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리는 손은 신문을 놓아버렸다.
상관없었다, 어쨌거나 길바닥에는 이미 삽화와 낱말이 수없이 나돌아다니고 있었고 정말로 중요한 뉴스는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
“이미 수십만이 죽었는데, 뭘 위해서?”
카카니아는 현기증을 느끼며 가까운 벤치에 쓰러지듯이 의지했다.
서클은 이미 빈 껍데기가 되었다.
테오필, 하인리히, 그리고 이제는 편지도 오지 않는 회원들의 얼굴은 이제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빈은 텅 비었고, 파리, 베를린, 런던, 모스크바도 마찬가지일 테지, 그녀의 진료소도, 빈의 유명한 예술의 정원도 모두 숨죽인채 잠들었다.
아직 첫날은 기억할 수 있었다.
늠름하게 차려입은 청년과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나와 황제를 연호했었지, 이제는 화려한 인파도, 환호도 없었다. 오직 정적뿐.
전쟁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끝난다면 누군가를 다시 만날지조차도. 운이 좋다면 팔 하나, 불구가 된 채 살아남을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녀의 목표도 이제는 수십배 멀리 도망쳐 버린 것처럼 보였다.
마자르인들과 체코 의회, 범슬라브 테러리스트에 대한 소문이 예술에 대한 관심을 밀어내면서 조금이라도 노쇠한 제국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격려보다는 헌병의 몽둥이를 만나기 더 쉬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선에서 체코인들이 탈영해 적진에 가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비슷한 소문이 조만간 더 많이 뒤따를지도 몰랐고 어떻게 되던간에 상황이 더 나아질리는 없었다.
“한여름밤의 꿈에 불과했던걸까?”
자유롭고 평등한 마도학자의 권리, 빛나는 예술의 새 시대라는 꿈은 그저 한낮 몽상에 불과했던 걸까?
평화적인 방법으로 꿈을 이룬다는 건 진작부터 천치의 백일몽에 불과했던 걸까?
다른 모든 이들은 뒤에서 총칼을 묻어두는데 그저 그녀만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었던 걸지도.
점점 적색으로 물들어 가는 저녁 하늘을 보면서 카카니아는 일어날 힘이 나지 않았다.
“테오필.. 하인리히..”
언제든 만나 온갖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이제 없다, 아마 이손초의 흙구덩이 어딘가에 몸을 누이고 있겠지.
살아서 참호를 파거나, 아니면 죽어서 흙에 묻히거나.
예술가들만 아니라 관객들의 발길도 끊겼다.
분리파 전시관에서 붐비던 인파는 진작 종적을 감췄다. 상실과, 그리고 빈곤과 함께 예술에 대한 관심도 시들해졌다.
심지어 항상 경이를 불러일으키던 빈의 오페라 극장도-
“선생님?”
카카니아가 놀라서 정신을 차리자 노을을 등지고 있는 코르셋 차림의 단정한 숙녀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아? 이졸데 양 오랜만이에요. 제가 정신을 놓고 있었나봐요 무슨 생각을 좀 하다가.”
“쉿”
허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카카니아를 멈추고 이졸데는 그녀의 의사 옆에 앉았다.
“무슨 일인지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선생님처럼 따듯한 마음씨를 가지신 분이라면 요즘같은 때에 힘들 수밖에 없으니까요.”
옆에서 들려오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카카니아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주 만나지 못해서 미안해요 이졸데 양. 한동안 클리닉이 계속 바빴어요, 여인들, 어머니들, 아버지나 형제, 아이들이 부모 손에 이끌려 오는 일도 있었고요.”
한동안 그녀의 환자였고 지금도 완치되었다고는 분명 말할수 없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는게 적절한가 하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입은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이야기를 떠벌렸다.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것처럼.
“처음에는 사명감으로 임했죠, 저 스스로도 전쟁이 가져온 불안을 몸으로 체감하고 있었으니까요. 망가진 도시를 조금이라도 치료할 수 있다면 제 마음도 편안해질 테고요.
그런데 할 수가 없었어요. 지금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걸 바라고 있어요. 자신의 친구, 가족, 연인이 안전하다는걸 확인받거나, 아니면 그들의 상실이 위로받을수 있기를 바라죠. 그것도 분명 제가 해왔던 일들에 속하긴 하지만...”
옆자리의 이졸데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인내심은 언제나 그녀의 미덕이었다. 카카니아는 서클이 아직 껍데기만 남지 않았던 시절, 먼 과거처럼 여겨지는 그 시절에 이졸데와 함께했던 모임들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때도 이졸데는 한결같은 모습을 지켜 왔다. 항상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온화한 표정을 지은 채 쉽게 나서는 일 없이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모습, 오페라에서의 공연이나 그녀의 병이 도졌을 때를 제외하면, 더해서 그녀의 클리닉에 있을 때를 제외하면 항상 같았다.
“어째선지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었어요. 그들에게 위로를 건네 줄 수도, 안심시킬수도 없었죠.
스스로도 믿지 않을 말을 도저히 할 수가 없더군요. 제가 알던 사람들 절반은 전선으로 사라지거나 사라진 사람들을 애도하고 있고, 나머지 절반은 굶주리지 않기 위해서, 아니면 세상에 실망해서 어딘가로 가버렸어요.
신문에서는 조국과 카이저를 위해 슬라브 야만인들과 발칸의 테러리스트들에 맞서 싸우자고 했었죠, 제게는 사람을 죽이는 사람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지만.
의사로서 해야 하는 말을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엇그제 클리닉을 닫아버렸어요.”
카카니아는 자신의 손에서 느껴지는 작은 온기에 고개를 숙였다. 창백하고 가련한 손이 그녀의 것 위에 얹어져 있었다.
“이졸데?”
당황한 카카니아에게 이졸데는 의사의 손을 끌어당겨 감싸는 것으로 답했다. 카카니아가 예상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녀의 진료실 밖에서 이졸데가 이렇게 한 적은 이제껏 없었다.
“세상이 황폐하기 때문에 선생님이 고통받으실 필요는 없어요. 어쩔수 없이 정해진 일로 상처받지 마세요.”
카카니아는 고개를 들어 이졸데를 바라봤다.
이졸데가 자주 저주라고 불렀던 그녀의 마도술이 죽은 자와 이야기하고 그들을 불러들이는 강령술이라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
“미안해요 이졸데, 내가 생각이 짧았네요. 제가 힘들다고 한들 당신에게 비할 바는 아닐텐데, 도와주기는커녕 여기서 하소연이나 하고 있다니.”
더 많은 것이 카카니아의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 찾아왔던 이들이 이졸데에게도 찾아가 강령술을 부탁했을지 물어보는 것은 아무것도 더 견딜만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녀의 마지막 남은 혈육인 테오필이 살아는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는것도 좋을 것이 없었다. 그녀의 치료에 대해서는... 카카니아는 원치 않는 대답을 듣게 될까 두려웠다.
“그런 말 마세요, 선생님은 절 도와주셨던걸요. 전 그걸 잊지 않을거에요.”
카카니아의 눈에 비친 이졸데의 얼굴은 평온했다. 두려움에 떨던 때를 제외하면 그녀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카카니아는 완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이졸데는 빈에서 사랑받는 오페라 배우였고 진료실에서 카가니아에게 일평생 가문의 저주에 집어삼켜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품고 살았다고 털어놓았다. 동시에 카카니아가 기억하는 온갖 모임에서 이졸데는 지극히 절제되고 교양있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단지 이것도 카카니아에 대한 무례를 피하기 위해 예의를 차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녀의 치료가 병치레를 더 견딜만 하게 만들기는 한걸까?
만약 전이었다면 이렇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의구심이 자신감보다 앞섰다.
“그나마 그건 이번달에 들어본 것 중에 가장 희망적인 소식이네요.”
막힌 숨을 토해내듯 나온 한마디가 카카니아가 답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그래도 이정도는 해도 되겠지 하는 목소리가 그녀 안에서 들려왔다. 적어도 이졸데가 쓰러지거나 실신하거나 앓아누웠다는 소식이 들리지는 않았으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오늘 선생님을 초대해 드려도 될까요?”
이졸데의 제안에는 불안이 깔려 있었다. 어쩌면 연민도.
카카니아는 떨구었던 고개를 들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졸데가 그냥 넘어가기에는 지나치게 티가 났던 모양이었다.
“바쁠텐데 그렇게 신경써주지 않아도-”
“공연도 여러개 취소돼버렸거든요, 예산 부족이랬었던가요. 그리고 어쨌건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지금 없으니까요.”
이졸데는 먼저 일어서 카카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카니아의 녹색 모자는 바닥으로 기울었다가 몇 번 몇 번 기울더니 결국 이졸데의 것과 시선을 맞추었다.
연거푸 거절하기에는, 카카니아의 가슴속 폐허가 너무 컸다.
“초대해 주신다면,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하죠. 영광입니다 이졸데 양.”
폭풍우가 없고 예정대로 1차대전이 터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으로 써봤음, 메인스 보면서 카카니아가 폭풍우때문에 이졸데 비난할수 있지 그대로 1차대전으로 갔으면 자기 혼자 무너져 내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럼 이졸데가 옆에서 어떻게 끌어안아 주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다가 쓰게됨
후편은 이제 써야되는데 뭐, 상편 올려놓고 유기하지야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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