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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만에 써봄. 현생 이슈가 좀 있음. 주의 사항은 시리즈 전작들과 같으므로 참고할 게 있으면, 한 번 읽어주길.

 

2. 제시카와 곡랑에 대한 이야기임.



3. 곡랑의 신뢰도 80 문화를 보면 인터뷰에서 판도라 윌슨과 ‘입술낭자’를 헷갈려하는 표현이 나타남. 떡밥일 수도 있겠지만 곡랑이 입술낭자라고 했던 건 일단 공식적으로 누구인지 밝혀지진 않음. 아는 사람은 댓글에 써주면 감사.



4. 이번엔 가볍게 썼으니, 재밌게 읽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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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얼마나 달렸을까. 안개가 가득한 곳을 지나, 어느 초원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내가 얼마나 뛰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거친 초목들을 스쳐 다리엔 피가 났고, 어느새부턴가 자라 있던 꼬리는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피투성이 맨발을 바라본다. 상처는 금방 아물 것이다. 뒤를 돌아본다. 패성 사람들은... 잘 지낼 수 있을까.

  완전히 떠나올 생각은 없었다. 도망치려던 것도 아니다. 그저 나는 그들의 바람을 이루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다리를 뛰어넘었고, 그들이 돌아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마음 속에 무언가 요동쳤고, 모두가 괜찮아졌으리란 안도감이 들 뿐이었다.

  길을 걸었다. 낯선 사람들이 이따금 나타났다. 마차를 끌고 다니는, 수염을 기른 사람들. 패성에서 볼 수 있던 얼굴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니세이를 닮은 사람들. 그들은 낯선 언어를 사용했고, 나도 그들도 서로의 언어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누군가를 마주쳤지만, 모두와 단절된 삶을 잠시 살았다. 패성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지만, 돌아갈 길을 알 수는 없었다.

  돌아가더라도... 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 모두와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황급히 뛰어 나왔다. 내겐 인사보다 남을 돕는 일이. 상서로서 해야 하는 일이 더 중요했으니까. 그런데...

  만일 내가 돌아간다면. 내가 다시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의도치 않은 잘못으로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든다면. 그렇다면 나는 상서가 될 자격이 있는 걸까.

  내가 생각했던 행복이 누군가에겐 불행이 될 수도 있다. 먼 나라의 이방인들을 만나며, 어느 우인을 만나며 내가 겪은 일이자, 내가 내린 결론이다. 그리고 그 잘못으로 인해서... 누군가가 떠나간다면.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떠나야만 한다면.

  그런 일이 반복된다면. 나는 괜찮을까. 괜찮을 수 있을까. 아니, 아직은. 아직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일단은 달리자. 조금 더 달려보자. 무엇인가 나올 때까지.

 



  [1/5 13:22]

 

  누군가는 한 살을 더 먹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나이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폭풍우가 시작되고, 시대의 흐름은 의미가 없어졌다. 울루루 스타디움, 제단, 아페이론 섬. 어쩌면 곡랑이 살았다던 패성까지도. 같은 시간, 다른 시대. 세상은 폭풍우 이후, 지독하게 꼬여버렸다.

 

  그럼에도 새해가 밝았다. 새해 첫날은 소더비 주체로 큰 축제가 이어졌다. 황무지에선 갈라보나 씨가 영국의 화학 회사에서 공수해온 마도학 별빛 폭죽이 쉼 없이 터졌다. 라마야나의 촛불은 꺼질 줄을 몰랐고, 황무지의 크리터들 마저도 그날은 조용히 불빛을 감상했을 거다. 릴리아를 포함한 성인 무리들은 곡랑이 따라준 술을 마시고, 예니세이는 의심의 눈초리로 가만히 성인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예니세이는 여전히 곡랑의 술을 믿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전과가 있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흘러 5일. 금문교의 건설이 시작됐던 날.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Z 씨. 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이곳은 여느 떄와 다름 없는 Z씨의 집무실이다. 회백색 창틀에는 오늘따라 먼지가 서려 있다. Z 씨는 눈을 지긋이 감고, 자신의 머그컵에 담긴 자스민 차를 마신다.

 

  “자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해서 미안할 뿐이네.”

 

  오늘따라 그녀의 눈웃음이 인자하게만 느껴진다. 아니, 좀 더 평안하게 보인다고 해야할까. Z 씨가 저렇게 말을 해도 재단에서 날 가장 많이 도와줬던 건 Z 씨다. 수십, 수백명은 넘어갈 마도학자들과 관련자들 사이에서도 매 기념일, 명절 등을 모두 챙겨주는 건 Z 씨 뿐이다.

 

  “그런데... Z 씨. 매번 챙겨주셔서 감사하지만... 괜찮으세요? 계속 챙겨주셔도.”

 

  부담스러우실까 해서 묻는다. 정작 Z 씨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답한다.

 

  “고향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어릴 때 살았던 곳에선,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챙겨주는 것이 하나의 문화였어. 자네가 너무 부담 갖진 않았으면 좋겠네. 그렇다고 이런 문화를 타인에게 강요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말이야.”

 

  “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조용히 Z 씨가 건네준 차를 마신다. 흔들리는 잔에 내 얼굴이 비친다. 약간의 다크써클. 주근깨.

 

  “그러고 보니 버틴. 곡랑이 황무지에 주막을 차린 것도 꽤 오래된 것 같네. 장사는 잘 되고 있나?”

 

  그녀가 묻는다. 호기심 어린 눈빛이다. 곡랑. 그녀가 재단에 거둬진 후, 우리 소대에 편성된 이후의 일이다. 그녀는 황무지 내부, 방성의 골목에 주막을 차렸다. 외근 임무가 없을 때는, 주로 그 골목 주막에서 술을 만들었다. 이따금 재단 사람들이 황무지에 방문하게 되면, 주막은 손님을 받을 틈도 없이 붐볐다.

 

  ‘나는 여전히 보드카가 입맛에 맞다니깐.’

 

  릴리아의 말이 생각난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주막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곡랑은 패성에서의 생활과 달리 조금 변했다. 누군가가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장사는 잘 되는 것 같아요. 물론 곡랑이 무료로 나눠주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내가 답하자, Z 씨는 안경을 고쳐쓰며 말한다.

 

  “그래. 어떻게 보면 잘 된 걸지도 모르겠네.”

 

  아무래도 그녀가 내게 곡랑에 대해 물어본 건, 다음 접견 때문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Z 씨가 책상 서랍에서 서류철을 꺼낸다. 그것을 내게 건넨다.

 

  “버틴. 이번 접견은 조금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아. 아무래도... 평범한 사람들의 접견이 아닐 테니.”

 

  평범. 타임키퍼 소대에 평범이란 단어가 어울렸던 적이 있을까. 서류철을 펼치고, 내용을 확인한다. 곡랑의 프로필. 여기까진 예상했다. 그런데 다른 프로필은...

 

  “제시카인가요?”

 

  그녀의 사진과 인적사항이 적혀 있는 종이. 내가 묻자, Z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버틴, 마도학자의 영감은 마도술의 특성을 결정하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해. 그리고 그 마도술이 환상을 통한 정신적인 외상을 입힐지. 마도술로 물리적 실체를 구현하여 육체적인 외상을 입힐지. 그건 각자의 마도학적 특성에 따라 갈리게 돼. 이 부분은 알고 있나?”

 

  고개를 끄덕인다. 마도학자를 관리해야 하는 입장에선 기본적으로 숙지해야 할 내용이니까. Z 씨가 서류를 함께 들여다보며, 덧붙여서 말한다.

 

  “제시카와 곡랑의 영감 분류는 재단의 공식 프로필에선 분명히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마도술로 실체를 구현하여 타격한다는, 비슷한 공격 방식을 갖고 있어. 제시카의 경우엔 몸에 자란 균사를 통해. 곡랑의 경우엔 목걸이에 박힌 옥을 통해 실체를 구현하지. 게다가... 두 사람 모두 환상종의 혼혈이니, 둘의 결속력을 증진시킨다면 추후에 도움이 될 거라는 게 내 판단이네.”

 

  ... 제시카와 곡랑. 두 사람이 취미 생활 면에서도 겹치는 게 있을까. 곡랑은 영화를 모르고, 제시카는 술을 모른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과연 내가 이 두 사람의 접견을 성사시킬 수 있을까.

 

  “일단은... 블로니에게 얘기를 좀 들어봐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1/10 10:22]

 

  “어머? 또 왔군요, 버틴 양. 오늘 올 줄은 몰랐는데.”

 

  뉴바벨 씨의 크리터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이곳은 재단 인근의 조각 공원 광장. 뉴바벨 씨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맞이한다. 그녀의 펫모임은 정기적으로 이 장소에서 진행된다. 오늘도 재단 사람들이 꽤나 왔다. 본관 데스크의 알리사 씨. 예산과의 드미트리 씨. 요즘은... 뉴바벨 씨의 성원에 힘입어서일까. 드미트리 씨가 반려 동물을 한 마리 더 데려왔다. 기존에는 털이 복실복실한 비숑 프리제 한 마리였는데, 지금은... 새까만 카벙클 한 마리도 함께 있다. 강아지와 카벙클의 공존. 가능한 거였구나.

 

  “아, 오늘도 볼 일이 있어서요. 블로니와 제시카는 안 왔나요?”

 

  뉴바벨 씨에게 묻자,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어느 한 편을 가리킨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45도 정도 돌리자, 20M 거리에 핫팬츠와 탱크탑을 입은 블로니가 보인다. 그리고 바로 옆엔 훨씬 더 키가 큰 제시카도. 그리고 놀랍게도... 재단 안에선 굉장히 보기 힘든 마릴린이 그 자리에 함께 있다.

 

  “블로니 양은 저쪽에 있어요. 마릴린 씨도 같이 왔더라고요. 친목을 위한 동행은 저희 뉴바벨 사에선 언제나 환영할 만한 일이죠.”

 

  그녀가 굉장히 사업적인 멘트를 건넨다. 정작 한 손엔 생고기를 들고 있다.

 

  “자, 얘들아. 버틴 양이 왔는데 인사 해야지?”

 

  저번처럼 크리터들이 고개를 살짝 숙인다. 그들 나름의 인사이리라. 나도 고개를 숙인다. 그러자 뉴바벨 씨가 고기를 손으로 찢고는, 크리터들에게 건넨다. 남은 고기를 들고 있었는데, 그녀가 내게도 건네면서 말한다.

 

  “한 입 할래요?”

 

  지독한 농담이다.

 

  “사양할게요. 뉴바벨 씨. 전 크리터가 아니거든요. 요즘 사업은 좀 어떠세요?”

 

  내가 묻자, 그녀가 멀리 고기를 던진다. 그녀의 크리터들이 고기를 향해 달려간다. 그녀가 크리터 쪽을 보면서 말한다.

 

  “사업은 괜찮아요. 재단 쪽과도 컨택이 되어 있고, 블로니 양과 마릴린 양 덕분에 크리터와 관련된 자그마한 영화도 기획하고 있고요. 그런데... 폭풍우 때문에 마냥 쉽지만은 않네요. 이 비가 언제쯤 그치련지.”

 

  그녀가 넌지시 말한다. 왜인지... 이럴 때마다 괜한 죄책감이 든다. 여전히 폭풍우에 대해선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으니.

 

  “어머, 버틴 양. 그렇게 기죽지 않아도 돼요. 비가 내리더라도 언젠가 해가 뜬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잖아요? 저쪽을 봐요. 세 사람 모두 이 빗속에서도 행복해 보이지 않나요?”

 

  그녀가 시선으로 블로니 일행 쪽을 가리킨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다. 세 사람이 화목하게 웃고 있다. 빗속에서도 마치 내일이 있다는 것처럼 활짝.

 

  “고마워요, 뉴바벨 씨. 덕분에...”

 

  감사를 표하는데 그녀가 괜찮다면서 내게 말한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저희가 더 고맙죠. 세상에 계속해서 비가 내릴 지언정, 당신은 누군가의 머리 위에서 내리는 비는 거두어주었거든요.”

 

  곧이어 그녀의 반려 크리터들이 그녀의 곁으로 돌아온다. 삐뚤빼뚤하고 날카롭지만, 검은 털 사이로 비치는 하얀 이빨이 눈에 들어온다.

 

  “어서 가봐요. 접견 때문인 것 같은데.”

 

  그녀가 말한다. 고개를 끄덕인다. 이윽고 블로니 일행 쪽으로 향한다. 제시카가 드미트리 씨의 카벙클과 떠들고 있다.

 

  “크르르릉. 크릉. 크르릉. 끼익.”

 

  ...

 

  “제시카?”

 

  제시카가 기묘한 소리를 내서 불러본다. 그러자 제시카가 반갑게 웃으면서 말한다.

 

  “앗, 버틴! 우리 파티에 또 와줬구나!”

 

  오히려 제시카의 기묘한 소리. 그리고 나의 등장에 얼굴이 불거진 건 블로니다.

 

  “제시카! 이상한 소리 내면 사람들이 널 이상하게 쳐다본다니까... 아무튼. 버틴?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나름대로. 괜찮게 지낸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며 블로니의 말에 답한다. 옆에선 마릴린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나도 똑같이 대응한다. 세 사람과 인사를 마치고, 바로 업무에 관련된 얘기를 해볼까 했는데...

 

  “자기, 아무래도 내 차례는 아닌데, 내가 빠져있는 게 좋지 않을까?”

 

  마릴린이 윙크를 하며 자리를 비켜준다. 접견의 멤버는 공공연한 대외비다. 언젠가는 모두 접견을 했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공적인 자리에선 눈치가 보인다. 여기엔 드미트리 씨도, 알리사 씨도, 그 외의 다른 분들도 계시니까.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한다. 마릴린은 손을 흔들며 알리사 씨가 있는 쪽으로 간다.

 

  “버틴. 나랑 마릴린은 이미 접견을 끝냈으니까... 설마 제시카 차례인 거야?”

 

  블로니가 팔짱을 끼며 말한다. 오른쪽 눈을 치켜세운 채다. 블로니에게도 원칙적으론 공개해선 안 되는 게 접견의 명단.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녀는 제시카의 보호자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제시카가 귀를 쫑긋거리며 묻는다.

 

  “접견? 전에 제니퍼가 했던 이야기 파티를 얘기하는 건가?”

 

  ... 블로니가 어떻게 설명했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제시카가 기지개를 펴며 말한다.

 

  “파티는 늘 좋아. 친구들을 만들어주잖아. 안 그래도 버틴 덕분에 친구들이 여럿 생겼는 걸?”

 

  그녀가 말하고, 옆에서 블로니가 까치발을 세워 제시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럼, 당연하지. 버틴 덕분에 제시카도 친구들이 많이 생겼어. 마릴린과도 친해졌다니까?”

 

  ...

 

  “좋은 일이네. 그래서 말인데, 제시카. 혹시 곡랑과 잘 알고 있어?”

 

  본격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자 제시카가 검지를 턱끝에 대고는 골똘히 생각한다.

 

  “곡랑? 이름이 신기하네. 아... 설마 그 동물 친구를 얘기하는 거야?”

 

  “동물 친구?”

 

  내가 되묻자, 블로니가 옆에서 대신 답해준다.

 

  “그 말 같은 거로 변신할 수 있는, 술 파는 여자애 얘기하는 거 아니야? 엉덩이에 꼬리 달린 여자애. 안 그래도 펫모임에 데려올까 했는데, 영 말 걸기가 어려워서.”

 

  고개를 끄덕인다. 블로니의 설명을 들어보면, 두 사람이 곡랑을 떠올리는 게 맞는 것 같다.

 

  “맞아. 그 애 이름이 곡랑이야. 그리고 말이 아니라... 정확히는 녹촉이라는 환상종이고.”

 

  “녹촉? 그게 그 친구의 이름이야?”

 

  제시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순수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녀의 종이... 녹촉이라는 거지. 제시카, 네가 체인질링이라고도 불리듯이. 이름이라고 하기엔 애매하네.”

 

  내가 답한다. 하지만 제시카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 듯, 시선을 위로 두고 곰곰히 생각한다.

 

  “종이? 그 친구한텐 녹촉이란 종이가 있는 거야?”

 

  ...

 

  “우리 똑똑이가 상상력이 풍부하잖아, 버틴. 아직 잘 몰라서 그러니까 이해해줄 수 있지?”

 

  블로니가 뭐랄까. 부모님이 말할 것처럼 말한다. 물론 나는 부모님과 말 한 마디 섞어본 적 없지만.

 

  “무쪼록, 11일에 접견이 예정되어 있어. 곡랑과 제시카, 네 차례야. 그날은 오후 일정을 비워줬으면 해서 찾아왔어. 괜찮아?”

 

  오늘, 그녀를 만난 가장 중요한 이유. 그녀가 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다.

 

  “제니퍼. 나 그날 접견에 갔다 와도 되는 거야?”

 

  제시카가 블로니에게 묻는다. 뭐랄까. 이럴 때 보면 정말 어린애 같기도 하단 생각이 든다. 블로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깔깔 웃으면서 말한다.

 

  “당연하지, 제시카. 친구를 사귈 좋은 기회잖아?”

 

  하지만 제시카는 다른 부분이 걱정인 것 같다.

 

  “하지만 곡랑이 내 친구가 되면, 제니퍼는 어떡해.”

 

  그녀의 걱정에 블로니가 제시카의 등. 그러니까... 사슴 몸 쪽 등을 툭툭 치면서 말한다.

 

  “괜찮아, 괜찮아. 제시카의 친구면 내 친구이기도 하잖아? 다 같이 놀면 되지. 그 친구라면 펫모임에도 올 수 있겠고 말이야.”

 

  ... 블로니가 생각보다 펫모임에 엄청 진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교성이 뛰어난 그녀가 재단의 딱딱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거란 생각을 하진 못했다. 아닌가? 다들 이미지가 그럴 뿐, 속은 말랑한 사람들인 걸까.

 

 

 

  [1/10 15:33]

 

  곡랑은 지금 쯤 출근했을까. 물론 주막 얘기다. 황무지 내부에서 거의 고정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은 곡랑이 유일하다고도 할 수 있다. 칸지라의 점술집은 이따금 하는 아르바이트 느낌이고, 찰리의 농사는... 뭐랄까. 매일 일을 하긴 해도 돈을 벌려고 하는 느낌은 아니니까. 그저 그녀가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길 뿐.

 

  그녀의 주막은... 예니세이가 말하기를 패성의 주막과 거의 흡사하게 생겼다고 한다. 마도술로 황무지에 본뜬 건물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이 공간은 곡랑의 기억을 담고 있기도 하다. 황무지의 해변이 6의 아페이론 해변과 연관된 기억을 담고 있듯이.

 

  동방의 건물. 패성이 중국에 위치했었는진 확실하지 않다. 예니세이의 단편적인 기록물이 패성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그 외엔... 곡랑과 갈천의 기억들이 전부다.

 

  커다란 나무문을 두드린다. 손으로 노크한다고 안에 소리가 전달될까? 동방에선 문고리를 들어올려서 툭툭 치는 방식으로 노크한다던데. 일단 손으로 노크해본다. 소리가 두꺼운 나무문에 묻혀 내게도 들리지 않는다. 쇠로 된 문고리를 들어올려, 문을 내리친다. 그러자 똑똑하는 노크 소리가 난다.

 

  “네, 지금 가요!”

 

  안에서 활기찬 목소리가 들리고, 주막의 문이 열린다. 화장은 찾아볼 수 없지만, 다양한 악세서리... 아니, 술과 관련된 도구로 머리를 치장한 곡랑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머, 버틴? 주막엔 웬일이야? 술 안 마시는 거 아니었어? 아직 영업 시간이 아닌데, 물이라도 가져다 줄까?”

 

  그녀가 활짝 웃으면서 말한다. 그녀의 옷은... 뭐랄까. 약간 속살이 비치는 동방의 비단 옷이다. 주막에서 일하려면 이런 옷을 입어야 할까. 아니, 편견일 뿐이야.

 

  “괜찮아. 그냥 잠깐 이야기를 하러 왔어.”

 

  내 말에 곡랑은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러나, 곧장 웃는 얼굴로 변하고는 내게 들어오라고 한다.

 

  주막 내부. 술냄새일까. 향긋하면서도 매운 향이 난다. 원인은 모르겠다. 마당처럼 생긴 곳엔 정자가 4개 정도 놓여 있다. 정자 위엔 동그란 탁상이 있고, 처마 밑 연등의 불꽃은 아직 켜지지 않은 상태다.

 

  “요즘 황무지에서 불 피우기가 어려워. 릴리아가 라이터라면서 네모난 쇳덩이를 주고는 불을 피워보라고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쓰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 릴리아가 라이터를? 설마 그녀가 담배도 피는 걸까. 진실은 모르겠지만, 곡랑이 자신의 묶음 머리에서 네모난 쇳덩이를 하나 건넸다. 소련의 새빨간 별마크가 새겨진 지포 라이터다.

 

  “내가 알려줄까?”

 

  사용법은 얼추 안다. 부싯돌이라 불리는 동그란 부분을 엄지로 당기듯이 긁으면, 심지에 불이 붙는다. 이론은 아는데, 실제로 불을 켜본 적은 없다. 내가 말하자, 곡랑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한다.

 

  “아냐, 괜찮아. 어차피 알려줘도 나는 금방 까먹을 것 같아서.”

 

  그녀가 뭐랄까. 축 쳐진 눈빛으로 답한다. 그러나 마치 두 얼굴의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금방 웃으면서 답한다.

 

  “그래도 괜찮아! 스파도데아랑 울루 할머님이 5시 쯤이 되면 불을 피워주러 오거든.”

 

  ... 울루, 자기 몸을 라이터 취급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그래... 그건 다행이네.”

 

  불꽃을 작게 피우는 마도술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곡랑에겐 어려운 걸까. 그녀의 마도술은 동방의 마도술로 불려, 그녀가 행동교정학교에 다닐 적에도 마도술과 관련된 가르침은 의미가 없었다. 갈천 역시 그러하듯, 일반적인 마도학자와는 마도학의 성질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틴? 무슨 일로 여기에 온 거야? 할 얘기가 있다면서.”

 

  곡랑이 창고로 가, 술독을 옮기면서 내게 묻는다. 조금 거들어줘야 할까. 아니, 나는... 육체적인 힘이 굉장히 연약하다는 걸 안다. 반면 곡랑은 마도학자 혼혈종임에도 뭐랄까. 환상종의 피를 물려받아서인지 힘이 장사다. 내가 도울 일은 없을 것 같다. 그저 그녀의 말에 답하면 된다. 그게 내 용건이니까.

 

  “익히 들어서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너의 접견이 예정되어 있어, 곡랑. 혹시 들어본 적 있어?”

 

  그녀에게 말한다. 아무래도 요즘 마도학자들 대다수가 접견에 대해 알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곡랑은 들어본 적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답한다.

 

  “접견? 술 이름인가? 미안하지만... 나도 술 이름은 전부 외우지 못해서...”

 

  ... 제시카랑 곡랑이 접견을 하게 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술 이름은 아니야. 그러니까... 네가 조만간 누군가와 만나서 이야기를 잠시 나눴으면 해. 공식적인 재단의 업무라 네가 꼭 와줬으면 좋겠어.”

 

  “아, 술이 아니구나. 그러니까...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걸 접견이라고 하는 거야? 그러면 나랑 버틴, 너도 접견 중인 건가?”

 

  ...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자세하게 설명하기엔 곡랑의 주막 영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의 일을 방해하면서까지 요구하고 싶진 않다.

 

  “맞아. 이것도 일종의 접견이지. 제시카에 대해선 알고 있는 바가 있어?”

 

  제시카의 이름을 언급하자, 곡랑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제시카? 나랑 제시카랑 접견을 하는 거야? 정말?”

 

  그녀의 말과 동시에... 그녀의 치맛자락에서 말로만 듣던 나무인간들이 잔뜩 나온다. 5마리... 아니, 5명. 아닌가? 그들이 5개 정도 나왔고, 곡랑의 어깨 위에 올라타서 기묘한 목소리로 말을 한다.

 

  “제시카! 제시카! 만나고 싶어! 만나고 싶어!”

 

  곡랑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걸까. 곡랑은 밖에 나온 나무인간들이 거슬리는 건지 창고쪽으로 손짓한다.

 

  “들어가.”

 

  그러자 나무인간들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술독이 가득한 창고쪽으로 향한다. 그런데... 예니세이의 기록을 생각해보면... 저것들이 들어간 술을 마시고 사람들이 녹촉으로 변했던 것 같은데...

 

  “양안에는 눈처럼... 꽃이 활짝 피었네... 집집마다 신년주를... 은잔에다 따르네...”

 

  저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부디 마도술의 영창이 아니길. 차라리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였으면 좋겠다. 말로 변한 릴리아를 보고 싶진 않으니까.

 

  “아무튼... 맞아. 제시카랑 네가 대화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이야. 어려울 건 없고. 내일 1시까지 접견실로 와줬으면 좋겠어.”

 

  내가 말하자, 곡랑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한다. 이 정도면 된 거겠지. 아... 접견실을 모르려나.

 

  “접견실은 로비 중앙에서 우측 복도로 들어가고, 두 번째 문 안쪽이야. 접견실이라고 적혀 있으니까 읽는 건 무리가 없을...”

 

  ... 아.

 

  “그런데 버틴. 나는 글자를 잘 모르는데. 특히나 너희들 말은 내게 모국어로 들리지만 글자는 그렇지 않은 걸.”

 

  ...

 

  “그 시간이면 로비 중앙에 누군가가 있을 거야. 누구에게든 물어보면 금방 안내해줄 거야. 슬슬 업무가 밀려서... 가볼게. 지금 가지 않으면 포그워커가 노동청에 신고할지도 몰라서.”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에게 인사한다. 곡랑도 손을 흔든다.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녀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가 혼잣말하면서 뒤로 돌아, 창고로 향한다.

 

  “두 번째라고 했으니까... 하나, 둘... 손가락 두 개. 맞겠지?”

 

 

 

  [1/11 12:49]

 

  하루가 지났다. 플로피 디스크로 집무실에 귀환한 덕에 업무 처리가 늦진 않았다. 올리버 포그가 노동청에 신고하는 일도 다행히 없었다. 슬슬 시간이다. 접견 시간. 집무실 문을 열고 나온다. 좌측을 돌아보고, 먼저 로비로 향한다. 로비 너머, 반대쪽 복도에서 예니세이에게 안내를 받고 있는 곡랑이 보인다. 아마도 접견실을 찾아낸 것 같다. 곡랑이 들어가고, 예니세이가 내 쪽으로 걸어온다. 나와 그녀가 로비에 딱 도달했을 무렵, 그녀가 내게 말을 건다. 아주 삐뚤어진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버틴 씨. 곡랑의 접견이 있다던데 사실인가요?”

 

  ... 아. 곡랑에게 대외비라고 얘기하질 않았다. 깜빡한 것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일단... 어쩔 수 없으니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대외비이기도 해. 그런데 무슨 일이야, 예니세이? 안색이 안 좋아보여.”

 

  그녀에게 묻는다. 실제로 그녀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다. 어디 아픈 걸까. 하지만 예니세이는 한숨을 푹 쉬며 이렇게 말할 뿐이다.

 

  “접견실 내부에서... 찻잎을 뜯어먹고 있는 사슴 인간을 봤어요. 그걸 보니까 조금 어지러워서.”

 

  ...

 

  “찻잎을 뜯어먹고 있다고?”

 

  “네. 그... 티팩까지 전부 먹고 있던데요.”

 

  세상에. 그녀의 말에 나까지도 어지러워질 지경이다. 사츠키가 청소할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면 할 뿐이다. 티백을 갖다 놓은 갈기모래씨가 조금 섭섭해 할지도. 아닌가? 오히려 호탕하게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시려나.

 

  “일단... 알려줘서 고마워, 예니세이.”

 

  “천만에요.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닌 걸요.”

 

  그녀가 목례 후, 나를 스쳐 지나간다. 뭐랄까. 그녀를 보면 마치 치와와가 떠오르기도 한다. 손대기가 무섭단 뜻이다. 어쨌든 나도 접견실로 향한다. 그녀의 말을 미루어 보면 제시카는 이미 도착했고, 곡랑도 방금 들어갔다. 부디 별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접견실 문앞에 선다. 또 다시 습관적으로 문을 연다. 노크를 해야 했는데. 깜빡하고 문을 열어버린 거다. 그런데, 이번 접견에서 노크가 의미가 있었을지.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제시카, 이거 이렇게 먹는 게 맞는 거야?”

 

  둘이서 티백을 열심히 먹고 있다. 그것도 종이까지. 제시카가 귀를 쫑긋거리면서... 티백을 먹고 있고, 곡랑도 꼬리를 흔들면서 서서 먹고 있다. 티백에서 새어나온 마른 찻잎은 이미 접견실 바닥과 책상을 어지럽힌 채다. 반려견이 집에서 난장판을 피워 놓으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저기... 얘들아. 나 왔어.”

 

  내가 말하자, 두 동물... 아니, 두 사람 모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말한다.

 

  “버틴, 이거 왜 이렇게 써? 향긋해서 단맛이 날 줄 알았는데.”

 

  “맞아, 버틴. 향은 좋은데 맛은 써.”

 

  ... 은근히 아쉬운 목소리가 섞여 있는 제시카. 그리고 곡랑.

 

  “그야, 그건 차를 우리라고 있는 거지, 입으로 씹어 먹는 게 아니거든.”

 

  딱 잘라서 말하자, 곡랑이 아... 하면서 티백을 내려놓는다. 종이에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났다. 제시카는 여전히 티백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말한다.

 

  “차를 우릴 수 있으면, 입으로 먹어도 되는 거 아니야? 제니퍼가 쓴맛이 몸에 좋은 거라고 했는데.”

 

  ... 나도 이 상황에 좀 적응할 필요가 있겠다. 일단, 사람 몸에 유해하진... 않을 테니까. 둘 다 사람이 아니란 게 문제가 될까. 오히려 환상종의 위장은 더 강하지 않을까. 자리에 앉는다. 제시카는 소파에 기대어 앉고, 곡랑은 제시카의 다리 사이, 배꼽 앞에 앉는다. 둘의 꼬리가 살랑거리는 게 눈에 들어온다. 마치 붓 같은 말꼬리와 짧아서 씰룩거리는 것에 가까운 사슴 꼬리.

 

  “접견을... 시작할게. 일단, 접견을 하는 이유는...”

 

  평소대로라면 메뉴얼대로 소개하면 된다. 외근 임무시의 팀워크는 꽤나 중요하므로 두 사람의 친분 향상을 위해서 접견을 진행한다고. 하지만 이 둘은 그렇게 말해도 알아들을 거란 보장이 없다. 뭐라고 해야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잠깐의 침묵 끝에 내가 먼저 입을 연다.

 

  “너희 둘이 친해졌으면 좋겠어서야. 친해지면 나가서 일을 할 때도 서로 잘 해낼 수 있을 테니까.”

 

  이 정도면 꽤나 쉽게 설명한 것 같다. 그럼에도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다. 차라리 소네트를 데려올 걸 그랬나. 아니, 소네트는... 오히려 나보다 더 어렵게 설명했을지도. 마틸다? 마틸다는... 찻잎을 먹는 두 사람을 보고 행동교정학교에 재교육 신청을 넣지 않았을까. 차라리 투스 페어리 씨라면 어땠을까. 주먹을 날리셨으려나. 은근 한 성격 하는 분이니까.

 

  “아무튼, 너희 둘이 평소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면 돼. 자리가 마련 된 거니까.”

 

  내가 말하자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더니, 뭐랄까. 의외로 쑥쓰러운지 얼굴을 피한다. 그러자 곡랑의 소매에서 나무인간들이 줄지어 나오더니 공중에 뜬다. 그리고 기묘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사슴과 녹촉, 동물과 동물, 어느 쪽이 먼저 말을 걸까, 어느 쪽이 먼저 말을 걸까.”

 

  그러자 곡랑이 나무인간 하나를 낚아채더니, 이내 그것을 바라보면서 제시카에게 말을 건넨다.

 

  “사실, 제시카랑 많이 얘기를 해보고 싶었어. 그런데 제시카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랑 많이 친해서, 얘기하기가 좀 무서웠어.”

 

  곡랑의 말에 제시카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운다.

 

  “무슨 말이야? 친해지고 싶으면 친해지면 되지! 버틴의 친구들과는 나도 친구가 되고 싶은 걸?”

 

  제시카의 순수한 목소리에 곡랑은, 조금 마음이 누그러진 듯, 자신의 꼬리를 살랑인다.

 

  “하지만... 패성에서 일을 겪고 나선, 사람들과 떠들 때, 조금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했는 걸. 혹시나 내가 또 잘못을 할까 봐.”

 

  ... 예니세이의 수기가 떠오른다. 곡랑의 프로필에도 적혀 있던 내용이다. 내용에 따르면, 곡랑은 사람들의 녹촉화 사건의 범인이었다. 의도하든 의도치 않았단, 그녀 본인의 바람과는 다르게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때문에 그녀는 ‘바라는 대로’에 따라 패성의 끊긴 다리를 건넜고, 소원이 이루어져 모든 녹촉들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때, 그것이 잘못된 것이란 걸 몰랐다. 하지만 후에 그 사실을 깨닫게 됐다. 여기까지가 프로필이다. 그 이후의 내용은 행동교정학교에서의 기록부가 전부다.

 

  그녀가 지금 어떤 마음을 갖고 사람들을 대하는지. 그건 알 수 없었다. 다만, 여기에서나마 조금은 알 것 같다.

 

  선악의 기준이 모호한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은 순수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마음이 순수하니,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고, 의도치 않은 잘못을 저지른다. 잘못은 잘못이라고 확실히 얘기해야 하고, 그렇게 자신의 관념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사람들은 그걸 ‘성장’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곡랑은... 그런 ‘성장’이 더뎠다. 그녀가 인간이라고 부르기 애매한 이유에선지, 주변 환경의 문제에선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패성의 일화를 겪으면서 성장하고, 후에 재단에 합류하여 내 여행가방에까지 왔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아무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예니세이를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기뻤어. 하지만 예니세이는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곤 해. 나는 그렇게 사람들이 떠나가고, 다시 볼 수 없는 게 무서워.”

 

  곡랑이 울음을 터뜨린다. 엄밀히 말하자면 예니세이의 그런 행동 역시 곡랑의 잘못에서 비롯된 일이다. 그리고 죄는 평생 씻겨나갈 수 없기에 죄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명확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거다. 그렇기에 주막에서도 열심히 술을 기르고, 나누는 것일 테니까.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건 그런 이유에서일 테니까.

 

  “곡랑. 너는 네가 나한테 잘못해서 내가 떠나갈 까봐 무서운 거야?”

 

  제시카가 묻는다. 그러자 곡랑이 고개를 끄덕인다. 제시카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녀에게 답한다.

 

  “그런데 곡랑. 너는 나한테 아직 잘못한 게 없잖아? 왜 벌써부터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야?”

 

  ...

 

  “그야, 내가...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잘못을 할 수 있는 걸.”

 

  곡랑이 뭐라 답했지만, 제시카에게는 별 의미 없는 변명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제시카는 곡랑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말한다.

 

  “하지만 그건 일어난 일이 아닌 걸. 나도 제니퍼한테 가끔 혼나. 하지만 제니퍼는 날 버리지 않아. 그리고 나도 그럴 거야. 그러니까 너도 괜찮아, 곡랑. 그리고 봐봐. 우리가 이렇게 티백을 먹었는데도 버틴이 우릴 안 버리잖아.”

 

  ... 화를 내기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한 거지만... 뭐 상관 없으려나. 제시카가 얇게 웃으면서 말한다. 그러자 곡랑이 제시카의 사슴 몸통에 기댄다. 푹신한 듯, 털을 어루만지면서 곡랑이 말한다.

 

  “너는 정말 따뜻하구나, 제시카. 너를 본보기로 삼길 잘했어. 게다가 몸도 반을 요괴로 바꿀 수도 있고. 혹시 제시카는 상서였어?”

 

  나름대로 감동을 받아 한 말이었겠으나, 정작 제시카에겐 모르는 말이 한 가득이었던 모양이다.

 

  “상서? 상서가 뭐지? 처음 듣는 말인데. 악당을 말하는 거야?”

 

  그러자 곡랑은 그렇게 답한다.

 

  “타인을 돕는 존재에 대해 말하는 거야. 수호신처럼.”

 

  그러자 제시카는 모르겠다는 듯 그렇게 말한다.

 

  “내가 누굴 도와주는진 모르겠지만, 그런 거라면 제니퍼랑 버틴이 상서가 아닐까? 제니퍼랑 버틴은 항상 날 도와주거든.”

 

  그러자 곡랑이 조용히. 어쩌면 제시카에게 들리지 않았을 정도로 작게 속삭인다.

 

  “제시카는 상서가 맞나 봐.”

 

 

 

  [1/15 11:22]

 

  그날 접견 이후, 곡랑과 제시카는 눈에 띄게 자주 붙어다녔다. 정확히는 제시카와 곡랑, 블로니까지 함께다. 제시카는 체인질링의 후손 답게 자신의 몸을 변신하는 법을 곡랑에게 알려줬고, 곡랑은 아주 잠시뿐이지만, 녹촉으로 변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제시카처럼 반만 변신할 수는 없으나, 어쨌든... 곡랑이 원하던 대로 된 게 아닐까 싶다.

 

  그 뒤로 블로니는 제시카에 이어서 탈 것이 하나 더 생겼다며, 농담 삼아서 얘기하곤 했다. 물론 그녀의 농담일 뿐, 진심으로 그녀가 다른 이들을 아낀다는 걸 안다. 그런 면모가 돋보이는 건... 의외로 수학 교실에서였다.

 

  아무도 납득하지 못하겠지만, 블로니는 생각보다 머리가 비상하다. 공부를 안 하는 거지, 이미지대로 바보는 아니란 거다. 애초에 바인 주립대도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은 아닌 곳으로 안다. 그런 그녀가 이따금 제시카와 곡랑에게 공부를 가르쳐줬는데... 이번에 새로운 과외 선생님을 모셨다고 한다. 누굴지 궁금해서 한 번 찾아와봤다. 그녀들이 공부를 하는 장소는 다름 아닌 곡랑의 주막이고, 그 주막에서 공부를 가르치는 건...

 

  “115, 116, 117...”

 

  ...

 

  “스푸트니크, 100을 넘어가면 못 세겠어.”

 

  “제시카, 스푸트니크 선생님이라고 해야지.”

 

  제시카가 짜증내자, 옆에 있던 블로니가 말한다. 주막 문이 열려 있어서 슬쩍 봤는데, 스푸트니크가 곡랑과 제시카를 가르치고 있다. 블로니는 나름의 감독관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 홉... 아홉 다음이 뭐였지?”

 

  곡랑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면서 숫자를 셌지만, 정작 명칭은 까먹은 모양이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곡랑과 굉장히... 창백해진 색상의 스푸트니크. 그리고 눈을 감아버리는 블로니. 난데없이 하늘을 보면서 손가락질하는 제시카.

 

  아무래도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 고개를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한다. 오늘은 딱히 밀린 업무가 없다. 차근차근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그런데 멀리서 사람의 형체가 보인다. 보이는 건... 갈기 모래 씨와 릴리아, 드루비스 씨와 테넌트...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

 

  “내가 산 속에 있었을 때는 이런 동방의 술을 마실 기회가 거의 없었지. 물론 내가 있던 곳도 따지고 보면 동방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곳은 그것보단 서방과 동방의 중심지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내가 산 속에 있었을 때는 양젖으로 빚은 술을 먹고 살았는데 그게 나름대로...”

 

  “이봐, 아저씨. 너무 말이 많다고. 올해 시작한 지도 얼마 안됐는데 벌써 10번은 더 들은 것 같아. 곡랑의 주막을 올 때마다 그 얘길 하잖아!”

 

  자신의 일대기를 늘어놓는 갈기 모래 씨. 그리고  직진으로 화를 내는 릴리아.

 

  “드루비스 씨. 저희는 둘이서 오붓하게 술을 마시는 게 어떨까요? 저희 옆에 있는 신사분들은 너무 시끄러운 것 같은데.”

 

  “거절할게요. 전 둘이 먹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추파를 던지는 테넌트와 칼같이 거절하는 드루비스 씨.

 

  아직 주막이 영업하기 한참 전 시간이다. 조금 일찍 와서 자리를 잡으려고 한다기엔 지나치게 이른 시간. 하지만 멀리서 들리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곡랑은 금방 일어나서 주막 밖으로 튀어나온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곡랑의 주막에 오신 걸 환영해요!”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은 많을 것이다. 예니세이와 곡랑의 불편한 관계. 제시카와 곡랑의 상식, 사회성 문제 등등. 하지만 모든 문제를 오늘 해결할 필요는 없다. 두 사람은 나보다도 오랜 시간을 살았지만, 아직 성장할 여지가 한참은 남은 존재들이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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