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마도학자 접견 일지
· 제 8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 제 7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벚꽃 에일 (하편)
· 제 7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벚꽃 에일 (상편)
· 제 6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찰리와 보이저의 아리아
· 제 5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네크롤로지스트의 약속
· 재업)제 4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콘블룸의 목소리
· 제 3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크리스탈로의 눈물
· 소설) 제 2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과학과 철학
· 소설) 제 1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삼나무와 어린 장미
* 인지도 떨어지는 인물들을 주제로 작성함. 이로인해 발생한 문제는 존 티토와 TTT 둘 모두 떡밥 회수가 전혀 안 된 인물들임. 때문에 상상의 영역에서 따온 내용이 많을 수 있음.
1. 실존했던 자칭 시간 여행자를 모티브로 딴 존 티토와 TV 속의 마도학자, TTT에 대한 이야기임.
2. 존 티토의 완드는 IBM사의 IBM 5100이 모티브임. 작중에선 IBM이 아닌, IDM 5100으로 불림. 회사 이름도 IDM사로 동일. 이유는 상표권 문제로 추측할 수 있겠으며, 본 창작물에서도 회사 이름을 IDM으로 통일함.
3. 어디까지나 2차 창작이므로 본문의 모든 설정과 스토리는 추후 메인스 업뎃에 따라 오류가 될 수 있음.
4. 연재 주기는 정해져 있진 않은데 못해도 달마다 한 편은 올릴 예정.
5. 아스키코드 16진수 변환을 통해 존의 대사를 작성했음. 다만 의도적으로 뜻풀이를 하지 않았음.
6. 오랜만인데 기다렸을 사람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재밌게 읽어주길 바랄게. 다음이 벌써 10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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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건 내가 한때 사람이었다는 거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언제 태어났을까. 지금은 언제일까.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다.
고개를 내려본다. 체크무늬 치마와 빨간색 자켓. 여느 학생복과 다를 바 없는 옷. 학생복? 나는 상식을 가지고 있다. 상식은 있는데, 왜 기억은 없을까.
새까만 공간. 빛이라곤 하나도 없는 공간임에도 내 모습은 선명하다. 검은 도화지 위에 그려진 유화 그림처럼 말이다. 이곳은 어딜까.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한다. 그것이 1번, 2번. 100번. 1000번.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반복되고 나서야 내 앞에 작은 창문 하나가 나타났다. 투명한 창문. 그 너머에는 분명 누군가가 있었다. 과학자일까. 하얀 코트를 입고, 안경을 쓴 젊은 남자다.
창문으로 다가간다. 하지만 그 빛은 오래 가지 않았다. 창문이 눈 깜빡할 새에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새까만 공간. 모든 것은 공허로 돌아갔다. 나는 그 중심에 서 있다.
또 다시 반복되는 시간. 이상하게도 허기짐도, 목마름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가 없을까. 나는 사람이다. 사람이다. 사람이다. 사람이다. 사람인... 가?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무한한 추궁을 한다. 시간이란 것이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이 미지의 공간 속에서 머릿속에 남은 거라곤, 단 한 번 뿐이었던 빛이다. 창문 너머의 빛과 젊은 남자.
할 수 있는 거라곤 하염없는 기다림 뿐이다. 잠에 든다. 사실 잠이라고 하기에도 뭐하다. 할 수 있는 게 없고, 졸리지도 않다. 그냥 눈을 감는다. 시간을 보낸다. 아니, 시간을 죽인다.
...
...
...
‘성공했어. 성공했다고!’
‘프로토콜이 완성됐습니다. 명칭은 월드 와이드 웹으로...’
‘윈도우의 상용화가...’
‘야후!가 요즘은 핫하지...’
‘HTML의 추가적인 개선을 요구하여...’
꿈일까. 적막만이 감돌던 공간에서 차츰 소리가 생겨난다. 차라리 꿈이 계속된다면 좋겠다. 나 혼자만이 남은 이 세계가 싫다. 그러다 눈을 비비적거리며 우연히 뜨게 됐다. 눈앞의 세상에 더 이상 공허는 없었다.
세상 모든 곳이 창문으로 가득했다. 혹자들은 이것을 ‘화면’이라고 불렀다. 창밖의 사람들이 저마다 웃고, 울고, 떠들고, 이야기를 나눴다. 더 이상 이곳은 공허가 아니었다. 빛과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이었다.
그 뒤로, 이 세계의 끝이 어딜지 궁금하여, 한 없이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힘들진 않았다. 체력이 마치 무한한 것 같았다. 창... 아니, 화면은 점점 더 많아지고, 곧이어 검은 공간을 찾기가 더 힘들어질 정도로 빼곡해졌다.
그들이 하는 언어들. 그들의 이름. 모든 것이 화면에 적혀 있었다. 나는 그들의 말과 행동을 배웠다. 배우면 배울 수록, 아무것도 없던 나 자신의 마음에 무언가가 쌓여가는 것만 같았다. 만족감일까. 충족감일까. 어떤 것인지 구분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이전보단 나았다.
그러다 문득, 화면 하나를 두드렸다. 젊은 흑인 소녀가 화면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빠, 컴퓨터가 이상해.’
이상해? 뭐가. 나는 소녀가 나타난 화면을 두드리며 물었다. 내 기억이 시작되고, 아마도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엠마? 네 이름이 엠마야?”
화면에 나타난 이름을 그대로 말했다. 동시에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화면 너머의 흑인 여자 아이, 엠마는 공포에 질린 두 눈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방 밖으로 나가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
“엠마? 무슨 일이야! 그런데 네 이름이 엠마가 맞긴 하니?”
말을 걸어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누군가가 나타났다. 엠마와 똑같이 흑인이었다. 남자였고, 엠마와 이목구비가 닮았다. 저걸 아버지라고 하겠지?
“엠마 아버님이세요? 여보세요? 들려요? 들리나요? 저기요?”
최대한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방구석에서 야구배트를 가져온다. 그리고 그걸로 화면을 내리친다. 순식간에 화면이 꺼진다.
...
내가 뭔가 실수라도 한 걸까. 그 애의 이름이 엠마가 아니었던 걸까. 사실 클라라 같은 이름이었던 거지. 흔한 이름이니까. 아마도 말이야.
...
말을 걸기가 무서웠다. 그 뒤로는 그저 걷기만 했다. 화면은 점점 더 많아지고, 언제부턴가 그 화면들이 마치 파도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화면들이 모여들고, 나는 그 한 가운데에 서 있다. 세상이란 바다가 흐르고, 나는 물살을 온전히 맞고 있다.
그 무렵부턴 조용히. 아주 조용히. 다른 이들의 이야기들을 들었다. 할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아주 흥미로웠다. 내가 이렇게 되기 전에 기자 노릇이라도 했던 걸까. 다른 이들의 이야기들은 내 속으로 밀고 들어오고, 비어있던 비커에 물이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 비커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일까. 보이지 않는 공허는 계속해서 나를 방문했다. 그럴 수록 나는 공허해지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너의 이야기가 궁금해.
내게 말해볼래?
어니언링이랑 팝콘도 챙겨와서 내게 살짝만 말해봐. 친구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또 다시 그 새까만 공허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될 거야.
미쳐버릴 거야.
그러고 싶지 않아.
날 두고 가지 마.
제발.
사라지고 싶지 않아.
[11/25 17:44]
“무아상 선생님! 생일 축하해요!”
간만에 여행 가방 로비 안엔 수많은 마도학자들이 모였다. 오늘은 11월 25일. 무아상씨의 생일이다. 폭풍우가 내린 뒤로 마도학자들 간의 나이에 경계가 사라졌다지만, 무아상씨에 대한 이미지는 여전히 연장자에 속한다.
소더비의 주최 하에, 오늘 5시부터 성대한 생일 파티가 열렸다. 커튼을 새로 치고, 테이블을 정리했다. 로비를 가득 채울 만큼 길어진 테이블. 또한 소더비가 좋아하는 여러 음식들. 스테이크, 하몽, 양젖 우유, 화덕 피자와 파스타.
무아상씨는 테이블의 중간에 앉아 있었고, 양옆으론 소더비와 소네트 등등 수십 명의 마도학자들이 모여 있다. 혼자서 술을 마시는 릴리아와 겜블러 3인방까지. 다만, 라플라스의 인원들은 오늘 이곳에 참석하지 못했다. X는 라플라스를 대표해서 선물의 의미로 ‘전자동 촛불 불 붙이기’를 주고 갔다. 물론 그 괴상한 기계를 쓰는 일은 없었다.
“고마워요, 여러분들 모두. 소더비 아가씨,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무아상씨가 온화한 미소로 모두를 바라본다. 다만 개성 특출난 마도학자 집단 답게, 무아상씨의 말에 유달리 집중하진 않는다. 그저 본인들의 이야기를 하고, 무언가를 먹기 바쁘다.
“버틴! 원래 여행 가방에서는 항상 이렇게 성대한 파티를 하는 건가요?”
스파토데아가 내게 다가와 묻는다. 바로 옆엔 조그맣게 타오르는 울루도 함께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
그렇게 답한다. 그러자 스파토데아가 울루를 받쳐 들면서 말한다.
“그래도 해도 되는 거죠? 나중에 울루의 생일이 오면, 모두 함께 이런 자리를 마련해보고 싶어요!”
스파토데아의 말에 울루의 불이 차츰 사그라든다. 그러다가 그녀가 헛기침을 하면서 말한다.
“에헴. 플래미. 이 나이가 되면, 생일 파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그저 태어난 날의 반복일 뿐인 걸.”
“에? 하지만 울루, 너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생일 파티를 한 적이 없잖아. 한 번 정도는 챙겨주고 싶은 걸.”
스파토데아와 울루가 서로 대화하며 본인들 자리로 돌아간다. 나는 어디에 있냐고. 그저 구석 자리에 서 있다. 사람들이 많은 자리. 내 자리도 물론 있지만, 지금은 서로 떠들도록 두는 게 나을 것 같다.
“하암. 너도 하나 먹을래?”
어느 순간, 베이비 블루가 내 옆에 있다. 주홍색 머리에 하늘색 드레스. 그녀가 내게 초코칩 쿠키를 건넨다.
“나는 괜찮아, 베이비 블루.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챙겨줘서 고마워.”
“그래...”
내 답변에 그녀는 하품을 크게 하며, 초코칩 쿠키를 입에 넣는다. 그러고선 우물우물 씹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테이블 쪽을 본다.
“야! 칠면조 다리는 내 꺼라고! 건들지 마!”
칠면조 다리를 개걸스럽게 뜯어먹는 레굴루스.
“이런 건 다 현상 세계의 부스러기에 불과해.”
왜인지 뾰로통한 표정의 37.
“핫핫! 이 몸이 바로 바이킹이시다!”
장난감 배를 들고 뛰어다니는 에릭. 다들 참... 개성 넘치게 파티를 즐기는구나.
“소란스럽군요.”
담담하고 낮은 목소리. 어느새 내 옆에 6이 서 있다. 큰 키와 금발. 긴 속눈썹. 책을 들고 있었는데, 책 제목은...
“헨젤과 그레텔?”
아마도 과자 집과 관련된 내용이었는데... 맞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의 이미지와는 굉장히 상반된 책 제목이지만, 6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읽은 것 같다. 바로 내게 그렇게 말한다.
“동화에서도 배울 점은 많습니다. 어린 아이와 어른이 같은 동화를 읽는다면, 서로 다른 점을 느끼게 되곤 하죠.”
그가 펼쳐둔 책을 덮고, 팔과 허리 사이에 책을 끼운다.
“독서에 방해가 된 것 같네. 6. 오늘 무아상 씨의 생일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거든.”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한다. 하지만 6은 별로 개의치 않은지 내게 말한다.
“누군가의 탄생을 축복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큰 의미가 있는 일일지도 모르죠.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잠시 해변을 산책하고 오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마치고 복도 끝으로 걸어간다. 아마도 숙소를 나갈 문을 찾으러 간 것이리라. 여행 가방의 마도학자들이 늘어나고, 신경 쓸 거리는 많아졌다. 그들 모두를 책임져야 하는 내 입장에선... 솔직히 부담이 생긴 것도 없지 않아 사실이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물이라도 마실까. 아니면 홍차? 커피? 답은 모르겠다. 그래도 복잡한 표정을 지어선 안 된다.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이 괜히 눈치를 보면 안 되니까.
“4869.”
... 무덤덤하고 기계적인 목소리. 오늘은 여러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구나.
“안녕, 존. 손에 든 그건...”
존이 손에 든 게 웬일로 IDM 5100이 아니다. TV다. 그것도 어디선가 많이 봤던, 아주 익숙한 모양의 TV.
“헤이! 안녕하세요, 버틴 씨!”
티토가 TV 전원을 키자, 약간의 잡음과 함께 TTT의 얼굴이 나온다. 그것도 아주 커다랗게 확대 되어서. 초록색 눈과 갈색 머리카락.
“저만 쏙 빼고 파티라니. TV 속에 갇혀 있다고 너무 모른 채 하는 거 아니에요?”
확대된 TTT의 얼굴에서 약간의 짜증과 원망이 느껴진다. 표정 변화가 다양한 그녀답다.
“그럴 의도는 없었어. 소더비가 마틸다에게 부탁해서 모든 마도학자의 방문 앞에 초대장을 뒀거든.”
“저에게 발이 없단 걸 잊진 않았겠죠? 물론... 그러니까... 정확히는 제가 아니라 TV에 발이 없는 거지만요.”
단지 내가 잊은 부분이 있다. 첫번째는 마틸다가 천재일 지언정 센스가 넘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는 그런 센스 없는 마틸다가 스스로 움직이기 어려운 TTT의 방문 앞에 초대장만 덜렁 놓고 올 거란 걸 생각하지 못 했다.
“아무튼... 고마워, 존. TTT를 데려와줘서.”
“53757265.”
... 존이 아스키코드로 말을 한다는 건 안다. 물론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X 말고는 없을 거다. 아마... 뭐 알았다는 뜻이리라. 존은 브라운관 TV를 생일상 쪽으로 갖다 놓는다. TTT가 성을 내고, 다른 마도학자들은 그럼에도 TTT를 반겨준다.
그런데 정작 존은 자리에 참석하지 않고, 곧바로 내가 서 있는 쪽을 스쳐 지나간다. 파티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걸까.
“존. 너는 파티에 참석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묻자, 존이 무뚝뚝하게 안경을 고쳐쓰며 말한다.
“53746F70626F74686572696E676D65.”
... 그녀는 그렇게 복도 어딘가로 향했다. 마도학자들은 저마다 개성이 넘친다. 계속 언급하지만 명확한 사실이다. 존은 그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독특한 마도학자다. 생일 파티가 거하게 열렸고, 모두가 웃고 떠든다. 하지만 6이나 존처럼 혼자 다니는... 엄밀히 말해 사교성이 떨어지는 마도학자들 역시 존재한다. 왜인지 다음 접견 대상이 예상되는 건 기분 탓일까.
[12/05 12:22]
“오랜만이네, 버틴. 그동안 잘 지냈나?”
오랜만에 Z 씨의 사무실이다. 창백한 제단의 공간. 여느 때처럼 자스민차를 마시는 그녀다. 그녀의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들을 미루어 짐작하면, 오늘은 접견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다.
구석에 놓인 접이식 의자를 가져온다. 테이블 앞에 두고,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그녀는 고요히 차를 마실 뿐, 한참을 말하지 않는다.
“잘 지냈습니다, Z 씨. 호출을 받고 왔습니다. 오늘은 어떤 일로 부르셨나요.”
내가 묻는다. 그러자 Z 씨가 안경을 벗는다. 민낯의 Z 씨다. 자주 볼 일이 없는 모습이다.
“글쎄. 접견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 그런데... 이번에도 특이사항이 있어서 말이네.”
... 특이사항. 접견은 기본적으로 마도학자 간의 교류를 통해 팀워크를 증진시키고자 진행되는 업무다. 하지만 지금까지 몇몇 접견은 특이사항이 있었다. 이터니티 씨와 크리스탈로의 접견이 대표적이다.
“어떤 사항일까요.”
내가 묻자, 그녀가 콧잔등을 매만진다. 인상이 조금 찌푸려진 상태다. 그녀는 말 없이 테이블 아래 달린 서랍을 뒤진다. 그러다가 어떤 신문 한 장을 꺼낸다.
“뉴욕의 띵띵(ThinkThing) 매거진이야. 찌라시를 다루긴 해도 나름 두터운 구독자층을 보유한 신문사지. 한 번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네.”
... 띵띵 매거진. 일단 들어본 적은 없다. 뉴욕의 신문사라 그런가. 일단 그녀가 준 신문을 받는다. 그렇게 두껍진 않다. 오히려 얇고 별 내용이 없는 편에 속한다. 이곳 저곳을 둘러본다. 그럼에도 특별한 내용은 없다. 신생아가 6층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남은 비결. 제임스 본드와 마도학자 배우 간의 사생활... 대부분 가십거리로 보기 좋은 내용들이다.
“어떤 부분을 봐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Z 씨.”
솔직하게 말씀을 드린다. 그러자, Z씨는 신문을 다시 받고는 오른손 근처에 있던 볼펜으로 신문 한 구석에 동그라미를 친다.
“여길 보면 이해가 될 거야. 버틴.”
그녀가 다시 신문을 건넨다. 다시 받아든 신문. 까만색 동그라미가 가리키는 곳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글씨가 쓰여 있다. 고작 4줄 짜리 찌라시였다.
‘죽은 마도학자의 원념인가? TV 속에서 붉은 체크무늬 재킷을 입은 소녀 유령이 나타나다! 여자 유령, IDM사의 PC 사업부 뉴욕 본부에서 비밀번호를 탈취?’
...
“IDM이 어떤 회사인진 알고 있겠지, 버틴.”
IDM사. 마도학 기술과 컴퓨터를 접목시킨 최초의 회사다. 그리고...
“존이 수석 엔지니어로 일하는 회사죠.”
Z 씨가 다시 안경을 고쳐 쓴다. 아무래도 윗선에서 압박이 꽤나 들어왔던 모양이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을 지긋이 감고, 혼란한 마음을 감춘다. 다시 천천히 자스민을 들이킨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연다.
“IDM에서 온 고소장은 재단의 법무부와 내 재량으로 처리할 수 있네. IDM이 정확한 범인을 특정하진 못했지만, 일단 회사의 정보를 어느 마도학자에게 완전히 도둑맞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때마침 이런 일화가 찌라시로 흘러들어갔고, 유감스럽게도 묘사된 모습이 TTT와 매우 흡사하지. 법무팀에선 IDM사의 집단 환각을 주장할 생각이지만... 우리 쪽에서도 나름대로 일부 사고뭉치 마도학자들에 주의를 줘야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네.”
그러면서 그녀가 파일을 내민다. 파일은... TTT와 존 티토의 내용이 담겨 있다. 두 사람의 개인 파일이다.
“이번 접견 대상이네. 물론 재단 윗선에서도 TTT를 범인으로 단정짓지는 않았어. 다만 더 이상 사건이 소란스러워지길 원치 않는 게 재단의 입장이야. 이해해줬으면 좋겠네. 자네가... TTT와 티토의 연결점이 되어주게. 티토가 TTT에게 악감정을 품을 수도 있으니. 타임키퍼 소대의 내분은 위험하지 않겠나.”
고개를 끄덕인다. 만일 TTT가 IDM사의 데이터를 탈취한 거라면... 그것은 온전히 내 책임이다. 내 책임이라 싫은 게 아니다. 내 책임이기에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Z 씨. 손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거 아니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창가 쪽으로 간다. 블라인드에 잘려나간 빛줄기가 Z 씨의 얼굴을 비춘다.
“아, 그리고. TTT가 정말 데이터를 탈취했는지에 대해서도 확인해주길 바라네. 윗선에 보고하진 않겠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알아두고 싶어서 말이네.”
[12/11 11:22]
Z 씨로부터 임무를 하달 받은 이후부터, TTT와 존의 행적을 줄곧 감시했다. 둘은 뭐랄까. 원래 이랬나 싶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지냈다. 기존에 접견을 하던 마도학자들과는 다른 경우다. 원래 접견 대상들은 보통 교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면식 정도만 있는 게 평균이란 말이다.
그런데 TTT와 존은 계속 붙어 있다. 존의 손에 IDM5100보다 그 무거운 TV가 들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존은 IDM의 수석 엔지니어고, TTT는 그 회사의 중요한 비밀을 가로챘을 수도 있는 사람이다.
충분히 존이 원한 관계를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렇게 같이 지낸다니.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내 입장에선 오히려 잘 된 거긴 하다. 적어도 존과 TTT를 따로 찾아서 접견을 안내할 필요는 사라졌으니까.
이곳은 황무지. 그 중에서도 기하학 해변이다. 아페이론 섬의 기하학 해변을 그대로 본뜬 것 같은 곳이다. 보통 6를 제외하면 거의 오지 않는 곳이다. 마도학자들 대부분이 이곳은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혼자 있길 좋아하는 6의 유일한 산책로이다. 건드리고 싶지 않겠지.
그런데 오늘, 이 해변에는 발자국 하나가 남는다. 모래사장에 뭉특하게 찍힌 존의 발자국.
“존, TTT. 여기 있었네.”
바닷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해변의 하얀 모래알들이 바람을 타고 새로운 모래 언덕을 만들어낸다. 존과 TTT가 내 쪽을 바라본다.
“5768617468617070656E64.”
...
“아, 버틴 씨! 티토 씨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본 거예요!”
“아, 그래...”
IDM5100이 번역해주지 않는 대신, TTT가 번역을 해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너희를 찾고 있었어. 접견 때문에. 너희 둘의 접견이 오늘 예정되어 있거든.”
내가 말하자 존이 답한다. 늘 그랬듯 무뚝뚝한 숫자와 영어의 배열로.
“49742773626F74686572696E67.”
“아! 티토 씨가 귀찮으시대요!”
... 대부분의 마도학자들은 적어도 접견에 호의적인 편이었다. 존은 그렇지 않은 편인 것 같다.
“재단에서 정식으로 받은 임무야. 꼭 참여해줬으면 해.”
내가 말하자 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돌아서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당황스럽다.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티토 씨? 티토 씨? 잠... 잠깐만요. 저는 해보고 싶어요. 접견.”
TTT가 존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존이 유독 TTT의 말에 흔들리는 것 같다. 존이 TV 속 그녀에게 말한다.
“497427737573656C657373.”
“그... 물론 필요 없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웬만하면 버틴 씨가 시도하는 건 다 해보고 싶은 걸요. 우리들의 은인이잖아요?”
TTT의 말에 존이 내 쪽을 돌아본다. TV 속 그녀의 얼굴도 눈에 보인다. 그녀가 열심히 화면을 두드리고 있다. 물론 그 어떤 진동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존의 마음을 돌리는 데엔 성공한 걸까?
“44616D6E.”
아마도 시도해보자는 뜻이겠지.
“승낙해줘서 고마워, 존.”
내가 말한다. 그러면서 손을 내민다. 악수의 의미다. 그런데 존은 구겨진 표정으로 나를 보고, TTT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그게... 버틴 씨. 방금 티토 씨가 욕한 거예요. 망할... 이라고.”
...
“아... 미안.”
손을 거두고 사과한다. 그러자 존이 한숨을 쉬더니 TTT와 무언가 속삭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하는 대화가 내게 닿진 않는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존이 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끄덕인다. TTT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버틴 씨! 해결 됐어요! 접견실은 1시 맞죠?”
그녀가 말한다... 말했는데, 나는 시간과 장소를 알려준 적이 없다.
“어... 맞아. 그런데 어떻게 안 거야?”
내 의문에 TTT가 콧잔등을 올리고 말한다.
“비밀 이야기는 저의 전문 분야잖아요?”
그녀의 말이 끝나고, 존이 TV를 내려놓는다. 그녀가 무표정으로 내게 손을 건넨다. 얼떨결에 그녀의 손을 잡는다. 내 모습이 어때 보였을까. 엄청 멍청하게 보였을지도. 그녀가 말한다.
“4F6E6C79746869736F6E6365.”
“아, 티토 씨가 이번만 봐드린대요!”
[12/11 12:49]
아직 집무실. 서류 정리로 복잡하다. 보고서를 작성하는 건 아니다. TTT와 존에 대한 접견 전, 미리 알아둘 사항에 대해 숙지하는 거다. TTT는 네트워크로 연결 된 모든 화면에 나타날 수 있다. 원리는 모른다. 해킹 능력에 관련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다만 가능성을 점치는 문장은 자료에 존재한다.
존은? IDM의 수석 엔지니어다. 주로 X와 함께 출장을 나가는 편이다. 라플라스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는 엑스트림 텔런트에 조연으로 출연. 그 외엔... IDM의 보안 프로토콜도 존이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는 문장도 존재한다.
이른바 창과 방패의 두 사람이다. 분명 서로 악감정을 가지고도 남았을 텐데... 어째서 존이 TTT에게 그렇게 약한 걸까. 혹시 약점이라도 잡힌 걸까. 아니, TTT가 그럴 만한 존재는 아니다. 그녀는 단순히 비밀들을 듣는 걸 좋아할 뿐, 그걸 무기로 이용할 존재는 아니다.
어지럽다. 에즈라한테 형광 진달래차라도 부탁해볼까. 두통을 애써 무시하고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자료를 가지런히 모은다. 오늘은 자료가 좀 많다. 미리 접견실에 자리를 잡는 게 중요할 지도 모르겠다. 집무실을 나선다. 문을 열고, 복도로. 미세먼지 입자가 눈에 훤히 보인다. 한 손엔 서류를 들고 한 손으론 먼지들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로비에는... 오랜만에 보이는 드루비스 씨. 여느때처럼 테라스 밖 정원에서, 식물들에게 물을 주고 있다. 로비 안에는 데저트 플란넬과 레굴루스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러니까, 이 선장님이 네 사업에 소더비의 자금줄을 대주면... 새 애플호를 사들일 수 있다... 이 말이지?”
“맞아, 레굴루스. 너도 알다시피 난 사업 수완이 좋잖아? 이번엔 대박 매물이거든. 에즈라의 화보 사진이 얼마에 팔릴지... 너도 궁금하지 않아? 내가 호주 쪽에 수요층은 다 조사해놨어. 거기가 내 나와바리거든. 우리 선장님은 자금만 대면 돼. 진짜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흐흐... 흐흐흐. 좋아. 이 몸이 우리 자금줄... 아니, 흠흠. 소더비한테 한 번 얘기해볼게. 이 선장님의 부탁이라면 무조건 들어줄거라고.”
사악한 웃음을 짓는 데저트 플란넬과 레굴루스. 유감스럽게도 저들의 사업이 성공할 확률은 없다. 그간 데저트 플란넬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그렇다. 게다가 레굴루스. 데저트 플란넬한테 자금을 댈 돈을 빌릴 수 있다면, 그 돈으로 애플호를 사는 게 낫지 않나?
순간의 생각 끝에 접견실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연다. 아, 오늘도 노크를 잊었다. 아니지. 내가 5분 정도 일찍 왔으니, 그녀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지도.
“596F756C617465.”
“아녜요 티토 씨. 버틴 씨가 늦은 게 아니에요. 버틴 씨도 접견보다 5분 일찍 온 걸요.”
... 이미 존과 TTT는 접견실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번에는 TTT가 TV 하나가 아니라 세 개, 그러니까 전신이 모두 드러나도록 TV가 놓여져 있다. 존이 힘을 써준 걸까. 존이 커피를 따라 놓았고, TTT와 내 몫도 있다. 물론 TTT는 한입도 마시지 못한다.
“안녕하세요! 버틴 씨. 저희가 먼저 왔죠? 오래 기다리진 않았답니다?”
TTT가 열정 넘치는 목소리로 인사한다. 고개를 끄덕인다. 자리에 앉는다. 호기심 어린 듯 묘하게 비어있는 눈을 한 TTT, 무심한 듯 날 보는 존.
“접견을 시작할게.”
늘 하던 멘트를 그대로 그녀들에게 전달한다. 접견은 마도학자 간의 협업을 증진시키기 위함이며... 벌써 9번째 되풀이되는 말이다. 존은 무표정으로, TTT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열정적으로 반응해주며 듣는다.
“그리고, 원래 접견은 너희 두 사람이 대화를 이끌어가는 게 주야.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르게 진행해야 할 것 같아.”
그렇다. 오늘은 조금 달라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은 분명한 목적이 있는 접견이니까.
“그런데 존, TTT. 둘이 어떻게 친하게 지내는 거야? 접점이 없는 줄 알았는데.”
존과 TTT가 서로 마주본다. 묘하게 눈치가 오고 간다. 존은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지만, TTT는 그러지 못한다. 아무래도 사연이 있는 것 같다. 존이 한숨을 쉬며 말한다.
“596F7563616E74616C6B.”
그녀의 말에 TTT가 볼을 긁적인다. 무슨 뜻일까. TTT가 말한다.
“허락해줘서 고마워요 티토 씨. 그러니까... 버틴 씨. 우리는 뭐랄까. 공생관계예요.”
...
“공생?”
내 말에 존이 일어나서 TTT의 TV 윗부분을 들어올린다. 그러자 일반적이었으면 섬뜩할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TTT의 머리와 가슴, 다리가 따로 노는 것.
“재단에 오면서 브라운관 TV 3대와 전기 무상 공급을 약속 받았어요. 그런데... 제가 TV를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마도술을 이용해도 굉장히 한정적이란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티토 씨가 들어주는 거예요.”
그녀의 가슴 부분이 나오는 중간 TV에서 손가락만 따로 움직인다. 그 손가락이 TTT의 머리 쪽 방향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움직이기 불편한 TTT에게 존이 다리가 되어준다는 뜻이구나.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TTT, 그런데... 너는 화면 속이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잖아. 굳이 이렇게 TV를 움직이면서 다녀야 할 필요가 있어?”
내가 묻자, TTT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한다.
“이래서 TV 속에 직접 갇혀봐야 다들 공감해준다니까요. 물론 그랬던 사람은 없지만... 버틴 씨. 제가 보는 세상은 온종일 CCTV 화면을 보고 있는 보안 회사의 사무실과 같아요. 화면 속 세상은 움직이지만, 화면이 움직이진 않죠. 요컨대 움직이는 장면을 보고 있지, 내가 살아서 움직인단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 단 말이에요.”
...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TTT가 바라보는 세상이 어떻게 비춰질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그녀가 아니니까. 그러나 그녀의 설명대로라면, 내 입장에선 그저 전시관에 움직이는 그림이 걸려 있고, 그 그림 속이 진짜 세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그 세상에 내가 서 있다는 느낌이 들진 않는다는 것.
“이해했어. 고마워. 그런데 공생 관계라면, TTT 너는 존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 거야?”
내가 묻자, 존은 다시 TTT의 머리가 나오는 TV를 원래 자리에 놓는다. 다시 TV가 3단으로 쌓이고, 이제야 그녀의 머리 가슴 다리가 제자리를 찾았다.
“그게... 그러니까 말이죠.”
정작 TTT는 이에 대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존은 한숨을 내쉬더니 TTT의 머리 부분 전원을 꺼버린다.
“으악! 티토 씨. 티토 씨? TV를 꺼버리다니. 너무한 거 아니에요?”
TTT가 무릎을 굽혀 앉는다. 그러자 2번째로 놓인 TV에 그녀의 얼굴이 약간 잘려서 나온다.
“켜줘요. 얘기할게요. 티토 씨가 곤란할까봐 얘기를 못한 거였단 말이에요!”
TTT의 비명에 존이 다시 머리 쪽 TV를 켠다. 그러자 TTT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시 제자리에 선 그녀가 말을 꺼낸다.
“티토 씨가 말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제가 대신 얘기할게요. 사실 저는 티토 씨의 보안 프로토콜을 테스트 중이에요. 티토 씨가 막고, 저는 해킹을 하는 거죠. 인간이나 마도학자에게 있어 해킹은 언어와 숫자의 영역이지만, 제겐 조금 더 가시적인 부분이라 쉽거든요.”
“45786563746C79.”
“티토 씨가 맞장구를 쳐주시네요.”
...
“그래. 그러니까, 존은 널 움직일 수 있게 해주고, 너는 존의 보안 프로토콜을 테스트해준다는 거네. 그게 공생 관계라는 거고.”
존이 고개를 끄덕인다. TTT도 맞아요!라고 말해준다. 아무래도... 본론과 연관점이 보이긴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의문인 건 이거다.
“너희 둘의 상황은 잘 알겠어. 확실히 TTT의 해킹 실력은 상상 이상이야. 존, 네 보안 프로토콜의 취약점을 파악하는 데도 확실히 도움이 되겠지. 그런데... 너희 둘. IDM 데이터 탈취 사건에 대해 알고 있어?”
...
“아... 저... 저는 말이죠. 그러니까... 버틴 씨. 갑자기 그... 뉴욕시에 급한 볼일이 생겨서 가볼게요!”
TTT가 그렇게 말하고 화면에서 사라진다. 3층으로 쌓인 TV에선 각자 다른 화면이 나오기 시작한다. 바깥 세상의 일기예보, 오후 뉴스와 예능 프로그램. 존은 소란스러웠는지 TV 3대를 모두 꺼버린다. 이런 반응을 보면 분명 두 사람이...
“확실히 너희 둘과 연관이 있는 일인가 보네.”
문자 그대로다. 그렇지 않으면 TTT가 도망 갈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 존에게 묻자,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말한다.
“497369746E6563657373617279?”
그녀가 묻는다. 마지막 음을 높인 것으로 보아, 뭔가 묻는 건 알겠는데,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영어를 강요할 순 없다. 그녀는 영어로 말하는 걸 굉장히 혐오하니까.
뭔가 방법이 없을까. 서로 말 없이 눈치만 주고 받을 때였다. 존이 한숨을 쉬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저건... 마치 라디오처럼 생긴 물건이다. 회색이고, 한 손에 들어올 정도로 작다. 동그랗게 구멍이 뚫린 부분이 있다. 아마도 스피커일 거다. 그 아래엔 아주 작은 화면이 있다. 용도는 모르겠다. 존이 기계 오른쪽에 달린 버튼을 눌러 전원을 켜자, 상단에 초록색 불빛이 들어온다.
“49742773582773496E76656E74696F6E.”
존이 뭐라고 말하자, 작은 기계가 차가운 기계음을 내며 말한다.
“이건 X의 발명품이야.”
... 말하자면 피클즈의 도기 같은 거구나.
그 뒤로 존이 설명해준 바에 의하면, 저 기계는 X가 고안한 휴대용 번역기라고 한다. 이름은 ‘참 쉬운 아스키코드 번역기 프로토타입 2호’. 단, 목소리를 크게 낼 경우 번역의 오류가 생길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존은 이때부터 목소리를 작게 내기 시작했다. 내게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손목 시계를 본다. 닉시관이 13:30이란 숫자를 밝게 비춘다. 벌써 30분이 지났다. 접견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아무래도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낫겠다.
“존, TTT가 IDM 데이터 탈취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받고 있어. 혹시 너와 관련된 일이야?”
내가 묻는다. 존은 별 반응 없이 포커페이스로 일관한다. 그러다 번역기에 무언가 속삭인다. 번역기가 대신 답한다.
“글쎄.”
...
“존, 확실한 답변이 필요해. 그래야 내가 TTT를 도울 수 있어.”
존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대로는 해결되는 게 없다. TTT를 다시 불러봐야 할까. 이미 다른 곳에 간 TTT를 부른다고 해서 돌아올 확률은 얼마나 될까. 내 모습은 어떨까. 아마도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겠지.
“타임 키퍼.”
존이 날 부른다. 물론 번역기를 통해서다. 그녀를 본다. 침착한 표정. 그녀가 자신의 넥타이를 고쳐 맨다. 그리고 말한다.
“내가 시켰어.”
...
“존, 너는 IDM의 수석 엔지니어잖아. 그런데 왜 TTT에게 너희 회사의 데이터를 훔치도록 시킨 거야?”
내가 묻자, 그녀는 TTT가 있던 TV를 쓰다듬는다. 그녀가 답한다.
“466F72686572.”
번역기도 따라서 답해준다.
“그녀를 위해서였어.”
[??/?? ??:??]
“가장 중대한 해킹 사건, 414gang 이후, 벌써 몇 년이 지났습니다. 프로토콜을 강화하고, 보안 프로그램 구축도 완료했지만, 해커들의 해킹툴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죠. 특히나 마도학을 접목시킨 컴퓨팅 시스템은 훨씬 더 보안에 취약합니다. 일반적으론 마도학 보안을 통해 ‘인간’에겐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만, 관련 계통의 마도학자에겐 더 없이 취약하기 때문이죠.”
436F6D70616E796272696566696E67
“때문에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프로토콜 강화가 필요합니다. 수석 엔지니어 티토가 마도학 프로토콜 총책임자로, 마도학 보안의 취약점 분석 및, 프로토콜 개선을. 그리고 앤드류가 마도학 백신 총책임자로, 관련 계통 마도학자의 침입에 대한 근본적인 박멸을...”
... 4974277364616E6765726F7573666F72545454.
[12/11 13:41]
“그래서 그녀에게 시켰어. 마도학 컴퓨터를 위한 백신이 개발되기 전에 데이터를 탈취하도록.”
...
“그 말은... 그 백신이 개발되면 TTT가 사라질 수도 있단 얘기야?”
내가 묻는다. 무엇이든 전부 알 것 같은 존이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답한다.
“몰라. 그녀가 바이러스로 취급될지, 한 명의 마도학자로 취급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왜... 왜 사라지려고만 하는 걸까. 고리. 이사벨라. 슈나이더.
“존. TTT가 해킹을 그만두면 되는 게 아닐까?”
내가 묻는다. 그러자 존은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내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공허한 삶을 영원히 살고 싶어? 아니면 반짝이더라도 마음이 꽉 찬 삶을 잠시나마 살고 싶어?”
존이 묻는다. 나는... 답을 못하겠다. 할 수 없다. 내겐 공허도, 반짝임도... 아직까지 찾아온 적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왔을 수도 있고, 아직 멀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존의 저 이상하리만큼 추상적인 말이 이해가 된다.
“요즘 IDM5100 대신 TV를 들고 다니는 건 그런 이유야. 백신 개발을 늦추긴 했지만, TTT의 마지막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TTT의 기록을 읽은 적이 있다. 마치... 마음 속에 아귀가 존재하는 것처럼, 끊임 없는 공허에 빠져들고만 있다고. 그래서 그녀는 그 공허를 이겨내기 위해 세상을 여행하고, 지금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몰래 듣든, 대놓고 듣든 말이다.
“그녀에겐 가상몽유 치료도 불가능해. 살아 있는 신체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때였다. 존의 번역기에서 잡음이 섞여 나왔다. 곧이어 번역기의 작은 화면이 반짝거리더니, 익숙한 소녀의 얼굴이 나왔다.
“저... 저기요! 티토 씨! 아직 몸을 못 찾았을 뿐이지, 전 확실히 제 몸이 있다니까요? 그... 어딘가에 있단 말이죠. 어딘가에.”
불만 가득한 표정의 TTT. 저 번역기에서도 나타날 수 있었구나.
“그리고, TV 좀 켜주시겠어요? 이 작은 화면 속은 답답해서 죽을 것 같단 말이에요.”
TTT의 말에 존이 TV를 켠다. 그러자 TTT의 전신이 3층 TV에 나타난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뾰로통한 표정으로 존에게 말한다.
“고마워요. 티토 씨. 아무튼, 얘기는 다 들었어요. 그런 이유도 있었단 건 잘 알겠어요. 그래도 전 백신 따위에 굴복하지 않을 거예요. 이 세상은 TV가 점령할 테니까요!”
그녀의 표정이 의기양양하게 바뀐다. 아무래도 그녀의 이야기를 미루어 볼 때, TTT는 탈취한 데이터가 백신에 관련됐다는 걸 몰랐던 모양이다. 그저 존이 부탁했기에, 들어줬겠지. 그동안 자신을 계속 도와줬으니까. TTT가 곧 말을 잇는다.
“그래도... 티토 씨가 발전시킨 회사잖아요. 저 때문에 회사의 이미지를 악화시키면 어떻게 해요.”
TTT가 말하자, 존이 답한다. 무표정으로 빠르게.
“49444D6973736869747479636F6D70616E794966746865796675636B6D654A7573746C656176657468697364616D6E636F6D70616E79.”
굉장히 긴 문장이다. 무슨 뜻일까. TTT의 말에 자신은 괜찮다는 뜻이 아닐까.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지려고 하는데, TTT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답한다.
“와우... 티토 씨. 언제 들어도 욕은 정말 잘하신다니까요. 아, 버틴 씨. 티토 씨의 말을 조금 순화해서 번역하자면... 그러니까... 때려치우면 그만이래요.”
아.
“그래도 고마워요, 티토 씨. 덕분에 제겐 버틴 씨 말고도 새 친구가 생겼는 걸요. 그러니까 IDM에 관련된 이야기들 좀 많이 해주세요. 아스키코드를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저 밖에 없잖아요?”
다시... 시계를 본다. 닉스관이 57분을 가리킨다. 종료까지 3분이 남았다. 두 사람을 슬슬 보내줘야 할 것 같다.
[12/12 13:00]
“접견 보고서는 잘 봤네, 버틴. IDM사의 백신이 관련 마도학자에게 위해를 가할 수도 있다는 진술은 확보했어. 아마 TTT가 위험에 처할 일은 없을 거야.”
Z 씨가 말한다. 오늘은 그녀가 내 집무실에 찾아 왔다. 중국어로 ‘노동이 영광이다’라고 쓰인 본인의 컵도 함께다. Z 씨의 완드는 어쩌면 저 컵이 아닐까. 아무튼, 그녀의 말대로라면 더 이상 TTT를 걱정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IDM사에서 온 고소장도 조만간 취하될 거야. TTT가 그들의 데이터를 악용했다면 우리도 곤란했겠지만, 그런 게 아니었단 점이 다행이었네. 그리고 IDM에선 본의든 아니든 TTT를 죽일 수도 있는 마도학 백신을 개발하려고 했다는 게 문제였어. 재단 수뇌부와 IDM이 합의했고, TTT와 존에겐 재단 선에서 약간의 징계가 내려질 거야. 그리 대단한 징계는 아니니까 걱정은 안 해도 돼.”
“감사합니다. Z 씨. 고생 많으셨습니다.”
“별 거 아니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존이 IDM의 데이터 탈취를 사실상 사주한 거다. 그렇다면 IDM에서 그녀에게 내릴 처분은 어떻게 된 걸까.
“IDM에서 존에게 어떤 처분을 내릴까요.”
Z 씨에게 묻자, 그녀가 피식 웃으면서,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답한다.
“그들이 징계하는 일은 없을 거야. 현 IDM에서 존의 개발력을 대체할 수는 없을 테니.”
다행이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갑자기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린다. 들어온 건...
“아니, 나는 그냥 TV 속 유령이 흥미로웠을 뿐이라니까? 호러 영화 소제로 딱이잖아. 1998년작 링이라는 영화처럼 말이야. 물론 그 녀석이 TV 속에서 나오는 일은 없겠지만, 블로니의 촬영 기법을 통해서... 으아아악.”
비명과 함께 들어온 건 조슈아와 존이다. 정확히는 존이 조슈아의 머리채를 잡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54616B65636172656F66746869736675636B6572.”
존은 무심하게 아스키코드를 말하고는, 조슈아를 우리에게 툭 던지고 갔다. 대범하게도 말이다.
“저 녀석, 무식하게 힘만 세가지고... 오우, 위대한 버틴과 더 위대한 Z 씨! 호러피디아입니다. 평화가 우리와 함께하길!”
... Z 씨가 넌지시 웃는다. 그녀는 존의 말을 알아들었을까. 그녀가 바닥에 널브러진 조슈아의 앞에 다가가서 무릎을 굽혀 앉는다. 그리고 말한다.
“조슈아. TTT와 존은 지금 징계로 인해 근신 상태야. 그런데도 가서 만난 건가?”
그녀가 말하자 조슈아가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Z씨도 맞춰서 일어난다.
“아, 그게 말이죠. 재단의 영화 산업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대업을 위해서... 네. 만났어요.”
조슈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Z 씨가 그를 스쳐 지나간다. 조슈아가 멍하니 있는데, Z 씨는 그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며 말한다.
“안 따라오고 뭐하나, 조슈아.”
신음하는 조슈아. 한쪽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른쪽 손으론 차를 마시며 걷는 Z 씨.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묻는다.
“그런데 Z 씨. 아까 존이 뭐라고 한 건지 이해한 건가요?”
내 질문에 Z씨는 눈을 지긋이 감고 답한다.
“순화해서, 조슈아를 데리고 가라더군.”
... 왜 모든 사람들이 존의 말을 순화해서 말하는 걸까. 얼마나 심한 욕설을 하길래. 잠깐. 그런데 Z 씨는 아스키코드를 알고 있는 건가? 어떻게 이해한 거지? 집무실 테이블, 포스트잇에 메모를 해둔다. Z 씨에게 아스키코드의 이해에 대해 물어볼 것. 물론 이걸 물어볼 날은 꽤 시간이 지난 이후의 일일 거다. 당분간은 외근 임무가 잔뜩 있으니까.
창밖을 바라본다. 햇살이 반짝인다. 이제 12월도 끝날 것이다. 1년이 더 흐르겠지만, 뒤죽박죽인 시간 속에서 나이라는 건 무의미할 것이다. 그럼에도... 포기하면 안 된다. 나는 이 사람들 모두를 자신의 시간대로 되돌릴 의무가 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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