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마도학자 접견 일지
· 제 10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티백은 어떻게 먹는 거야?· 제 9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IDM 데이터 탈취 사건
· 제 8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 제 7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벚꽃 에일 (하편)
· 제 7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벚꽃 에일 (상편)
· 제 6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찰리와 보이저의 아리아
· 제 5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네크롤로지스트의 약속
· 재업)제 4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콘블룸의 목소리
· 제 3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크리스탈로의 눈물
· 소설) 제 2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과학과 철학
· 소설) 제 1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삼나무와 어린 장미
1. 벌써 11회임. 야수 속성 대학생 멜라니아와 예비 대학생 데저트 플란넬에 대한 이야기임.
2. 멜라니아는 사실상 주류 메타에서 밀려났고, 데저트 플란넬은 메타가 온 적도 없다는... 유감스러운 점을 엮어서 글을 적었음. 둘 모두 앞으로의 게임에서 어떻게든 쓰였으면 좋겠네.
3. 두 사람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이번에는 최대한 다양한 마도학자들의 출연을 목표로 해서 정신사나울 수도 있음. 그 부분에 대해선 필력 부족이니 미리 양해를 구함.
4. 재밌게 봐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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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회 마도학자 접견 일지 - 사막에 피는 꽃
[2/4 11:11]
“타임키퍼... 타임키퍼?”
노크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대는 것만 같다. 정신을 차려보니 탁상에 놓인 닉시관 시계가 11:11. 이렇게 적혀 있다. 11시 11분. 기묘한 시각에 일어났다. 늦잠이다.
“네. 그런데... 누구...”
내가 묻자, 바깥에 선 누군가의 기척이 사라진다. 아니, 기척이 멈췄다고 표현하는 게 더 옳을지도. 한참을 말이 없던 바깥의 누군가는 어딘지 딱딱해진 목소리로 답한다.
“타임키퍼, 소네트예요.”
아.
“잠시만.”
그렇게 말하고선 집무실의 간이 침대를 정리한다. 침대를 벽 속으로 밀어넣으면 감쪽같이 흔적이 사라진다. 셔츠 단추를 풀어헤친 채로 잠에 들었다. 다시 단추를 채우고, 거울을 바라본다. 차림새가 영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깥의 손님을 더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 이미 닉시관의 주홍 불빛은 11:15를 가리키고 있다.
집무실 문을 연다. 그러자 어딘가 씁쓸한 표정의 소네트가 시야에 들어온다. 그녀는 바닥을 보고 있다. 목소리를 듣고 알아채지 못해서 서운한 걸까.
“미안해, 소네트. 잠결에 정신이 없어서.”
그러자, 그녀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괜찮아요, 타임키퍼. 그게, 다름이 아니라... 최근 외근 임무와 관련해서 보고서 검토를 받으려고 왔어요.”
이제 보니 그녀의 손에 서류가 한 가득이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잠에서 깨자마자 서류더미라니.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답한다.
“책상 위에 두면 내가 나중에 처리할게. 일단은 물을 좀 마셔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고, 그녀를 스쳐 지나간다. 소네트는 멀뚱멀뚱 서 있다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간다. 너무 쌀쌀맞게 굴었나 싶긴 하지만, 일은 일이다. 반대로 여가 시간은 여가 시간이다. 간만의 휴가다. 방해 받고 싶지 않다.
하품을 꾹 참으며, 복도를 걷는다. 여행가방 안 로비에는 아주 기묘한 풍경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인과라는 것이 개인의 행동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갈천이 팔짱... 아니, 날개짱이라고 하는 게 맞을까. 아무튼 날개를 교차시킨 채로 자신의 전용 횟대 위에 앉아 있다. 옆의 원형 의자에 앉아 있는 건... 6...
“인과는 운명과도 같습니다. 그 형태는 기하학과 크게 다르지 않죠. 세 꼭짓점에 무수한 점인 선을 그어서 삼각형이 만들어지듯, 인과 또한 무수한 업이 쌓여 시작과 끝을 잇고, 또한 변해가는 겁니다.”
...
“내가 사는 산 속에선 수많은 동족들이 인과에 의해 백골이 되었네. 이 또한 그들의 업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이 굉장히 심오한 대화를 하고 있다. 유난히 표정 변화가 없는 두 사람이 무표정으로 저런 얘기를 하고 있으니...
“완벽한 답을 말해드릴 순 없겠지만,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뭔가 다가가기가 꺼려진다. 두 사람의 대화로 그냥 둬야할 것만 같다.
“그런데, 갈천 씨. 바닥에 가루 같은 것이 많이 떨어지는데, 괜찮은 겁니까?”
“뭐가 괜찮냐는 거지? 나는 멸몽조다. 새의 깃털을 가지고 있는 만큼, 깃털 가루가 떨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아, 혹시 불편했던 건가? 이게 불편했다면 사과하겠다.”
“아닙니다. 다만 제 앞에 놓인 차에 다분히 섞여 들어가서, 마시기엔 조금 곤란하겠군요.”
“미처 신경 쓰지 못했군. 내 불찰이다.”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완전무결한 새 또한 마찬가지겠죠.”
... 다시 복도에 들어섰을 땐, 그들의 진지한 목소리가 점점 흐려져, 거의 들리지 않았다. 로비에서 오른쪽 복도를 지나, 25M 정도 걸어가면, 안쪽에 주방이 있다. 지금 시간은... 대략 11시 반 정도 되었을 것 같다. 바니바니가 점심을 준비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주방 문을 연다. 향긋한 베이컨 냄새가 난다. 안쪽을 보니 역시나 바니바니가 열심히 요리 중이다. 언제나처럼 바니걸 복장을 입은 채다. 요리하면서 입어도 괜찮은 걸까? 물론 앞치마가 있긴 하지만... 아무튼 마도학자 치고도 굉장한 그녀의 근력 덕분일까. 아예 커다란 솥으로 웍질을 하고 있다. 잘게 자른 베이컨에 불향을 입히는 것 같다.
“뭐야? 버틴이잖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요리를 하는 바니바니의 옆, 데저트 플란넬이 계란프라이를 하고 있다. 비교적 여유로우면서도 능숙하게 계란을 뒤집는 그녀다.
“여긴 무슨 일이야? 벌써 배고파서 온 건 아니겠지?”
그녀가 계란프라이에 후추를 치면서 말한다. 물을 마시러 왔을 뿐인데, 막상 요리 냄새를 맡으니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하다.
“좀 있다가, 동료들이랑 같이 먹어야지.”
조금은 의외다. 늘 사업과 관련된 이야기만 하는 데저트 플란넬이 이렇게... 요리도 잘할 줄은.
“데저트 플란넬. 요리도 잘할 줄은 몰랐어.”
내가 말하자, 그녀가 윙크를 날리며 답한다.
“당연하지. 난 안 해본 일이 없거든. 재단에 오기 전엔 햄버거 가게나 중국집에서 일해본 적도 있어. 이 정도는 껌이지.”
그녀의 말에 바니바니도 활짝 웃으면서 말한다.
“데저트 플란넬 씨가 일손을 거들어 준 덕분에 저도 식사 준비가 편해졌어요.”
나도 무언가 도와줄까 싶지만, 나는 요리를 못한다. 어쩌면 소네트보다도 못할 것이다. 집무 외엔 마땅한 능력이 없는 나 자신이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그런데 데저트 플란넬. 전에 레굴루스랑 무슨 사업을 한다고 하지 않았어?”
일전에 지나가듯이 들었던 게 떠오른다. 데저트 플란넬이 에즈라의 화보 사진으로 무슨 사업을 한다고 했었던 것 같다. 투자금은 레굴루스를 통해 받기로 했었고. 아마도... 어떤 피자 가게의 홍보 자료를 받았던 것 같은데...
그녀가 난처한 웃음을 짓고는 딱히 답하지 않는다. 결과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레굴루스가 그 즈음, 우울해서 방에 틀어박혀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고생이 많아. 두 사람 모두. 고마워.”
그렇게 인사하곤 물을 한 잔 마시고 주방을 떠난다. 로비를 통해서 가면 또 다시 6과 갈천의 철학적 논제에 휘말릴 것만 같다. 때문에 황무지 쪽으로 나간다.
상쾌한 바람. 널리 펼쳐진 숲. 매끈하게 흐르는 강물과 조금은 규격이 안 맞는 타일들까지. 황무지는 마도학자들의 기억을 담아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하지만 일기예보가 전혀 들어맞지 않듯, 황무지의 불규칙한 지형들은 여전한 모습이다.
오랜만에 그곳으로 간다. 산책 겸이다. 나에게는 가장 고향 같은 곳. 그 시절 영국을 담은 안개의 고향으로.
[2/4 13:10]
굽이치는 강가를 따라 걷는다. 여행가방 멤버들은 저마다 가방 안의 숙소를 갖고 있다. 방은 한 사람 당 하나씩 배정이 된다. 그러나 모든 멤버들이 방에서만 지내는 건 아니다. 곡랑은 황무지의 주막에서 지낸다. 겨울 씨는 모조품보단 자신이 원래 살던 땅이 나은지, 폭풍우 경고용 단말기를 지참한다는 조건 하에 러시아의 또 다른 황무지에서 살고 있다. 반면 레굴루스처럼 갈 곳을 잃었으면서도 재단 본부에서 살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방 안 숙소에서만 지낸다.
런던을 옮겨 놓은 안개의 고향에서 사는 이들은 몇 없다. 대표적으로 멜라니아가 있다. 물론 그녀는 대학 생활 때문에 바깥 생활을 더 많이 하지만... 어쨌든 이곳에서 ‘산다’고 할 수 있는 건 그녀 뿐이다. 못 만난지도 꽤 됐는데 오랜만에 만나러 갈까.
멜라니아는 통칭 ‘아름다운 거리’의 1-14번지에서 살고 있다. 평범한 주택은 아니다. 꽤 큰 사무실에 가깝다. 저번에 릴리아와 콘블룸의 접견 때 방문했었다. 대부분을 라미레스의 사무실로 쓰고 있다. 본인의 개인실은... 나도 딱히 들어가본 적은 없다.
굽이치는 강가의 평평한 물이 끝나는 지점에 1-14번지가 있다. 문화 버스를 호출할 수 있는 메시지의 소리, 바로 옆에 있다. 겉으로 보기엔 조금 크고 별 거 없어 보이는 건물이지만, 내부는 기상천외한 함정들. 이른바... 보안 용품으로 가득하다. 때문에 그녀의 건물 앞에서는 반드시 노크를 하게 된다. 무단 침입했다간 라미레스의 의도치 않은 보복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
노크를 한다. 똑똑. 건물이 커서 안 들리려나. 바로 우측에 초인종을 누른다. 딩동 소리와 함께 초인종 위, 황동 확성기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라미레스입니다. 누구시죠?”
“나야, 버틴.”
“버틴? 잠깐만. 10초... 아니, 8초만 기다려!”
그 뒤엔 황동 확성기에서 우당탕탕 기묘한 소리가 들린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그녀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녀의 안경은 얼굴에서 45도 각도로 비뚤어져 씌여 있다. 오른쪽 눈만 겨우 보정하는 안경알. 그리고 에이시 선생님이 물어뜯기라도 했는지 마구 헝클어진 머리카락. 화장 따위는 없는 얼굴. 대충 걸친 가죽 자켓.
“하... 하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멜라니아다.
“멜라니아, 인사는 똑바로 바르게.”
옆에서 에이시 선생님이 함께 인사한다.
“아, 알겠어요, 에이시 선생님. 오랜만이야, 버틴. 무슨 일 있어?”
그녀가 안경을 고쳐 쓰며, 묻는다. 그냥 편한 마음으로 찾아온 것 뿐인데, 멜라니아 앞에 있으면 뭐랄까. 괜히 시험을 보는 것처럼 부담스러워지는 면이 있다. 어차피 그 또한 내 착각일 뿐이리라. 고개를 젓고, 그녀에게 최대한 편안한 말투로 답한다.
“그냥 왔어.”
그러자 멜라니아가 멍한 표정을 짓더니 답한다.
“어... 레굴루스도 아니고 버틴, 네가 ‘그냥’ 왔다고? 잠깐만. 생각할 시간을 줘. 4초... 아니, 6초 정도만.”
그녀가 검지와 중지로 턱을 매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1초, 2초, 3초... 정확히 6초가 되었을 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시간 엄수는 정확한 그녀 답게.
“들어와, 버틴. 커피 밖에 없는데 괜찮지? 아, 그리고 다른 손님도 있는데 네가 불편해할 사람들은 아니야. 그러니까... 존재들은 아니야.”
‘사람들’이란 표현을 굳이 ‘존재들’로 바꾼 이유는 뭘까. 그녀에겐 괜한 표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행동엔 반드시 이유와 계산이 깔려 있으니까. 그녀를 따라 들어간다. 한 걸음. 두 걸음. 정확히 24걸음을 걸어서 계단을 오른다. 48계단을 올라서 다시 오른쪽으로 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렇게 33걸음을 걷는다. 그녀가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다.
“내 방에 오는 건 처음이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가 웃으면서 문을 연다. 어두운 라미레스 복도의 풍경과는 다르게 방은 사뭇 밝다. 먼지가 쌓인 목재 방 같은 느낌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잘 정돈 된 나무 집에 온 느낌이다. 하얀 침대와 갖가지 보안 서적이 잔뜩 삽입된 책장. 그리고 놀랍게도 손님 둘이 있다. 그녀가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다.
“타임키퍼, 예상했던 순간에 도착했네요.”
편안한 체육복 차림으로 조용히 커피를 마시는 갈라보나 씨. 그리고...
“월. 월월. 아오오우우우우.”
...
“강아지가 친구를 반깁니다.”
회색 베레모를 쓰고 있는 피클즈까지.
“다들, 오랜만이네.”
멜라니아, 피클즈, 갈라보나. 조합이 신기하다. 뭐랄까. 대학생, 강사, 교수 같은 느낌이다.
“이번 교양 과목 과제가 철학과 점성술을 엮어서 보고서로 제출하는 거였거든. 나나 에이시 선생님은 이쪽 분야에는 전문성이 떨어지다 보니, 과외 선생님들을 초청한 참이었어.”
멜라니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다. 그들이 앉은 소파의 중앙, 테이블 위엔 여러 종이들이 난잡하게 놓여 있다. 내 집무실 책상 위보다도 난잡하게.
“월. 월월. 월. 아우우우. 월. 아우.”
...
“강아지가 선생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거라고 말합니다.”
도기의 기계음이 끝나자, 피클즈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그 뒤에 앞발로 도기를 내려친다. 아마도 번역이 잘못된 것 같다. 무슨 의미로 말했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맞장구를 쳐준 게 아닐까 싶다.
“피클즈는 누군가를 가르치기엔 자신은 모자라다고 겸손을 표한 거예요. 도기가 번역한 내용은 다소 겸손하지 않아 보일 수 있는 오해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피클즈가 시무룩해진 거고요.”
“네?”
나도 모르게 자동반사처럼 말이 튀어나왔다. 갈라보나 씨의 통역... 번역? 때문이다.
“갈라보나 씨. 혹시 피클즈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거예요?”
그녀에게 묻는다. 심지어 피클즈도 처음 안 사실인지 공허한 눈빛에서 오랜만에 생기가 돈다. 하지만 갈라보나 씨는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는 고개를 저으며 답한다.
“아뇨. 알아들을 순 없지만, 피클즈의 행동 방식과 성격. 그리고 평소의 태도를 보고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죠. 피클즈는 언제나 겸손하니 오만한 말을 하지 않고, 피클즈가 도기를 내려칠 때는 도기가 번역을 잘못했던 경우가 많았거든요. 여러 상황을 조합하면 아까 제가 말했던 결론이 나오는 거죠.”
갈라보나 씨의 논리정연한 대답이... 모두에게 득이 된 건 아닌 것 같다. 피클즈가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아우우. 아우.”
도기가 꺼져버린 건지 아무 응답이 없다. 그러자 멜라니아가 그녀에게 묻는다.
“갈라보나 선생님. 피클즈가 지금 얘기한 것도 이해할 수 있으세요?”
그러자 갈라보나 씨가 답한다. 그것도 아주 단답으로.
“아니요.”
왜인지 나는 알 것 같은데. 피클즈가 시무룩한 이유를.
그 뒤엔 멜라니아가 커피를 내 왔다. 막상 철학과... 점성술의 연결? 뭐 그런 주제였던 것 같은데 피클즈는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도기가 꺼져버린 뒤론 혼자서 웅얼웅얼댈 뿐이었고, 대부분의 조언은 갈라보나 씨의 몫이었다. 멜라니아의 얼굴은 점점 더 피곤함에 절어가고, 갈라보나 씨는 10분 정도 간격으로 관자놀이에 마사지를 했다. 그리고 커피를 들이켰다. 그녀가 마신 커피만 해도... 30분에 한 잔 꼴로 마시는 것 같다. 내가 이곳에 온 지 2시간이 지나갔을 무렵엔, 머그컵에 커피가 5번이나 가득 찼다.
“갈라보나 선생님. 그런데 커피 그렇게 마시면 몸에 안 좋지 않아요?”
멜라니아가 하품을 하며 묻는다. 그러자, 갈라보나 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한다.
“대학에서 일할 때는 이것보다 4배는 더 많이 마셨어요. 지금까지 멀쩡한 걸 보면 괜찮은 게 아닐까요?”
나와는 정말 다른 세계의 사람이구나 싶다. 나도 피곤할 때 커피를 입에 대긴 한다. 하지만 저렇게 수혈하듯 마신 적은 없다. 게다가 2시간 내내 과학과 철학에 대한 조언을 하는 건... 멜라니아나 나로 하여금 진절머리나게 만들 정도라고 생각한다.
다만 멜라니아는 그럼에도 꽤 독기 어린 사람이다. 그녀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보고서 작성에 열중하기 시작한다.
“에너지바 좀 드릴까요?”
갈라보나 씨가 체육복 바지에서 에너지바를 꺼낸다. 아무래도 영국산 에너지바인 모양이다. 멜라니아는 보고서에 집중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갈라보나 씨가 에너지바 포장을 뜯는다. 포장이 뜯긴 에너지바를 그대로 멜라니아의 입에 넣는다.
슬슬 자리를 떠야하나 싶었을 즈음, 단말기에 알람이 울린다.
“잠시만.”
그렇게 말하고 잠시 멜라니아의 방 밖으로 나온다. 내가 나가는 것을 딱히 셋 모두 신경쓰진 않았다. 조용히 나와서 단말기를 확인한다.
‘Z 씨’
단말기에 그렇게 문자가 적혀 있다. 종류는 메일이다. Z 씨에게서 온 메일이다. 보통은 전화로 말씀하시거나 호출을 하실 텐데 무슨 일이실까. 내가 휴가라서 양해를 구해주신 걸까. 버튼을 눌러 단말기를 확인한다. 문자에 담긴 내용은...
대충 정리하자면 이렇다.
접견에 관련된 내용이다. 접견 대상은 멜라니아와 데저트 플란넬. 특이사항은 없음. 평소 하던대로 익월 11일 13시에 진행할 것. 참고 서류는 마틸다 편으로 금일 17시까지 집무실에 보내놓을 예정...
메일로 보낸 이유는... 출장 중? Z 씨가 출장을? 기묘한 일이다. 보통 본부 밖으로 나갈 일이 많지 않으신데.
17시면... 닉시관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주홍색으로 빛나는 네온이 15시 49분을 가리킨다. 마틸다를 맞이하려면 슬슬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멜라니아가 접견 대상이다. 지금 들어가서 얘기하기엔... 갈라보나 씨와 피클즈도 있다. 어쨌든 외부로 발설할 이유가 없는 것이 접견이니, 굳이 지금 말할 필요는 없다. 아직 접견까진 1주일 정도 남았다.
[2/4 17:11]
17시를 한참 넘겼다. 타임키퍼가 된 이후로 시간에 있어선 강박이 생긴다. 그게 내 일이기도 하니까. 강박적으로 시간을 계산해야 하는 것. 어쩌면 당연하게 생긴 습관일지도 모른다.
마틸다는 오지 않았다. 오다가 쓰레기 봉지라도 뒤집어 쓴 건 아닐까. 소네트라도 마주쳤다. 별에 별 생각이 들지만, 굳이 단말기로 연락하진 않기로 한다. 다소 못미더운 부분이 있더라도 말 없이 사고를 칠 사람은 아니다. 그녀는 자랑스러운 프랑스인이니까.
책상을 검지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린다. 집무실 내무에는 괘종시계의 초침 소리를 제외하면 손가락과 책상이 맞닿아 나는 소리, 그리고 내 숨소리 뿐이다. 두드리는 빈도가 점점 빨라질 즈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버틴, 나야.”
마틸다의 목소리다. 소네트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구분이 편하다. 그녀 특유의 괴팍한 억양 때문일까.
“들어와, 마틸다.”
마틸다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런데... 그 모습이 참 기묘하다. 그러니까... 굉장한 복장을 입고 있다.
“뭐...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야. 그렇게 보지 말라고!”
새빨개진 얼굴, 뾰로통한 표정. 그녀의 지금 복장은... 정말이지 안 어울리는 복장이다. 새빨간 원피스에 하얀색 점이 들어가 있는데 옷이 뭐랄까...
“너, 할머니 옷 아니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이건 그냥... 그러니까... 일이라고. 일. 데저트 플란넬 씨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는데...”
...
“설마 피자 가게 광고용 옷을 입은 거야? 에즈라만 하는 거 아니었어?”
내가 묻자 마틸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답한다.
“에즈라 양도 레굴루스 씨도 있었지만... 그게... 이 마틸다 님은 정말 돈 때문에 한 건 아니고... 위대한 프랑스인인 마틸다가 고작 돈 따위에... 그냥... 피자라길래... 소네트가 촬영을 같이 할 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 체념한 표정으로 푸념을 놓는 마틸다. 그런데... 에즈라 양? 마틸다는 아직 에즈라가 여자인 줄 알고 있는 건가?
“아무튼! 이거 받아. Z 씨가 촬영장에 와서 박수를 치면서 너보고 전달해달랬어. 고맙다, 고마워. 덕분에 Z 씨한테 안 좋은 인상을 남기게 돼서 참 고마워.”
마틸다는 그렇게 말하고선 내 책상에 서류를 툭 던지...지 않고 공손하게 내려놓는다. 그리고 화난 오리처럼 뒤뚱뒤뚱 걸으며 나간다. 옷이 불편한가?
그녀가 문을 닫는다. 집무실이 고요하다. 아직 휴가는 끝나지 않았는데, 왜인지 일을 하러 돌아온 느낌이다. 조금 더 쉴까. 아니, 서류만 잠깐 확인하자. 서류만.
멜라니아. 마도학 능력은... 물체의 변환, 변신 또는 순간이동. 특이사항, 3급 경범죄 또는 중범죄에 해당하는 일을 일으킬 수 있음. 주의 요망. 도벽이 의심 됨. 도벽은 사츠키나 칸지라한테 있지 멜라니아한테는 없는 것 같은데... 아니지. 그녀가 이따금 소더비의 보석에 눈독을 들이는 걸 보면... 잘 모르겠다.
대학은... 여전히 재학 중. 4학년. 논문을 한창 쓸 시기. 스트레스로 인한 감정 통제의 어려움...
데저트 플란넬. 마도학 능력은 마도학 생물 플래피의 컨트롤. 다수의 사업에 실패 경험을 갖고 있음. 빚이 많음. 학력은... 확인되지 않음. 그 아래로는 그녀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이 수두룩하게 적혀 있다. 노점상. 요리사. 배달 알바. 레몬에이드 판매상. 모델 알바. 전단지 알바. 미용사... 뭐랄까. 맥락도 없고, 그냥 잡히는대로 살아왔구나 싶은 이력이다. 나나 재단에서 자란 소네트, 마틸다와는 너무나도 다른 삶이다. 정해진 길을 따라, 똑같이 걸어나갔던 우리와는 다르게 그녀의 삶은...
나도 재단 바깥에서 살았었다면... 그런 삶을 살고 있었을까. 나는 그녀의 삶을 동경하는 걸까. 내가 그녀의 삶을 동경할 자격은 있을까. 아니, 이런 쓸데 없는 생각은 집어치우고.
멜라니아와 데저트 플란넬. 둘 사이에 접점이 있을까. 전투 임무 시에 체술에 중점을 둔다는 점? 그런 걸로 접견이 성사할 수 있을까.
막상 서류를 보니 머리가 어지럽다. 오늘은 날이 아니다. 휴가니까. 내일 하자, 내일...
[2/11 11:33]
베이비 블루가 티 파티를 떠날 거라면서 내게 쿠키를 가져다 줬다. 본인이 직접 만들었다는 쿠키 세트다. 초코칩 쿠키, 버터 쿠키. 따뜻하면서도 향긋한 향이 났다. 요즘 그녀에게 외근 임무도 딱히 주어지질 않다 보니, 다녀오라고 했다. 그래서 어디로 갔나 했더니... 꿈 속 원더랜드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어 떠나는 건지, 그냥 자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접견에 가져갈 다과로는 충분할 것 같다.
Z 씨에게 접견 통지를 받은 이후로 멜라니아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갈라보나 씨에게 소식을 듣기론, 대학교 과 연구실에서 계속해서 보고서를 작성 중이라고 한다. 때문에 멜라니아에겐 단말기로 연락을 보내 두었다. 답장이 오진 않았다. 다만 확인 했다는 표시는 떴기에 아마 13시 정각 0초에 정확하게 방문하지 않을까 싶다.
데저트 플란넬에게는 그저께 접견이 있다고 전달했다.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취소하겠다고 했다. 순순히 취소하겠다길래 의아했지만, 접견도 재단의 공식 행사인 만큼 개인적으로 ‘외근비’를 요구할 것이라고 했기에... 부디 그 일이 나에게 번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마 이 소식을 들으면 올리버 포그가 재단 본부 광장에서 1인 시위를 하지 않을까.
무쪼록 시간이 조금 남았다. 아침은 잉글리쉬 브랙퍼스트로 떼웠으나, 접견까지 비는 시간에 딱히 할 것도 없다. 밥이라도 먹을까.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딱히 그러고 싶진 않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집무실에 다시 돌아올 때는 왜인지 접견이 끝난 이후일 것만 같다. 접견용 서류와 보고서를 챙기고, 문을 연다. 복도로 나선다.
정오가 되어가는 시간. 기하학 창틀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 거기에 비친 미세먼지 입자. 로비 쪽으로 걸어간다. 뭔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서 살펴보는데 로비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다.
“와, 에즈라! 정말 예쁘게 찍혔잖아요. 나도 저렇게 모델 같은 거 하면 어울리려나.”
“스파토데아 씨도 분명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저보다 훨씬 멋진 사람이잖아요.”
“아니, 이 꼬맹이는 모델 일을 하기에는 아직 몸매가 부족하다고.”
... TTT는 어디 가고 그녀의 TV만 3단으로 쌓여 있다. 그 TV에선 최근, 에즈라와 레굴루스, 마틸다가 찍었다던 그 피자 가게 광고가 나오고 있다. 레굴루스가 피자를 맛있게 먹는 장면, 에즈라가 피자를 양 손에 들고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온다.
스파토데아가 에즈라를 칭찬했다. 에즈라는 수줍은 표정으로 겸손을 보였다. 그리고 릴리아는... 스파토데아를 놀렸다. 대충 그런 상황이다.
“뭐라는 거예요, 릴리아 씨. 저랑 키도 비슷하면서.”
“뭐야? 이 머리에 근육만 찬 꼬맹이가...”
“그러는 릴리아 씨는 머리에 알코올만 가득 찬 거 아닌가요?”
릴리아와 스파토데아가 서로 으르렁거리며 노려본다. 에즈라가 가운데에 서선 중재하기 시작한다.
“여러분, 진정하세요. 스파토데아 씨는 이래뵈도 나이에 비해 키도 큰 편이고, 아주 건강한 편이에요. 게다가 제가 과외도 해주고 있어서 학교 성적도 올랐고요. 스파토데아 씨는 아주 멋있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릴리아 씨도 어린 나이에 제노 군사 아카데미 교관 자격증을 얻었던 능력 있는 사람인 걸요. 물론 과도한 음주는 좋지 않지만...”
하지만 그의 중재에도 꼬투리를 잡는 릴리아였다.
“과도한 음주? 버섯 패티쉬 인간 도련님. 나는 언제나 ‘적정량’을 마신다고.”
릴리아가 에즈라를 공격하자, 이번엔 스파토데아가 에즈라를 물러서게 했다. 그리고 릴리아에게 반격했다.
“조금만 마셔도 그 상태로 비행하면 음주 운전이라고요!”
그때, 로비 구석, 흔들의자에 앉은 채, 얼굴에 신문을 뒤집어 쓴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애송이들. 더 시끄럽게 굴면 확 물어버린다.”
누군가 했더니 보라색 알로아 셔츠 차림의 파비아다. 그의 그림자 뒤에 어두운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의 마도술 늑대들이 정말로 세 사람을 물어 뜯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껴들지 말고 조용히 해, 아이스크림 피자 좋아하는 가짜 이탈리안 아저씨.”
“뭐... 뭐야? 가짜 이탈리안? 이 젤라토 맛도 모르는 망할 소련 여자가! 피터, 안드레아, 말레피센트, 토니카, 레옹. 슬슬 사냥 시간이야. 침 흘리지 말고 일어나!”
“호오... 그래, 너한테 내 Su-01ве 좀 소개시켜 줘야겠다. 아주 끝내주게 즐거운 시간이 될 거야.”
... 중재를 해야 하는데... 내가 끼어든다고 말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릴리아와 파비아가 누가 늑대인지 개인지 모를 정도로 서로 물어뜯고 난리가 났다. 막상... 그 싸움에 마도술은 딱히 안 보인다. 그저 그녀와 그의 무력으로 싸울 뿐이다. 파비아의 늑대들은 그림자 바깥으로 나오고 싶지 않은지 엎드린 채로 구경하고 있고, 릴리아의 빗자루는 사실 이곳에 없다. 아마도 그녀의 차고에 있으리라. 바닥에 쌓인 먼지가 피어오르고, 어쩌면 갈천 씨의 깃털 가루도 공기 중에 피어오른다. 사츠키가 청소할 때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다.
일단 두 사람이 어딘가 다쳐서 올 확률이 높다. 투스 페어리 씨에게 미리 문자를...
“두 사람 모두 닥치고 그만두지 남은 이빨을 전부 뽑아버리겠어요.”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투스 페어리 씨다. 그녀가 아주 평이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독설을 퍼붓는다. 릴리아와 파비아는 싸우다 말고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로 돌아간다. 투스 페어리 씨... 원래 좀 무서워 보이는 사람이었지.
“여러분, 싸우라고 틀어준 광고가 아니거든요? 그만 싸우는 게 좋아요. 안 그럼 TV를 전부 꺼버릴 거예요.”
TV 화면에서 피자 광고가 사라진다. 이윽고 TTT가 매서운 표정을 짓고 나와서 얘기한다. 마도학자들은 대부분 모두 한 성격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TTT가 나오자, 파비아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그가 소리치며 도망간다.
“유... 유... 유령이다!”
파비아는 굶주린 늑대가 사냥감을 추적할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로비에서 달아난다. 나를 스쳐 지나갔지만, 나에겐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가 도망간 방향이 내가 있던 곳이었기에... 로비에 있던 모두와 눈이 마주친다.
“엇, 버틴! 거기 서서 뭐하고 있었어요? 저흰 방금 전에 에즈라가 TV에 나온 걸 보고 있었어요.”
스파토데아가 언제 싸웠냐는 듯, 내게 달려와서 말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알아. 나도 전에 봤거든.”
에즈라는 머리를 긁적이고, 투스 페어리 씨는 짧은 한숨을 내쉰다. 릴리아는 부끄러운 건지 멀찍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버틴 씨! 오늘은 무슨 일이 있길래 로비를 지나가는 건가요? 저한테만 살짝 얘기해줘요. 빨리요!”
TTT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묻는다. 하지만 대외비이니 딱히 얘기해줄 수 있는 건 없다. 그녀도 저번에 접견을 마쳤으니, 언젠가 내가 얘기할 수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겠지.
내가 말을 못 잇자, 투스 페어리 씨가 눈치를 챈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인다. 본인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뜻인 것 같다.
“그만 이야기 하고, TTT 씨. 오랜만에 치아 검진 좀 해도 괜찮을까요?”
“네? 치아요? 저는 TV 속에 있는데요? 어... 투스 페어리 선생님. 그 펜치는 뭐에요? 진짜예요? 아니죠? TV는 소중하다고요. 선생님?”
이제 보니 릴리아와 파비아 모두 조용해졌던 이유를 알 것 같다. 투스 페어리 씨의 한 손엔 아주 묵직한 펜치가 들려 있다.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와! 투스 페어리 씨의 검진을 옆에서 볼 수 있는 거예요? 저 볼래요. 볼래요!”
“저기요? 스파토데아 씨? 절 구해줘야죠. 옆에서 구경하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에즈라 씨? 에즈라 씨!”
스파토데아가 금방 에즈라의 손을 잡고 투스 페어리 씨 옆으로 간다. 어린 아이의 흥미는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 같다. 다행이다. 갈 길을 갈 수 있어서.
접견실 앞으로 향한다. 시간이 정오를 가리킨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사츠키가 미리 청소를 해둔 것인지 먼지도 적고, 깔끔하다. 탕비용품은 갈기모래 씨가 채워둔 건지 인디안 차로 가득하다. 은근히 치커리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구수한 향이랄까.
자리에 앉는다. 맞은편 의자에는 아직 아무도 없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다. 콘블룸의 도청 장치나 클릭이 없는지 살펴본다. 딱히 의미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내 눈에 안 보이는 것들이니까.
시간이 꽤 남았다. 그동안 서류 정리를 한다. 내게 필요한 서류들. 멜라니아와 데저트 플란넬의 인적사항. 그리고 내게 필요 없는 서류들. 그녀들의 취미. 어차피 대부분은 내가 숙지하고 있는 부분들이니까. 서류의 첨삭을 가하니 양이 절반 정도로 줄었다. 쓸모 없는 페이지는 종이 뭉치 아래쪽으로 뒤집어 둔다.
그러는 동안 약 40분이 지났다.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데저트 플란넬이다.
“어라? 버틴, 일찍 와 있었네.”
그녀가 놀란 얼굴로 내 쪽으로 다가온다. 그러다 자신이 앉아야 할 자리가 어딘지 금방 알아낸 것 같다. 그녀가 내 맞은편에 앉는다.
“우와, 밖에 봤어? 로비에 사람들이 짱 많아. 정신 사나워서 죽을 뻔했다니까.”
짱? 젊은 말투와 호주식 억양이 뒤섞여서 그녀의 언어는 꽤나 특이하다. 멀리서 들어도 그녀가 말한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니까.
“아 맞다. 플래피, 나와 봐.”
그녀가 자신의 하트 모양 기계를 꺼낸다. 완드... 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하지만, 그녀가 버튼을 누르자 그녀의 디지털 에뮤가 초록색 빛을 흩날리며 튀어나온다.
초록색 홍학. 이렇게 표현하면 말이 맞지 않나? 녹학이 맞을까. 아무튼 덩치 큰 플래피가 접견실 한 구석을 가득 채운다. 플래피는 주변을 잠시 둘러보다가 이윽고 나와 눈을 마주친다. 그녀가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하... 하이.”
나도 인사한다. 손을 흔들면서. 그러자 플래피가 기분이 좋은지 자신의 주인에게 얼굴을 부비적 거린다.
“아이 참, 플래피가 기분이 좋은가 봐. 이상하게 네가 인사해주면 좋아한다니까?”
칭찬일까. 칭찬이겠지. 데저트 플란넬이 플래피의 턱을 열심히 긁어준다. 플래피의 머리 위에 도트 모양 하트가 떠오른다.
“오늘 아르바이트가 있다고 했었잖아. 데저트 플란넬. 취소한 거야?”
그녀에게 예의상 물어본다. 취소했으니 이 자리에 있을 테니까.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외근 임무가 좀 많으면 월급도 오르고 할텐데, 사고 싶은 집을 사기엔 턱 없이 부족해. 나도 내가 마도학적 재능이 모자라단 건 알기 때문에 외근 임무에 적합하지 않단 건 알아. 그래서 딱히 불만은 없긴 해. 그런데... 그래도 꿈을 위해서 살려면 어쩔 수 있겠어. 여가 시간을 쪼개서라도 일을 하고 돈을 벌고 해야지. 오늘은 ‘접견’ 때문에 취소했지만 말이야.”
...
“외근 임무가 늘어날 수 있도록 재단 본부에 건의해볼게. 나도 네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니니까.”
짧은 이야기가 그 뒤로도 오갔다. 대부분은 데저트 플란넬의 아르바이트 이야기였다. 최근에는 반려동물 미용을 시작했다느니, 피클즈보다 커다란 강아지들 상대로 목욕도 시켜야 한다느니... 여러가지 경험담들을 얘기해줬다. 늘상 들어주는 사람의 입장에 가까운 나다. 그녀에게 마땅히 해줄 이야기가 없기에,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제스처를 보이면, 옆에서 플래피가 폴짝 점프를 뛰곤 했다.
그러다 1시 정각 0초, 닉시관 시계가 비프음을 울렸을 떄였다. 아니나 다를까, 멜라니아의 노크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녀 특유의 노크 소리가 있다. 문을 한 번 두드리고, 다시 한 번 두드릴 때까지 정확히 2초가 소요된다. 그래서 노크만으로도 그녀인 것을 눈치챘다.
“들어와, 멜라니아.”
곧이어 접견실 문이 열린다. 눈에 보이는 건...
“멜라니아, 노크를 4초 정도 일찍 했어야 정확히 13시 0분 0초에 접견실에 들어올 수 있었어. 평가는 B+야. 복습이 필요해.”
... 그녀의 에이시 선생님이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생기 없는 평가를 뱉어낸다. 멜라니아는 평소 입는 복장 그대로 왔다. 새빨간 스타킹과 가죽 자켓, 수수한 캡 모자와 도수 없는 안경까지.
“에이시 선생님... 오늘만 봐주세요. 저 다크써클이 정확히 1.76cm 늘어났다니까요. 37이 자로 재줬으니 정확할 거예요.”
한눈에 봐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다. 평범한 옷차림, 늘 그랬듯 묶음머리지만, 그 사이에 삐져나온 금발 머리카락. 그녀의 완벽주의가 점점 피곤함에 침식당하는 것만 같다.
“미안. 좀 늦었지. 변수를 고려했는데도 37이... 내 다크써클이 늘어났다면서 정확한 수치를 계산해주겠다고 난리법석인 바람에...”
그녀가 사과와 한숨을 동시에 풀고는 데저트 플란넬의 옆자리에 앉는다.
“괜찮아. 그렇게 늦지도 않았어. 그러니까... 고작 4초 늦었는 걸.”
그녀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 물론 그녀의 퀭한 눈동자를 보니 내 언어는 딱히 닿지 못한 것 같다.
“그러면 모두 왔으니까, 접견을 시작할게.”
시간이다. 접견에 관해 기본적인 정보를 건넨다. 벌써 11번째다. 매번 반복되는 공지. 접견은 외근 임무 시에 팀워크를 증진시키기 위함이며... 그런 말들. 피상적인 내용들을 그녀들에게 전달한다.
당연한 공지들 속, 그동안은 딱히 불만사항이 없었다. 그야말로 공지니까. 그런데 데저트 플란넬이 눈쌀을 찌푸리며 내게 묻는다.
“그러니까, 버틴. 접견은 외근 임무에서의 팀워크 증진이 목표라는 거잖아.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외근 임무를 3번 정도 밖에 나간 적이 없어. 그것도 플래피만 보내도 할 수 있는 아주 가벼운 문제들로. 뭔가 아귀가 안 맞는데,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니야? 물론 널 의심하는 건 아니야. 난 그냥 재단 녀석들의 심리가 궁금할 뿐이지.”
어찌 보면 당연한 물음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마도학 공명을 통해 만들어낸, 이른바 ‘가상 생물’을 다룰 수 있는 유니크한 능력을 갖고 있다. 또한 그녀는 거친 삶을 살았듯이 특유의 체술 능력 또한 겸비하고 있다. 문제는... 실질적으로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외근 임무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그저 확신을 주기 애매한 가정 뿐이다.
“미래에는 데저트 플란넬, 네가 임무를 나갈 수 있는 환경이 많이 주어질 거야. 네 마도술은 아주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니까.”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어쩔 수 없다. 나 자신도 안다. 아무 근거 없는 말이라는 걸. 시대의 역행 속에서 방주에 탑승하는 마도학자들은 점점 늘어난다. 그리고 그 마도학자들 중에선 냉정하게 말해서 ‘유능한’ 능력을 가진 마도학자들도 많다. 드루비스 씨나, 곡랑과 같은 경우를 얘기하는 거다.
반대로 오래전부터 함께 한 멤버들임에도 어쩔 수 없이... 임무의 효율을 위해 차츰 대체되는 마도학자들도 존재한다. 멜라니아의 경우가 대표적이리라. 처음 런던에서 재단에 합류했을 때, 멜라니아는 굉장히 외근 임무가 많았다. 대학을 잠시 휴학했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은... 외근보단 시험에 더 집중을 할 수 있을 만큼 임무가 없다.
데저트 플란넬도 그렇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임무 몇 번을 제외하곤... 거의...
“그래도 나는 버틴의 생각에 동의해, 데저트 플란넬. 37과 곡랑이 서로 좋은 시너지를 내듯이, 언젠가 이곳에 올 마도학자들이 우리와 좋은 시너지를 낼 수도 있잖아. 미래를 계산할 순 있지만, 언제든 변수가 발생할 수 있듯이.”
멜라니아가 머리를 긁적이며, 데저트 플란넬에게 말한다. 그녀의 말을 들은 플래피가 턱으로 데저트 플란넬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녀도 불만이 풀렸는지 표정을 푼다.
“좋아. 뭐든 간에. 나는 돈만 더 주면 오케이야. 그런데, 멜라니아. 아니, 이렇게 격식 없이 말하는 게 맞나 싶긴 한데. 아무튼, 너와 내가 대화를 하는 게 접견의 주 목표인 셈이잖아. 너는 뭐하고 지내?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개인적인 일로 인해 바쁜 건 멜라니아나 데저트 플란넬이나 마찬가지일 거다. 한 쪽은 끊임 없는 일로. 한 쪽은 끊임 없는 시험으로. 멜라니아는 도수 없는 안경을 벗더니 무릎 위에 안경을 얹은 채로 말한다.
“인생은 시험의 반복이야. 일상 속에서도. 보안 메뉴얼 작성에 있어서도. 그리고 대학 시험에 있어서도. 봄학기가 시작했는데, 벌써 중간고사 대비 시험부터 치르고 있거든.”
얼마 전에는 철학과 점성술 관련 보고서 제출이 있지 않았나? 물어볼까 하던 찰나에 데저트 플란넬이 머리가 화끈거리는지 눈을 질끈 감으며 얘기한다.
“하, 학교 생활이라니. 나도 학교를 제대로 다녔으면 저렇게 다크써클이 늘어났을까?”
그녀의 말에 멜라니아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가린다. 멜라니아가 그녀에게 묻는다.
“데저트 플란넬, 학교 안 다녔어?”
그러자 데저트 플란넬이 창밖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인다. 울상은 플래피가 대신 지어준다. 그녀의 과거는 그녀의 인적사항 서류에 적혀 있다. 그 역시도 개인정보로 인한 대외비지만... 데저트 플란넬은 딱히 부끄럽진 않은지 이야기를 꺼낸다.
“그야, 가난했으니까. 학교를 안 다닌 건 아닌데, 학교 다닐 시간보다, 학교 다닐 돈을 마련해야 할 시간이 더 많이 필요했거든.”
그녀의 말에 괜스레 멜라니아가 숙연해지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데저트 플란넬은 그게 괜히 미안했는지 멜라니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한다.
“야야, 괜찮아. 내가 좀 불행하고 가난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은 걸. 나한텐 그 대신 플래피와 세상을 현실적으로 직시할 수 있는 눈이 생겼어. 난 나름대로 지금 삶에 만족하고 사는 중이라고. 월급도 나오고, 정기 여행 서비스도 받을 수 있고, 또...”
그러면서 데저트 플란넬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재단의 복지 서비스에 대해 말한다. 아까까지 재단에 안 좋은 감정을 쏟던 그녀가 맞나 싶다. 멜라니아도 그녀의 능청스런 모습에 무거운 마음이 조금 풀린 것 같다. 멜라니아가 입을 연다.
“순간 조금 당황했어. 하긴, 과거가 어쨌냐는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내일 시험에서 내가 A+를 받기 위해 뭘 해야 하냐인 거니까.”
멜라니아가 그렇게 말하면서 안경을 다시 쓴다. 곧이어 에이시 선생님의 입 속에 손을 넣는다.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이상하게 뜨거운 기운이 감도는 캔커피를 하나 꺼낸다.
“버틴, 데저트 플란넬. 너희도 먹어볼래? 이거 메디슨 포켓이 라플라스 연구소 홍보용 캔커피라면서 건네준 건데. 각성 효과가 꽤 좋더라고.”
... 김이 나는 건 에이시 선생님의 온기 때문일까. 아니면 메디슨 포켓이 이상한 짓을 했기 때문일까. 손을 저어 거절한다. 왜냐하면 캔커피의 출처가 그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별로 먹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디슨 포켓이 만든 거면 탕약나무 원액이라도 들어간 거 아니야?”
데저트 플란넬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본다. 하지만 결코 먹겠다고는 안 한다. 멜라니아가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손짓으로 캔커피의 입구를 딴다. 칙 소리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마셔도 괜찮은 온도가 맞을까.
그런데 멜라니아의 안경알에 김이 서린다.
“어라? 이거 왜 이래. 이건 계획에 없던...”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멜라니아가 안경알을 닦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 손이 캔커피를 들고 있던 손이라는 걸 망각한 것 같다. 안경알에 부딪힌 캔커피가 순간 데저트 플란넬 쪽으로 쏟아지려고 한다. 상황을 뒤늦게 파악한 에이시 선생님이 데저트 플란넬 쪽으로 날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뜨거운 커피가 그녀의 허벅지에 닿아 화상이라도 입힌다면...
그때였다. 플래피가 엄청난 속도로 부리를 들이밀더니 쏟아질 뻔한 캔커피를 낚아챘다. 커피는 쏟아지지 않았고, 모두가 멀쩡했다.
“미... 미안. 미안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멜라니아가 손을 모아 사과한다. 바로 옆에서 에이시 선생님이 냉정한 목소리로 훈수를 둔다.
“멜라니아. 커피가 충분히 뜨거웠어. 안경에 김이 서릴 수 있다는 건 예상 가능한 일이었지. 이번 일상 행동 점수에 마이너스 포인트를 부과할게.”
“괘... 괜찮아요, 말하는 가방 선생님... 그러니까, 아무도 안 다쳤잖아요?”
데저트 플란넬도 역시 당황했는지 애써 무마하려고 한다. 위험할 뻔한 상황을 해결해준 플래피는 멜라니아의 손에 조심히 캔커피를 들려준다.
“고... 고마워. 플래피 씨.”
“그냥 플래피라고 불러도 돼.”
멜라니아의 감사에 데저트 플란넬이 말 하나를 얹는다. 플래피는 기분이 좋은지 눈웃음을 짓는다.
순간 멜라니아의 눈이 번뜩인다. 무언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면 그녀는 캡 모자 챙을 손끝으로 잡는다. 그녀가 말을 꺼낸다.
“데저트 플란넬. 예비 대학생이면 어쨌든 대학에 가고 싶단 거잖아. 그러려면 돈이 필요할 테고. 혹시... 플래피랑 같이 일 하나 해보지 않을래? 플래피의 반사신경을 이용할 수 있는 좋은 일거리가 있을 것 같아서.”
늘상 사업을 제안하던 데저트 플란넬이 역으로 사업을 제안 받았다. 그녀가 의아하단 표정을 짓는다. 플래피의 머리 위엔 도트 모양 물음표가 떠오른다. 아무래도... 오늘 접견의 결론이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 같다.
[2/15 17:54]
“야, 버틴! 들었어? 이번 펫모임에 무려 플래피가 온다는 거야. 보니까 마릴린의 모델 촬영 현장에 데저트 플란넬도 있었는데, 거기서 서로 친해졌다나 뭐라나. 어쨌든 마릴린이 펫모임을 추천해서 뉴바벨 씨에게 말했더니, 그분도 좋다고 하셨어.”
집무실 책상 앞 의자. 여느 때와 같이 홍차 한 잔과 함께 잡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업무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제시카와 블로니가 함께 집무실에 찾아왔다. 블로니가 다리를 꼰 채로 의자에 앉았고, 제시카는 블로니의 머리 위에 자기 턱을 기대고 서 있다. 마치 데저트 플란넬과 플래피의 모습이 떠오른다.
“잘됐네.”
내가 말하자, 제시카가 귀를 쫑긋거리면서 말한다.
“제니퍼, 버틴은 언제나 말이 짧아. 딱딱하고. 재미 없어.”
...
“제시카, 우리 귀염둥이. 말이 짧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니야. 그냥 말이 딱딱하다고 하면 되는 거야. 말이 짧다는 건 말이지. 격식 없는 말투로 상관을 대할 때 쓰는 말이라고. 아마 소네트가 버틴에게 비격식체를 쓰면 그런 느낌이지 않을까?”
마시던 홍차에 그녀의 말이 섞여 들어오자, 사레 들릴 뻔했다. 소네트가... 예전에 그 일 이후로 한동안 시무룩했던 기억이 떠올라서다.
“하긴 제시카 말대로 버틴이 말이 좀... 그러니까 문장이 짧긴 하지. 아주 틀린 말은 아니네.”
데저트 플란넬의 소식은 추후에 들었다. 그러니까... 멜라니아의 아이디어라는 건 플래피의 능력을 살려서 보안업체 직원으로 일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거였다. 일종의 ‘경호원’으로 말이다. 데저트 플란넬의 전투 방식과 마도술을 생각해보면 그 일은 굉장히 찰떡궁합이었다. 데저트 플란넬은... 덕분에 몇몇 아르바이트를 관두고 대신, 라미레스의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요즘은 데저트 플란넬이 시간이 좀 남나 봐. 펫모임에 갈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빠보였거든. 어디 좋은 곳에 취직했다던데. 우리 영화 촬영 모델로도 써볼까? 예전에 모델 일도 잠깐 했다는데, 괜찮을 것 같거든.”
“맞아, 제니퍼. 나도 괜찮을 것 같아. 그리고 플래피도 함께 출연하면 영화가 더 재밌을 것 같아. 플래피가 괴수 역할을 하고, 데저트 플란넬이 위기에 빠진 여주인공 역할을 하는 거지.”
“완전 굿 아이디어야, 우리 자기. 기획서부터 써볼까?”
블로니와 제시카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주고 받는다. 그녀들의 눈빛이 아주 빛난다. 모로 가나 도로 가나 어쨌든 노력하면 풀리는 게 인생인 것일까. 멜라니아도, 데저트 플란넬도. 그들의 불우한 처지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데저트 플란넬, 그녀의 본명이 인적 사항에 적혀 있었다. 호러피디아의 본명이 조슈아이듯, 일부 마도학자들은 가명을 두른 채로 살아간다. 그녀 역시도 그렇다. 그럼 왜 그녀는 데저트 플란넬이란 이름으로 살아갔을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가 언젠가 말했다. 울루루 대회를 준비할 무렵, 그녀가 스파토데아와 에즈라, 나를 태우고 운전을 할 때였다. 호주의 무더운 사막에서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가끔 꽃 한 송이 정도는 발견할 수 있다고.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다.
-끝-
데저트 플란넬은 왜 콘이 없어
오늘도 맛있네요
제시카한테 굿아이디어라고 했으니까 제시카는 눈이 좋은 사슴인거구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밈 보고 웃겨서 썼는데 어케 알았대 ㄷㄷ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