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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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색의 옷매무새는 완벽에 가까웠다구김 없이얼룩 없이낡거나 해지지 않은 채로 관리된 옷은 처음 받아 들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완벽에는 미치지 못했다언제나 그랬다.

 

하아...”

 

거울속 여인이 한숨을 쉬었다.

그토록 거대한 극장에서 수없이 많이 공연을 치렀건만지금의 떨림은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때를 기억나게 했다.

어쩌면 단순히 그녀가 제 목소리와 몸짓으로 무대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 때문일지도 몰랐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거울속 여인의 눈가에 수심이 드리웠다병이 재능이고재능이 병이라는 얄궂은 조롱은 언제고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그녀가 마도술로 관중을 속일 뿐이라는 비평을 마주할 때마다 이졸데의 마음 한 켠에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 무대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대신해 주지 못했다공연의 주연 배우는 뛰어난어쩌면 지나치게 뛰어난 영매사인 이졸데도극 속 인물이 되어서’ 노래하는 빈의 꾀꼬리도제국의 오페라 애호가들이 가장 고대하는 배우인 디터스트로프양도 아니었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남에 손을 빌려 연기하는 배우언제 죽을지 모르는 저주받은 재능의 상속자

 

떠오르는것들은 더 많았지만 거울 속 이졸데는 등을 돌려 떠났다이런 나열에는 끝이 없었고 귀한 손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건 예의가 아니었다.

 

선생님오래 기다리시지는 않으셨나요?”

 

고개를 낮추고 거의 비어있는 만찬용 식탁을 내려다보고 있던 카카니아는 급히 안색을 바꾸었다.

 

전혀요그냥 예전 생각이 나서요모임을 열 때면 이졸데 양이 관대하게도 여기에서 서클 회원들을 맞이해 주고는 했으니까요.”

 

카카니아는 적막한 자리에 서클의 다른 회원들이 지금 앉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방을 둘러 시선을 돌렸다.

하얀 새처럼 순백색으로 차려입은 이졸데는 단 두명을 위해 차려진 식탁에서 카카니아의 맞은편에 앉았다카카니아는 문득 이 자리에서 이졸데와 마주앉는 것은 처음이라는 것을 깨닫았다보통은 이졸데가 오빠인 테오필에게 주최자의 자리를 양보하거나 서클의 창립자로서 카카니아가 자리를 맡고는 했다.

 

메이드들이 별로 없던데 혹시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직접 하고있는건 아니죠오페라 연습에 겸해서 다른 일까지 하다간 피로로 쓰러질거에요.”

 

카카니아의 걱정어린 말에서 이졸데는 빠진 부분이 무엇인지 짚어낼 수 있었다마도학자치고도 약한 몸이나 잦은 병치레항상 통제가 되지는 않는 재능주변에서의 비보들공원에서의 말실수 때문에 조심스러우신 걸까이졸데가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의사 선생님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지는 않아요방금도 그냥 거울로 자세와 옷차림을 확인하고 온 거였어요신경쓰지 않으면 흐트러지기 마련이니까요.

메이드들이 줄어든건 맞아요전쟁으로 집안일이 급해서 그만둔 이들도 있고이곳에 필요한 일손도 이제는 그렇게 많지 않은걸요.”

 

그러게요이렇게 훌륭한 저택인데도... 이제는 너무 적막하네요.”

 

카카니아는 홀린 듯이 흘러나온 말을 주워담으려는 듯이 입을 틀어막았다.

 

미안해요굳이 끄집어낼 생각은 없었는데.”

 

책임지고 있는 환자 앞에서 자꾸만 하면 안될 말들만 하고 있는거 아닌가 하는 카카니아의 눈에 비친 이졸데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는 마치... 웃음을 참는 것처럼 보였다.

카카니아는 그저 어쩔줄 몰랐다.

이졸데가 웃는 모습카카니아에게도그리고 그녀가 짐작컨대 다른 이들에게도 보기 힘든 일이었다더 혼란스러운 것은 무엇이 이졸데를 웃게 만들었느냐는 점이었다.

 

웃고..있는거 맞죠?”

 

이졸데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입가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약간 머무르고 있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카카니아의 표정을 읽은건지 이졸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카카니아를 이끌었다.

 

저택이 점점 넓게 느껴지는건 맞아요고용인들도 줄어들고 있고요하지만 제 주변에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들이 따라다니다보니 그렇게 의식하게 되지는 않아요.

무엇보다 오늘은 선생님이 계시니까요오늘만큼은 즐거운 만남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네요말이 너무 길어졌네요어서 드세요 선생님어머니께서 고르신 요리사의 실력은 뛰어나지만 식어도 즐길만 하다는 의미는 아니니까요.”

 

... 그럴게요.”

 

그건 정신병 증상을 말하는 거였을까카카니아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보다 그럴듯한 설명은 이졸데의 강령술 마도학이 그녀가 알던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다는 것이었다그리고 그 가능성은... 카카니아가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어떤 이론에도어떤 논문에도심지어 암흑기 마녀들의 양피지를 뒤져본다 하더라도 일상적으로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죽은 영혼과 교류하는 환자에 대한 기록은 한손으로 꼽을 수 있을게 분명했다.

이졸데의 죽은 어머니가 골랐다는 요리사는 생전에 고용한 걸까아니면... 카카니아의 포크가 두껍게 썬 치즈와 삶은 오리를 꿰뚫은 채 거의 멈췄다가 다시 접시로 향했다.

그건 과대해석이겠지어차피 어떤 경우던 카카니아가 오랜 친구이자 환자를 위해 당장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데 이르자 카카니아의 마음은 조금 편안해졌다.

 

그렇게 말해주니 저도 기쁘네요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고 곁에 있어줄 수 있을텐데요.”

 

“...”

 

이졸데에게는 귀족의 기품이 넘쳤다그건 자세말투목소리걷는 방식인사말보통은 무의식적으로 드러나거나 몸에 배어 있는그래서 미세하게는 다들 틀릴 수밖에 없는 부분에서 완벽하다는걸 의미했다.

카카니아는 그런 미궁같은 규칙의 원주민은 아니었지만 직업상 자주 마주치게 되었고 이졸데가 그 분야에서 프로라는것도 알고 있었다.

다르게 말해서 이졸데가 들고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떨어뜨린다는 식의 상화에 맞지 않는 실수를 하는걸 보는 것은 그녀의 병이 도졌을 때를 제외하면 카카니아가 처음 겪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혹시 발작이...”

 

아니에요 선생님 그런건 아니에요.”

 

카카니아도 그게 실제 발작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몸을 떨지도숨이 가쁘거나 비틀리지도 않았다이졸데는 고개를 돌린 채손으로 입을 가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실례할께요금방 돌아올테니 걱정 마세요 선생님.”

 

카카니아는 이졸데가 떠난 자리에 홀로 남았다.

식탁을 차려놓고 자리를 뜬 하인들그리고 집주인인 이졸데까지 떠나자 적막하기 그지 없는 고요한 저택이 한결 을씨년스럽게 느껴져 왔다.

한때는 디터스트로프 부부이졸데와 테오필그리고 상당한 수의 고용인들까지 꽤나 붐볐을 테지만 지금에 와서는 이졸데와 전쟁 와중에도 떠나지 않은 몇 안되는 고용인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굳이 프로이트를 들먹이지 않아도 만족스러운 거주 환경과는 상당히 떨어진 환경일게 불보듯 뻔했다그게 이졸데의 과실이느냐고 한다면 답은 분명 부정적이었다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느냐고 한다면별로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카카니아는 아직은 김이 올라오는 홍차를 천천히 음미하고 나서 의자에 기대 누웠다.

단순한 초청에서 직업적으로 사고하는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았다이졸데가 부담을 가질 수도 있고 나중에 비슷한 만남을 꺼릴 수도 있었다다른 무엇보다도 일과 여가를 분리하지 못하게 되면 한두가지 문제가 생기는게 아니라는 점이 원인이었다특히나이졸데와 카카니아의 관계처럼 친밀한 관계이면서도 느슨하게나마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에는.

 

어쩌면 내가 이졸데에게 집착하고 있는걸까?’

 

하지만 왜클리닉을 닫아버린 정황상 그 대답은 꽤나 분명했다.

다른 모든 경우에 손을 놓아 버리면서 단 한가지는 차마 포기하지 못하는 모순이란심리학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조차도 어쩔수 없는걸까카카니아는 입가에 쓴 웃음이 지어지는걸 느꼈다.

카카니아클라라서클의 창립자거울 상인의 딸은 면허는 없을지라도 의사였다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이고더는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면 의사는 의사로 남을 수 없었다.

 

 

이졸데의 눈가에 한방울 빗방울이 떨어졌다시야에는 먹구름이 몰려드는 흐린 하늘만이 보였다발코니에는 몸을 떨지 않을 정도의 찬 바람이 불어왔다.

난간에 기대어 고개를 젖힌 그녀는 뺨이 다시 차가워지는 것을가슴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빨리 돌아가는게 낫겠지.”

 

고개를 떨구자 발코니에 위험스럽게 걸터앉아있는 꼬마가 눈에 들어왔다이상할정도로 이졸데의 어릴적 모습과 닮았고신랄한 웃음기를 띄고 있었다.

환영죽은 자의 영혼오페라의 주역들을 포함해 뛰어난 영매인 이졸데의 곁을 맴도는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몇몇 영혼은 이졸데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었다.

 

우리 동생을 따라다니는 광팬들은 정말이지 한둘이 아니구나.”

 

트리스타의 천진한 목소리에는 비꼬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이졸데는 트리스타가 의도를 숨길 생각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뭔가 숨기기에는 너무 오랬동안 같이 지낸 탓에 그녀의 요절한 언니는 항상 노골적이었다.

 

뭔가 불평하고싶은거라면 직접 붙잡고 물어보지그래그 자살한 스토커도 분명 근처에 있을텐데.”

 

정말이지우리 동생은 너무 쌀쌀맞단말이야.”

 

트리스타의 투명한 형체가 이졸데의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졸데는 별다른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오늘은 언니가 짖궂은 장난에 관심이 없다는걸 깨닫고 이졸데는 긴장을 풀었다.

트리스타는그녀를 볼 수 있는 이졸데의 눈에는 영영 자라는 법이 없었다어쩌면 처음 묻히고 나서 세 살배기 유령이 말이나마 유창하게 하게 된 것이 성장이었을지는 모르지만 동기나성격이나관심사는 어린아이의 그것을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그만큼이나 잔인했다. 죽은 이들의 고질병인걸까?

 

난 그냥 격려나 해 주러 온거라고.”

 

트리스타는 착한 아이처럼 생긋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지만 이졸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난 정말로 우리 동생이 그 무면허 의사랑 잘 되는걸 바란다니까너도 그 말에 들떠서 혼자 나온거잖아.

생각해봐테오필이 살아서 돌아올 것 같지는 않고우리 가문 여자들은 사십을 넘긴 예가 없다시피 하지그런데 너까지 죽어버리면 들러붙을 혈육이 없잖아.

이제껏 우리 똑부러진 동생한테 붙어서 지내 왔는데 연고 없는 유령이 되서 의식도 거의 없는 채로 떠돌아다니는건 재미 없거든.”

 

그정도면 됬다이졸데가 손짓으로 익숙한 동작을 그리자 장난감을 보듯 이졸데를 바라보던 트리스타의 모습은 지워졌다조만간 돌아오겠지만 당장은 조용했다.

트리스타가 남긴 말 한마디만이 이졸데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시면 안되는걸요 선생님기대하게 되어버린다고요.”

 

 

아 이졸데찾으러 가야하나 고민하고 있었어요.”

 

식탁에서 뭔가 건드리다 인기척을 느낀 카카니아는 한눈에 보기에도 반가운 얼굴로 집주인을 맞았다.

 

선생님이건 다...”

 

잘 만든 만찬이 식어버리는건 좀 아까워서요먹구름 때문에 방도 어두워져서 분위기를 낼 겸 꾸며봤어요.”

 

식탁에는 적지않은 수의 촛불이 수놓아져 있었다그리고 접시들도 촛불 위에 받힘대에 얹어져 마치 이제 요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배가 고플 것 같았어요아까부터 거의 먹지를 않아서.”

 

신경써주셔서 감사해요꾸며주신것도 보기 좋고요다만 그렇게 많이 굶주리지는 않아요평소에도 오페라 연습으로 끼니를 거를 때도 많고요.”

 

이졸데는 원래라면 차게 식었을 자기몫의 스프를 한숟갈 음미하고 다소곳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맙소사 이졸데내가 정신과 전공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먹는게 충분치 않다는 것 정도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굶는건 말할 필요도 없고요입맛이 없는 거라면 제가 요리사에게 레시피라도 여럿 찾아보라 할 테니...”

 

아니에요 선생님신경써주시는건 정말 감사해요전 그냥 많이 먹으면 움직이는게 거북해서 그런 것 뿐이에요,”

 

이졸데집에서도 항상 그렇게 입고 있어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환자의 모습에 카카니아는 이마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졸데무대에서 항상 완벽을 기하려고 노력하는건 알지만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거에요?”

 

이렇게 하면 좀 더 연습이 될 것 같았거든요혹시 치료에 방해가 되는건가요?”

 

이졸데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사려깊었다그건 그나마 카카니아가 안심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프로이트는 치료의 첫 단계는 억압을 풀어내는 것이라고 했죠단순히 정신적인 억압만 아니라 우리가 매 순간 느끼고 행동하는 것도 영향을 미칠수밖에요그리고 누구나 공적으로 격식을 차린다고 해도 사적으로는 쉴 필요가 있잖아요의사로서 권고하건데 생활 습관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고개를 주억이는 이졸데의 모습에 카카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졸데빈에서 가장 열광하는 오페라 스타에게 이래라 저래라 아는척 할 생각은 없어요하지만 어떤 환자든 집에서도 무대에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한다면 전 당장 고치라고 말할 수밖에요앞으로는 자신을 좀 더 신경써야 해요.”

 

네 선생님.”

 

글자수로 좀 짜름 전체는 아카챈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