 건 덤이었다. 지갑을 안주머니 깊숙이 넣고, 방에서 나왔다. 복도를 걷는다. 황무지엔 비가 내린다. 거의 쏟아진다. 천둥, 번개가 친다. 빗방울이 로비 테라스 유리창에 계속해서 선을 긋는다.
오늘은 접견실에 가는 동안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마 클릭이나 콘블룸이 어디선가 듣고 있지 않을까. 네크롤로지스트의 고객들이 날 보고 있을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소름이 돋을 것만 같다.
접견실 문앞. 문을 벌컥 연다. 드루비스씨와 사츠키가 서로 얘기하다 말고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역시 타임키퍼씨군요.”
저 ‘역시’엔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을까.
“미안, 깜빡했어. 노크하는 걸.”
원형 탁상. 기하학적 판자를 덧댄 창문. 그리고... 탁상 위에 미리 준비된 다과. 그녀들의 맞은편에 앉는다. 준비된 다과는... 일본씩 살과자다. 이름이 센베이였나. 구운 것인지 갈색 빛이 감도는데, 김이 붙어 있다. 김... 사츠키 덕분에 처음으로 먹어봤었다. 저런 걸 먹는 사람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막상 먹어보니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사츠키의 특제 라떼. 일본식 커피 답게, 우유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들어간 커피다. 아마도 소네트나 파비아가 본다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버틴씨.”
드루비스씨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녀 둘을 번갈아 본다. 조신히 웃고 있는 사츠키와 침착한 표정의 드루비스씨. 사츠키는 머리카락에 벚꽃을 끼우고 다닌다. 드루비스씨는 겨우살이를 엮어서 만든 머리띠를 하고 다닌다.
“둘 다 식물을 좋아하나 보네.”
내가 말한다. 드루비스씨는 당연하다는 듯 미소를 짓고, 사츠키는 ‘맞아요!’하면서 맞장구를 친다. 이제 잠시 설명할 시간이다.
“접견에 와줘서 고마워. 간단하게 설명을 할게. 접견의 목적은 타임키퍼 소대 마도학자들의 관계 형성을 토대로, 협업력을 증진시키기 위함이야. 이번은 7회차고, 드루비스씨와 사츠키, 두 사람이 오늘 접견의 주인공이야. 특별히 해야 하는 건 없어. 그저 편하게 이야기하면 돼. 못했던 얘기든, 평소 하던 얘기든 상관 없어.”
그렇게 설명한다. 두 사람에게, 이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서로가 서로를 번갈아 본다. 한동안 말이 없다. 주제라도 던져보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던 때, 드루비스씨가 사츠키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이야기한다.
“브라질산 원두군요. 우리 시대의 일본에서 쓰인 원두는 대부분 브라질산 원두였죠.”
그녀가 말하자, 사츠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눈을 마주치긴 어려운지 탁상 위, 커피를 보며 말한다.
“네... 소녀가 있던 도쿄의 카페에서도 원두는 전부 브라질에서 온 거였어요. 드루비스씨는 어떻게 그걸 알고 계세요?”
사츠키가 묻자, 드루비스씨는 나지막이 말한다.
“향만 맡아도 알 수 있죠. 커피 역시 식물에서 온 것이니까요. 물론 시대의 배경지식도 도움이 되죠.”
“우와... 소녀와는 다르게 드루비스씨는 정말 똑똑하신 분이시네요.”
사츠키의 눈이 반짝인다. 지적인 사람을 만났다는 느낌일까. 사츠키는 은근히 학문에도 관심이 많다. 그러니 시집이나 동화책도 읽는 것이리라. 일상적인 대화부터 시작이라. 사교적인 회화에 거부감을 가진 드루비스씨다. 하지만 재능이 아예 없진 않다고 느껴진다.
“사츠키씨,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었어요. 당신에게 그 수갑은 족쇄인가요?”
그렇게 생각했는데, 드루비스씨는 바로 본론을 꺼낸다. 아까 그녀가 숲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족쇄에 관련된 이야기를 했었다. 그걸 사츠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있다. 사츠키가 당황하진 않을까.
사츠키가 자신의 수갑을 내려다본다. 그러면서 입을 연다.
“소녀가 과거에 저지른 일 때문에 생긴... 족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역시는 역시였을까. 수갑은 족쇄다. 그렇게 의미가 다른 말이 아니다. 자유를 제한하는 도구. 그 본질은 같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사츠키는 한 차례 숨을 가다듬더니, 예상치 못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녀는 과거의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분명, 이따금 떠오를 때도 있죠. 어쨌든 있었던 일이니까요. 하지만 소녀에게 있어서 이 수갑은 족쇄가 아닌 완드예요. 과거가 아닌, 오늘을 살아가라는 교훈이기도 하죠. 그리고...”
사츠키가 고개를 든다. 드루비스씨를 똑바로 본다. 진지한 표정의 두 사람. 사츠키는 천천히 말을 잇는다.
“소녀에겐 내일을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어요. 그것을 다시 마주하기 위해... 얼마 전 가상몽유 치료를 받고 온 거예요.”
... 좁다면 좁고, 넓다면 넓은 여행가방 속. 누군가가 아프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대부분의 마도학자들이 곧바로 알게 된다. 소문은 돌고, 사츠키의 입원은 드루비스씨 역시 알았을 것이다.
“전... 가상몽유 치료를 받지 않았어요. 사츠키씨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나요.”
드루비스씨가 묻는다. 그녀의 말을 듣고 사츠키는 천천히 커피를 한 잔 마신다. 그러고는 이상하리만치 힘차게 젠베이를 집어든다. 한 입 깨물어 먹는다. 바스락 소리와 함께, 과자 가루가 미세먼지처럼 떨어진다.
“소녀가 살았던 과거의 홋카이도를 목격했어요. 소녀는 살아남아야 했고, 범죄를 저지르다 끝내 붙잡혔어요. 인간들에겐 마도학자의 피가 흐른다며 멸시 당했고, 마도학자에겐 인간의 피가 흐른다며 환멸 받았죠. 혼혈로서의 차별과 거리감은 소녀의 곁을 늘 따라다녔죠.”
“마치... 고향을 떠나, 아메리칸 드림이란 헛된 꿈을 쫓던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당하던 취급 같군요.”
...
“사츠키, 괜찮아?”
내가 묻는다. 하지만 사츠키는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미소를 짓는다. 드루비스씨가 자신의 머리를 베베 꼰다. 무언가 생각하는 모양이다. 빨간 머리카락이 손가락을 덩굴처럼 3바퀴 둘렀을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복수하고 싶지 않나요?”
드루비스씨의 눈동자가 공허해 보였다. 그 눈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드루비스씨가 지금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와이어하우저 숲에 있다. 잿더미가 된 안개 숲에. 하지만 사츠키의 답은...
“소녀에게 복수심이 없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형무소의 교도관님, 카페 사장님과 아이들... 그리고 여행가방의 마도학자들과 타임키퍼씨. 그리고 드루비스씨도. 소녀가 변해 가는 것에 도움을 줬어요. 저는 알고 있어요. 제 머리카락에 꽂아둔 벚꽃에... 드루비스씨가 마도술을 걸어주셨던 걸요.”
... 그래서 사츠키의 벚꽃이 지지 않고 오래 피어있을 수 있었던 건가.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소녀에게 족쇄를 걸 수 있는 건... 과거로부터 오는 소녀의 나약한 마음 뿐이에요. 하지만 소녀는 더 이상 약하지 않아요. 내일이 있으니까요.”
사츠키는 마지막으로 어떤 시의 구절을 그대로 읊는다. 그것도 영어로 한 글자씩 또박또박. 나는 이 시를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들은 적이 있다.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건강한 몸을 가지고. 욕심은 없고, 절대로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웃는...”
시의 구절은 시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나는 이 시를 영어로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일본어로는 들어봤다. 이 시는 아마도... 아까, 사츠키가 방에서 읽던 그 시. 미야자와 겐지의 ‘비에도 지지 않고’였다.
“드루비스씨... 과거 얘긴 들었어요. 당신은 여전히... 복수를 꿈꾸곤 하나요?”
사츠키가 조심스레 묻는다. 하지만 드루비스씨는...
“복수는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의 자기 위로에 불과하죠. 전 내일을 향해 걸어갈 거에요. 당신이 그렇듯이.”
놀랍게도. 표정의 변화를 거의 드러내지 않던 드루비스씨가... 눈도 입술도 웃는다. 광대도 살짝 올라가 있다. 그야말로 활짝 웃는다. 처음 보는 웃음이다. 하지만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머니의 따스한 웃음 같지도 않다. 마치... 그냥... 그때 고리와 이사벨라의 웃음처럼. 한없이 친구 같은 웃음이었다.
드루비스씨가 사츠키에게 손을 건넨다. 사츠키도 그 손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수갑을 낀 손. 아니, 완드를 낀 손과 어느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맨손이 맞닿는다. 묘하게 벅찬 감정이 든다. 이건 무슨 감정일까. 그런데 드루비스씨의 시선이 내게 돌아온다. 그녀가 내게 말한다.
“버틴씨. 당신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사츠키씨도, 저도, 당신도. 우린 내일을 향해 걸어가고, 살아가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돌아갈 수 있을 거에요. 우리들의 시대에.”
드루비스씨가 내게도 손을 건넨다. 손을... 잡아야지. 그런데 손이 갑자기 안 나간다. 손이... 내 얼굴로 향한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는 얼굴을 가리고 있다. 침을 삼킨다. 속에서 터져나오는 무언가를 꾹 참는다.
“우리는 모두, 두 번째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니까요.”
그것이 차마 새어 나오지 못한 울음이라는 건 한참 뒤에 알 수 있었다.
[10/14 12:33]
“고마워요, 버틴. 덕분에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발명을 끝마쳤거든요.”
X가 갑자기 집무실에 찾아왔다. 한동안 로렌츠에서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찾아오니 뭔가 꿍꿍이가 있나 싶었다. 정작, X는 싱긋 웃으면서 바깥에 손짓을 할 뿐이었다.
“전자동 꽃향기 음료수 제조기 대령이오!”
바깥에서 상당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늘 활기가 넘쳐서 이따금,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알로하, 봉쥬르, 니하오, 곤니찌와, 헬로! 친구들! 부탁대로 여기까지 끌고 왔어!”
레일라니가 손을 흔들며 수레를 끌고 들어온다. 수레 위에는 아주... 들이기 싫게 생긴 물건이 있다. 철로 이루어져 있고, 복잡한 버튼들이 가득하다. 저걸 봐도 나 같은 사람은 무슨 용도인지 알아맞히는 것조차 힘들 것이다. 문제라면... 왜 이 기계가 수레 위에 두 개 씩이냐 있냐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레일라니. 이제 가봐도 돼요. 나중에 아이스크림으로 꼭 보답할게요.”
X가 특유의 미성으로 나름의 인사를 한다.
“좋아, 나중에 시킬 일 있으면 또 불러달라고, X! 이글? 이글! 어딜 도망 가!”
바깥에 이글도 있었나 보다. 레일라니는 곧바로 복도 바깥쪽으로 눈을 돌린다. 그러곤 그녀의 화살이 그러하듯, 쏜살같이 사라진다. 방에는 X와 나. 그리고 그의 독특한 작명 센스가 돋보이는 발명품만이 남는다.
“X. 그... 음료 제조기 말인데, 실패한 거 아니었어? 드루비스씨가 별로 좋지 않은 평가를 내렸던 거로 기억하는데.”
내 말에 X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한다.
“발명품에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따르기 마련이죠. 그렇지 않나요? 버틴.”
“그야... 그렇겠지.”
“그래서, 그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더욱이 업그레이드해서 왔답니다. 진짜 꽃에서 향기를 추출하고, 그것을 음료에 넣는 방식으로 말이죠. 이름하여 전자동 꽃향기 음료수 제조기!... 죠.”
...
“꽃을 따면 드루비스씨가 많이 싫어할 텐데?”
당연한 걱정거리였다. 드루비스씨의 나무 뿌리 감옥 희생자를 만들고 싶진 않았으니까. 이미 일전에 디거스가... 아무튼 내가 묻자, X는 이미 해결했다는 듯 당당한 태도로 말한다.
“꽃을 따지 않고, 떨어진 꽃잎을 재활용하면 돼죠, 버틴. 발명은 때론 역발상에서 오는 법이거든요.”
...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왜 기계가 두 개인 거야? 수요가 많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내 질문에 X는 자신의 발명품 옆으로 다가간다. 양쪽 기계에 손을 얹더니 이내, 설명을 시작한다.
“왼쪽은 1호기, 꽃향이 나는 탄산음료를 만들죠. 하지만 오른쪽 2호기는 기능이 조금 달라요. 바로 맥주를 만들 수 있거든요.”
...
“X. 우리 소대에 미성년자가 많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는 거지?”
내 질문에 X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답한다.
“물론이죠. 저도 미성년자인걸요?”
...
“제단에서 문제 삼을지도 몰라.”
X의 황당한 발명품에 그렇게 말한다. 규율을 중시하는 마틸다나 소네트 입장에선 고깝게 보일 물건이다. 제단에서 알게 된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X는 그 특유의 머리에 손가락 총을 쏘는 제스처를 하며 답한다.
“발명가의 위대한 발명은 제아무리 제단이라도 막을 수 없답니다. 버틴. 걱정 마세요. 티토씨가 이 발명품의 일련번호를 조작해서, 이미 제단에 승인된 물품으로 나오거든요.”
... 괜찮은 걸까. 다른 곳에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서, 네 발명품은 어디에 쓰려고.”
내가 묻자, X는 창밖을 가리키면서 말한다.
“황무지의 플라워 가든에 벚꽃이 핀 거. 알고 있나요? 버틴.”
고개를 끄덕인다. 10월이긴 하지만 황무지에서 벚꽃이 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최근, 사츠키와 드루비스씨가 벚꽃 구경을 다닌다는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게 무슨 관련일까. X가 말을 잇는다.
“벚꽃이 떨어질 때가 됐어요. 흩날리는 벚꽃 속에서 꽃 구경을 하며, 벚꽃 향이 나는 음료와 맥주 한 잔. 나름 괜찮은 아이디어 아닌가요?”
음. 확실히... 마도학자 간의 친분 관계를 너무 접견에 의지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단체로 나들이를 가는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가 아닐까 싶다.
“괜찮은 것 같아. 그런데, 그러려면 다른 마도학자들에게도 연락을 해야...”
“그건 괜찮아요. 이미 Z씨를 통해 타임키퍼 소대 마도학자들에게 모두 연락을 돌렸거든요.”
... 그가 내 말을 끊고 그렇게 말한다. 이미 연락을 돌렸다고? 그가 말을 마치고 로렌츠 제복에 새겨진 나비 문양을 매만진다. 그에게 말한다. 이 공교로운 상황을.
“상황이... 정말 공교롭네. 우연이라기엔 너무나도 짜여진 것처럼. 벚꽃이 피는 시기도. 네 발명품도. 그리고 Z씨의 허락도...”
그러자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그렇게 답했다.
“세상에 우연은 없답니다, 버틴. 모두 규칙의 회전으로 만들어졌을 뿐이죠. 남은 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뿐이고요. 우리의 첫만남처럼 말이죠.”
의미심장한 말을 마친 그는 발명품으로 다가가 기계를 조작한다. 그의 1호기가 트랙터에 시동을 걸듯, 털털거리는 소리를 낸다. X가 어디선가 나타난 자신의 찻잔을 기계의 벨브 아래에 놓는다. 그가 벨브를 열자, 음료가 나온다. 그가 음료를 내게 내민다. 무색 투명하지만, 집무실 내에 향긋한 벚꽃 향이 가득 퍼진다.
“드셔보세요, 버틴.”
음료를 마신다. 약한 체리맛. 적절한 탄산. 그리고 벚꽃의 향기. 인공적인 향이 아닌, 진짜로 벚꽃 잎에서 추출한 것 같은 자연스러운 향.
“괜찮네.”
X는 씨익 웃으며, 집무실 문 앞으로 향한다. 그의 기계가 올려진 수레를 끌고, 내게 그렇게 말하며 인사한다.
“조만간 플라워 가든에서 봐요, 버틴.”
[10/16 14:22]
“가끔은 이렇게 느긋하게 있는 것도 괜찮지 않나? 버틴.”
황무지의 플라워 가든. 계속해서 넓어지는 황무지 안에서도 유독 오래 있었던 곳이다. 플라워 가든 인근에는 라이트 온실이 있고, 그 근처로 목제 테이블이 다수 있다. 나무 벤치에 앉아, 황무지의 햇살을 맞는다. Z씨도 축제를 맞아, 이곳 여행가방 속 황무지에 왔다. 그녀는 웬일로 X의 발명품으로 만든 에일을 마시고 있다.
“자네도 마셔보고 싶나?”
그녀가 내게 잔을 건넨다.
“아뇨, 괜찮습니다.”
정중하게 거절한다. 그러자 옆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친다. 딱딱한 손가락이다. 동시에... 뭔가 이국적인 향이 난다. 고개를 돌린다. 갈기모래씨가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다.
“이봐, 진지한 친구. 어른이 주는 건 거절하지 않아도 돼. 내가 산 속에 있었을 때, 스승님이 젊은 내게 술을 건넸었지. 물론 내가 젊었음에도 미성년자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때 술을 처음으로 마셨어. ‘찬’이라는 술이었는데 곡물로 만든 탁주였지. 물론 인도는 힌두교 문화라 술을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스승님은 곡물을 자연의 선물이라면서 내게 주셨어. 이 맥주도 똑같지. 벚꽃 잎이 떨어지고, 그것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도 물론 자연의 순리대로라면 있어야 할 일이겠지만. 맞아. 또 내가 산 속에 있었을 때...”
... 그가 술냄새를 풍기며 얘기한다. 알코올 냄새와 벚꽃 향이 섞여서 난다. 그리고... 말이 많다. 너무 많아서 어느 순간부터 그의 목소리가 안 들리기 시작한다.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로 필터링 없이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갈기모래씨의 말이 끝도 없이 이어지자, Z씨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버틴에게도 자유 의사가 있지. 당신이 산 속에서 머물렀을 때, 다양한 자유 의지를 보여줬듯이.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떠드는 게 어때. 저쪽 구석 자리에서.”
Z씨가 코가 빨개진 갈기모래씨를 데리고 구석 자리로 향한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고, 갈기모래씨는 한참 동안 말을 늘어놓았다. 다행이도 그 말들이 내게 들리진 않았다.
혼자 앉은 자리. 주변을 둘러본다. 소네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마틸다. 티폰 인형을 들고 간이 연극회를 하는 소더비. 그걸 흥미로운 듯이 지켜보는 보이저. 갈라보나씨의 무릎 위에 앉아, 벚꽃을 조용히 지켜보는 피클즈. 반짝이는 눈으로 다과를 마구 집어먹는 콘블룸.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를 계산하는 37과 멋대로 음악을 트는 레굴루스까지.
그 어느 하나 제대로 조화가 된 풍경이라 할 순 없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행복을 찾았을 테다. 그거면... 된 거겠지.
“밀밭을 휘젓는 귀뚜라미 떼처럼 소란스럽네요.”
자연적이면서도 부정적인 묘사. 드루비스씨가 어느새 내 앞자리에 앉아 있다. 그녀의 손에도 에일이 들려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전통 켈트족 술잔처럼 생겼다.
“드루비스씨. 벚꽃으로 만든 에일인데. 어떻게 생각해.”
내가 묻자, 그녀는 멀리 떨어지는 벚꽃을 보면서 말한다.
“대지 위에서 자라난 벚나무, 그리고 꽃잎. 그것이 땅으로 돌아가 토양의 양분이 되는 것도 좋겠죠. 하지만, 이런 쓰임새도... 떨어진 벚꽃을 사용하는 거라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녀가 에일을 마신다. 그러면서 약간의 설명을 덧붙인다.
“켈트 맥주도 에일이죠. 오크통에 숙성을 해야 해요. 마실 때 꽤나 쓴맛이 두드러지곤 하는데, 이 맥주는 놀랍게도 에일에 가까운 맛이에요. 거기에 벚꽃 향까지.”
내가 앉은 자리 역시 나름대로 구석자리다. 갈기모래씨와 Z씨가 앉은 곳보단 덜하지만. 드루비스씨는 이 자리의 고요를 즐기는 듯하다. 시끄러운 자리는 익숙치 않은 그녀일 테고, 나도 소란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나는 음료를, 그녀는 맥주를. 조용히 마시고 있는데 난데없이 누군가가 난입한다.
“여어, 우리 레이디들! 맥주 마셔봤어? 이거 진짜 끝내주더라.”
혀가 꼬인 릴리아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잔을 들고 있다. 그녀가 내 옆에 앉는다. 갈기모래씨보다도 지독한 술냄새가 난다.
“릴리아. 넌 보드카가 더 취향에 맞는 거 아니었어?”
내가 말하자, 그녀가 실실 웃으며 답한다.
“내겐 국산 술인 즈브로가 훠얼씬 맞지만 말이야. 이것도 꽤 괜찮은 술이다, 이 말인 거지.”
그러자 드루비스씨가 의외의 말을 꺼낸다.
“즈브로카는 러시아 술이 아니에요, 릴리아씨. 폴란드산 향보드카죠. 안에 들어 있는 바이슨 초도 폴란드의 자생종이고요.”
... 릴리아가 러시아 술을 마신다고 생각했는데, 폴란드 술이었나?
“앙?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모든 보드카는 러시아에서 통한다고!”
릴리아는 그 말을 남기고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잠들었다. Z씨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도 괜찮은 걸까.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걸까. 맥주에 약한 걸까. 무엇도 알 순 없다. 어쨌든 그녀가 잠들었으니 다행이다. 왜 다행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비밀이다.
어디선가 바람이 분다. 벚꽃이 흩날린다. 모두의 시선이 떨어지는 벚꽃에 집중된다. 이곳에 있는 것 중에서도 가장 큰 벚나무 앞. 사츠키가 눈을 감은 채, 떨어지는 꽃잎을 모두 맞고 있다. 곧이어 그녀가 한 차례 자신의 수갑... 아니, 완드를 휘두른다. 쇠사슬이 춤을 추듯, 허공을 가르자 산토끼 두마리가 나타난다. 그것들이 공중을 뛰어다니며 벚꽃잎을 사람들에게 나른다. 마치 바람처럼.
“그녀는 강해요.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벚꽃처럼.”
드루비스씨가 흘러가듯이 말한다. 그녀가 사츠키를 보고 있다. 곧, 사츠키가 주변을 둘러보다 우리와 눈이 마주친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꽃차라도 드시겠어요? 타임키퍼씨, 드루비스씨.”
...
“사츠키, 지갑이 사라졌어.”
...
“소... 소녀가 생각하기엔 타임키퍼씨의 방에 있는 게 아닐까요?”
그녀 등 뒤에 뛰어다니는 산토끼의 이빨에... 내 지갑이 물려있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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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또 문신수갑도둑이야
이제 도둑질해야 할 이유는 없어졌지만 오랫동안 그걸로 생계 연명했던 애 입장에서는 생존본능처럼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을 듯 버릇이란 게 그렇고
근데 알빠노 가련하고 강인한 벚꽃잎 같은 앤데 도벽이 있어도 사랑할 수 있음
울면서 드황 15공명찍으러 간다
사츠키 스토리는 그런 면모들 때문에 개인적으로 제일 재밌게 쓴 것 같아 - dc App
난 이제 진짜로 도둑질 안하지 않을까 했는데 되새겨보니 얘 과거가 ptsd 안생겼으면 이상할 수준이라 후유증마냥 상습절도하는 것도 납득되는듯 제발저리는 대사 나오는 것도 이상하고 ㅋㅋ
ㄹㅇ 이렇게 글로 풀어서 캐릭터한테 입체감 준 거 읽으니까 애정이 더 깊어지는
그와중에 갈모형 기습연설 개터짐 분위기 완급조절 ㅆㅅㅌ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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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뒤에 ~씨 붙으니까 어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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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타임키퍼씨 같은, 직책 뒤에 씨라는 단어가 붙는게 어색하단 뜻이면 이건 인게임에서 실제로 사츠키가 '타임키퍼 씨'라 부르는거라 어쩔 수 없을 듯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