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전에.
소설 전공자고 그게 꿈이었어.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내 글들이 소수에게라도 조금이나마 다가왔으면 해. 때문에 그간 마도학자 접견 일지를 작성했고, 지금은 잠시 취준 문제로 휴식 기간에 들었어.
그럼에도 이 게임은 꾸준히 했어. 처음으로 애정을 가진 게임이었고, 처음으로 하는 서브컬처 게임이기도 했어. 사실 무엇보다도 게임 속, 마도학자들의 이야기가 좋았어. 게임성과는 별개로 비중이 적은 캐릭터들조차 꾸준히 챙겨주는 개발사의 태도도 좋았고.
최근 제노의 일화랑 공식 작가의 만화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어. 내가 쓰던 글과 완전히 같진 않았지만, 리버스 1999의 이야기는 내가 바라던 글과 분위기가 비슷해. 그래서 더 편하게 2차 창작 글을 쓸 수 있는 것 같아. 나도 재미있고. 혹시나 해서 미리 써두지만 접견 일지 시리즈의 내용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수 있어.
아래 글은 타임키퍼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며 썼어. 다른 마도학자들은 버틴을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시점으로. 이 이야기가 게임 스토리를 진행할 때 조금 더 몰입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면 좋겠다.
한국의 타임키퍼들에게 좋은 이야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야. 모든 타임키퍼들을 만족시킬 순 없겠지만 소수의 타임키퍼들이라도 재밌게 읽어주길 바라.
(바니바니는 여행 가방 내에서 상호작용 시 반말을, 울루루 대회에선 존대를 썼음. 그래서 일단 후술할 작품 내부에서 상황에 따라 세분화함.)
(이야기가 길어져서 두 편에 나눠서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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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브로카의 일화>
[새벽, 여행 가방 안 로비]
황무지에 새벽이 찾아온다. 머무르는 이들은 각자의 방 안에서 잠에 들 시간이다. 이 시간에 깨어있는 것은 포자 실험을 하는 인간 친구 에즈라, 별 아래에서 모래사장을 산책하는 6과 갈라보나, 과제에 치여 메디슨 포켓에게 제공받은 캔커피를 마시는 멜라니아 정도일 것이다.
어스름, 미세먼지들이 가라앉고, 로비 안에 홀로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 비행사들이나 입을 법한 가죽 자켓에 고양이 귀가 달린 비행모를 쓴 여자.
두터운 가죽 부츠, 다리를 꼰 채로 탁상 위에 올려놓은 여자. 그녀는 러시아어로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녀가 제노 군사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 어머니께서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였다.
“Речка движется и не движется, Вся из лунного серебра. Песня слышится и не слыщится В эти тихие вечера.”
키릴 문자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여행 가방 내에 흔치 않았다. 같은 나라 출신의 빌라, 예니세이. 키릴 문자권 나라에서 태어난 윈드송. 그게 아니라면 과묵한 소녀 보이저 정도일 것이다. 때문에 그녀가 부르는 노래를 아는 이도 많지 않다. 고요히 흥얼거리는 노래는 듣는 이 없이 묻혔으나, 릴리아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캬, 이 맛이야. 역시 즈브로카 만한 게 없어.”
폴란드 산 보드카의 화사한 목넘김은 소련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알맞았다. 따갑고 매콤하고 차갑다. 씁쓸하고, 떫기도 하다. 그녀가 즈브로카를 입에 댄 건 폴란드 제3 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의 일이지만, 상관 없었다. 그녀는 빌라처럼 사상과 신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릴리아에게 그런 것들은 여유가 넘치는 자들의 일들과도 같았다. 늘 자신의 관을 목전에 둔 그녀에겐 과분한 일이었다.
닉시관 시계가 천천히 분침을 바꾼다. 하나, 둘. 주홍색 불빛이 새벽 3시를 나타낼 무렵. 어디선가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났다. 릴리아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소리의 근원지에서 나는 발걸음이 자신에게 가까워지기 전까진.
“릴리아 씨?”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릴리아는 고개를 돌린다. 그곳엔 어울리지 않는 차림의 바니바니가 서 있었다.
“마리안나? 잠옷 차림이네? 처음 보는 걸?”
릴리아가 즈브로카를 홀짝이며 말한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새빨개진 상태다. 릴리아는 새벽에 자주 혼자 술자리를 가진다. 간혹 몽롱한 상태로 나오는 레굴루스나 밤산책을 가는 드루비스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녀가 늦은 새벽에 바니바니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잠옷 차림으론 잘 안 나가거든요. 혹시 옆에 앉아도 될까요?”
바니바니의 물음에, 릴리아는 탁상 위에 올려둔 다리를 치운다. 하품을 한 차례 하며, 그녀에게 답한다.
“얼마든지.”
바니바니가 릴리아의 맞은편에 앉는다. 둘은 평소 친한 관계가 아니다. 일면식이 있는 사이인 건 맞다. 하지만 같이 일을 해본 경험은 많지 않다.
“그런데, 릴리아 씨. 제 이름을 알고 계셨네요?”
바니바니가 고개를 푹 떨구고 묻는다. 오늘 그녀의 표정은 영 심상치 않다. 다크써클이 짙고, 활기찬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우리 여행 가방 대장님의 친구잖아. 모를 리가. 그런데 너, 원래 항상 반말하지 않았어?”
릴리아 역시 궁금한 점을 묻는다. 바니바니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답한다.
“일을 할 때는 그래요. 활기차고, 자신감이 넘치죠. 반말도 그 일환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사적인 시간이죠.”
차분해 보이는 바니바니의 모습이 릴리아에겐 낯설었다. 분위기 전환이라도 해볼까. 릴리아는 힙 플라스크의 뚜껑에 즈브로카를 조금 따라준다.
“한 잔 할래? 우울할 때 마시면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되거든. 물론 Su-01ве를 탈 수 있다면, 문자 그대로 하늘을 나는 기분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제노에 수리 차 보내둔 상태라 어쩔 수가 없네.”
바니바니는 릴리아가 건네준 뚜껑을 받는다. 손톱 만큼의 즈브로카가 금방이라도 넘칠 것처럼 찰랑인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는 보드카를 힘껏 들이킨다. 곧, 타오르는 것 같은 속에 가슴을 여러 번 두드리는 바니바니를 보며, 릴리아가 미소를 짓는다.
“아까보단 훨씬 낫네, 마리안나. 방금은 전쟁에서 연달아 진 패잔병의 모습 같았어.”
“이거, 엄청 써요. 릴리아 씨. 맥주만 마시다 보니까 보드카가 쓴 것도 몰랐네요.”
“맞아, 특히나 즈브로카는 훨씬 더 상쾌하고 씁쓸한 맛을 자랑하지. 마치 폭풍우가 휩쓸고 간 인생처럼.”
릴리아의 말이 끝나자, 바니바니가 뚜껑을 다시 건넨다. 릴리아는 돌려주려는 건가 싶었는지 뚜껑을 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바니바니는 오히려 뚜껑을 자기 몸 쪽으로 뺐다.
“한 잔만 더 주시겠어요?”
릴리아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동시에 오랜만에 술 친구가 생긴 것이 기뻤다. 그녀는 뚜껑. 아니, 잔에 술을 따라주며, 바니바니에게 말한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같이 일했을 때가 아마 1914년 봄이었지. 재단 일본 지부에서 요청해서 그때 아마...”
릴리아가 말을 못 잇자, 바니바니가 그녀의 말을 대신 잇는다.
“아키타 센보쿠 대지진이었죠. 그때 재난 지역에 구호차 방문했었고요. 저는 구조 선발대를, 릴리아 씨는 하늘에서 생존자 수색을 했었어요.”
“맞아, 사츠키가 엄청 슬퍼했었지. 녀석의 토끼 친구들이 도둑질 말고 다른 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어.”
“사츠키 씨는 진작에 손을 씻었는 걸요.”
“습관은 어디 가질 않더라고. 최근에도 내 빗자루 열쇠가 그 녀석 방에서 나왔는 걸.”
바니바니가 웃으며 잔을 들이킨다. 이미 씁쓸함에 적응한 걸까. 그녀는 더 이상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다. 릴리아는 탁상에 팔을 걸치고 턱을 받치며 말한다.
“이제야 좀 너 답네. 마도학자 치곤 힘 세고, 웃음이 많고, 단순해. 우리 태양 씨한테 네가 마도학자라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땐 전혀 안 믿었다니까.”
그 말에 바니바니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그러는 릴리아 씨도 평범한 마도학자에 비하면 힘이 센 편이잖아요. 전... 참 아이러니하게도... 고작 이게 제 마도학 능력인 걸요. 힘이 세다는 거.”
그녀의 말에 릴리아는 코웃음을 치며 답한다.
“나야 제노에서 운동을 안 하면 다른 녀석들에게 뒤쳐졌으니까. 평범한 마도학자들은 인간과의 신체적 능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어. 때문에 그 불꽃 꼬마 아가씨처럼 피 나는 노력을 해야 하는 거야. 반면 우리의 인간 친구 에즈라가 그 꼬마 아가씨한테 애정 어린 딱밤이라도 날린다? 바로 코피가 터질 걸. 그런데 널 봐. 고작이라는 말은 붙일 필요가 없어. 네 능력은 축복이야. 그 지진 피해 속에서도 넌 많은 사람들을 구했잖아.”
따스한 말과는 사뭇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바니바니에게 비춰진 릴리아의 모습은 그랬다. 그녀에게 릴리아란, 전쟁을 겪고, 어딘가 뒤틀리고, 차가워져버린. 그녀가 팔던 에일 맥주처럼 쌉싸름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살던 시카고의 마피아보다도 더욱 차가워 보이는 사람. 의외였다. 그래서 바니바니의 눈시울이 불거지고, 눈물이 흘렀던 걸까.
그런 사람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을 거라곤 상상도 못해서.
“아녜요, 릴리아 씨. 오히려 릴리아 씨가 없었다면 저도 사람들을 많이 구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릴리아는 다시 한 번 바니바니의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사츠키가 들으면 섭섭해 하겠어.”
문득 릴리아는 궁금해졌다. 자기 앞에 서 있는 이 둔하고, 곰 같이 푸근하던 여자가. 어째서 오늘은 멍하니 달빛을 바라보던 드루비스나 지을 법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무슨 일 있었어? 마리안나. 지금이라면 얘기해도 돼. 너도 나도 술 한 잔 했잖아.”
바니바니는 이것을 말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했다. 말하기엔 어딘가 부끄럽고, 말하지 않기엔 해소하고 싶었다. 그녀는 그 답을 즈브로카를 마시며 찾았다.
“사실... 오늘 오전의 일이었어요.”
[아침, 여행 가방 안 조리실]
조리실 안의 공기는 언제나 뜨겁다. 황무지에 눈이 내리건 태양빛이 내리쬐건 같다. 여행 가방에 머무르는 이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선, 지옥 같은 불길을 뿜어내는 화구가 전부 켜져야 한다. 오늘은 갈기모래가 추천해준 치킨 마크니 커리가 계속 끓어야 한다. 사츠키처럼 향신료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서 미소국 역시 끓여야 한다. 모든 이의 입맛을 맞출 순 없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만족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 요리사의 숙명이다.
데저트 플란넬과 바니바니는 여행 가방 안에서 줄곧 요리를 책임져 왔다. 이따금 다른 마도학자들이 그들을 도우러 왔지만, 이렇게 대용량 요리에 익숙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릴리아 같은 녀석들에게 맡기면, 내 아침 식단이 군대 짬밥이 되어버릴 거고, 곡랑이나 소더비 같은 녀석들에게 맡기면, 모두가 녹촉이나 유니콘으로 변해버릴 지도 모르지.’
바니바니 이후에 여행 가방에 들어온 데저트 플란넬. 그녀가 요리 일을 거들기 시작하며 한 말이었다. 비교적 뒤늦게 타임키퍼 소대에 합류한 그녀가 바니바니를 거들 수 있었던 건, 그녀의 뛰어난 요리 실력 덕분이었다. 둘 모두 섬세하진 않을 지언정, 마도학자들을 만족시킬 음식을 만들 능력은 충분했다.
“데저트 플란넬! 마크니 커리 불 좀 줄여줘! 이러다 다 타겠어!”
그럼에도 매일 아침은 전쟁이었다. 두 명이서 수십 명의 요리를 만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니바니, 나 지금 오븐 만지느라 손이 없어. 젠장, **. 이럴 때는 보이저처럼 팔이 여러 개였으면 좋겠다니까.”
보이저의 팔이 여러개였냔 의문을 풀 새도 없이, 바니바니는 ‘유령 버섯 비프 스테이크’를 열심히 웍질하고 있었다. 데저트 플란넬은 ‘스타 라이트 칠면조 구이’를 오븐에 넣고 열을 조절하고 있었다. 갈라보나의 추천인 디저트, ‘망고 라씨’까지 만들기 위해선 시간이 촉박했다.
“플래피! 플래피! 어서 나와 봐!”
데저트 플란넬의 친구, 플래피가 부름에 비프음을 내며 튀어나왔다. 머리 위에 도트 물음표가 떠오르는 플래피. 데저트 플란넬은 거의 울먹이다 싶이 플래피에게 부탁했다.
“플래피, 마크니 커리 좀 저어줘. 국자는 저쪽에 있으니까. 바빠서 어쩔 수가 없어. 미안해. 좀 있다가 사료 많이 줄게.”
그 모습을 본 바니바니는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바니걸 옷을 입고 일을 하듯,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을 매우 자랑스러워 하는 사람이다. 타인의 손을 쉽게 빌리는 법이 없다. 제아무리 힘들더라도, 그녀에게 일이라는 건, 자신의 힘으로 해내야 하는 하나의 과업이었다.
바니바니의 표정이 비프 스테이크의 주름처럼 구겨졌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웃음을 짓는 그녀에겐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데저트 플란넬과 플래피를 번갈아 봤다. 플래피는 도트 땀을 뻘뻘 흘리며 마크니 커리를 열심히 젓고 있었다. 데저트 플란넬은 오븐 일을 마치고 미소국의 간을 맞추고 있었다.
집중이 흐트러졌기 때문일까. 바니바니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를 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웍에서 뜀박질을 하던 고기들이 있어야 할 곳을 완전히 벗어났다. 평소보다 높이 날아오른 고기들은 불길을 넘어서 화구 곳곳으로 흩어졌다. 주방에선 곧이어 까만 연기가 피어올랐다.
“바니바니! 뭐하는 짓이야!”
길거리에서 살아온 데저트 플란넬. 특징적인 마도학 능력 외에 다른 마도술 사용을 할 수 없는 바니바니. 두 사람 모두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마도학을 알 수 없었다. 불이 고기를 뒤덮고 점점 타올랐다. 울루가 임무에 나섰을 때처럼 거센 화염이.
일에 있어선 프로라고 자부하던 바니바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플래피는 깜짝 놀라 도트 느낌표를 띄우며, 사방을 뛰어다녔다. 데저트 플란넬은 조리실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들고 안전핀을 뽑았다.
때 아닌 소란이 바깥에도 들린 것일까. 일을 해결한 것은 바니바니도, 데저트 플란넬도, 그녀의 다마고치 친구도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좀 비켜주세요.”
툰드라보다도 차가운 표정을 지은 예니세이가 조리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쌀쌀맞게 바니바니를 밀치고, 능숙하게 마도술 주문을 외웠다.
“Пусть le naufragé течёт вместе с водой.”
그녀의 작은 유리병 속 물줄기가 이윽고 해일처럼 거대해졌다. 그 물이 혹여 주방 설비를 망가뜨리면 어떡할까. 순간적인 걱정이 든 바니바니였다. 하지만 예니세이의 물은 술자의 모습과는 다르게 부드러웠다.
공중에 떠다니던 물이 방울 하나하나로 퍼지더니 조리실의 불꽃을 감쌌다. 까만 연기는 사라지고 하얀 증기가 피어오른다. 플래피가 부리를 이용해 조리실의 창문을 연다.
한 차례 자욱한 안개 같은 증기. 그리고 연기가 창문으로 빠져나간다. 조리실 화구와 천장엔 검은 그을음과 새까맣게 탄 고기가 남았다.
“예... 예니세이, 고마워.”
바니바니가 멍한 표정으로 감사 인사를 전한다. 그러자 예니세이는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냉정하게 답한다.
“아뇨. 고마워할 거 없어요. 여행 가방이 불에 타버리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그보다, 다음부턴 소화기를 조금 더 가까운 곳에 배치하는 게 좋겠네요.”
잠깐의 정적이 흐른다. 예니세이는 깊은 한숨과 함께 울 망토와 울 모자를 벗는다. 빨간 장발. 조리실의 갈색 머리 두 사람 사이에서 예니세이는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바니바니는 방금의 일을 떠올렸다. 이런 일을 겪어본 적 없는 게 아니다. 요리와 불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불이 있어야 요리를 할 수 있고, 불은 가끔 의도치 않은 것을 태우기도 한다. 그녀가 머물렀던 시카고의 가게 역시 불에 탄 적이 있다. 그때의 그녀는 달랐다.
‘바니바니, 괜찮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마닐라를 구할 수 있었던 거냐고.’
검은 잿더미를 뒤집어 쓴 같은 가게 종업원. 바니바니는 코에 묻은 재를 닦으며 그에게 답했다.
‘용기를 늘 마음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그러잖아요.’
그랬던 그녀가 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걸까. 데저트 플란넬의 행동에 화가 나서? 자신의 실수로 화재가 났다는 상황 때문에? 이제 와서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이 늘 착용하고 다니는, 어떻게 보면 신체의 일부분과도 같았던 바니걸 훈장이 그날따라 무겁게만 느껴졌다.
“무슨 일이야, 다들 괜찮아?”
이윽고 그녀들의 열렬한 지지자, 타임키퍼 버틴이 조리실에 들어왔다. 보라색 톱햇과 차려 입은 연미복. 늘상 같은 차림의 그녀지만 오늘은 다른 모습도 있었다. 버틴은 감기에 걸렸는지 코 끝이 빨갛게 물들었고, 누가 봐도 출처를 알 것 같은 파란색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버틴 씨? 오셨네요. 별 거 아니에요. 그냥 약간의 소란이 있었던 것 뿐이에요. 보고서가 필요하시다면 수기로 작성해드릴까요?”
버틴은 조리실의 매캐한 냄새에 잠시 놀랐다. 하지만 금방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결됐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여행 가방 안에서의 일이라면 ‘접견’이 아닌 이상 굳이 보고서를 작성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예니세이, 고맙지만 사양할게. 일을 해결해줘서 고마워.”
“아녜요. 다만 라 수르스 씨에게 받은 물을 다 써버려서, 오늘은 소원의 샘에 가야할 것 같네요. 근무표는 따로 작성해둘게요, 버틴 씨.”
예니세이가 근무표를 작성한다는 말에, 버틴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예니세이의 글씨는. 특히나 영어는 이니그마의 해독이 필요할 정도다. 난해한 글씨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예니세이의 담당자인 버틴 역시 마찬가지다. 습관처럼 버틴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예니세이의 딱딱한 말투를 뒤로, 그녀가 조리실에서 떠났다. 버틴은 코를 훌쩍이며 플래피, 데저트 플란넬, 바니바니. 세 사람을 번갈아 봤다.
“다들, 다친 데는 없는 거지?”
피부가 거뭇해진 두 사람과 검은 먼지를 뒤집어 쓴 플래피. 버틴은 적어도 셋이 다친 곳이 없다는 점을 다행으로 여겼다.
“아침 식사는... 어...”
버틴은 조리실 내부를 돌아보다, 마크니 커리와 미소국이 새까맣게 물든 것을 보았다. 아무래도 오늘 아침은 다들 각자의 방법으로 마련하는 것이 좋아보였다.
“공지가 필요하겠네. 여긴 내가 마저 정리할게. 두 사람 모두 고생했어. 너무 상심하지 말고, 오늘은 푹 쉬어.”
버틴은 곧장 소형 단말기를 꺼냈다. 라플라스에서 개조받은 타임키퍼 전용 단말기다. 버틴은 조리실 구석 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단말기를 올렸다. 아기자기하게 튀어나온 키보드를 두드리며, 모두에게 오늘 아침 식사는 제공하기 어렵다는 메시지를 작성했다.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 됐어야 했다.
“바니바니,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모든 일이 끝나서였을까. 다 꺼져버린 것 같았던 잿더미에서 불씨가 타올랐다. 데저트 플란넬의 마음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호주의 붉은 사막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네가 한 실수 때문에 우리 모가지가 날아가는 건 물론, 플래피까지 다칠 뻔했어. 다른 친구들의 아침 식사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게 됐다고.”
뜨겁고 매캐했던 조리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예니세이가 무슨 주문이라도 부리고 간 것처럼.
데저트 플란넬이 현실적인 면모를 지향할 지언정, 성격이 온화했던 건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열정이 넘치다 못해 불 같은 사람이다.
“젠장, 좀 있다 알바 가야 하는데, 옷이랑 얼굴이 개판이 됐잖아.”
아침 식사 준비 이후, 일정이 있던 건 바니바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재단에 볼 일이 있었다. 그녀는 요즘 재단 방어선 학교에서 무료 급식 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도 일에 지장이 생긴 것은 마찬가지였다.
멍하니 있던 바니바니 역시 어딘지 모를 분노가 끓어올랐다. 어쩌면 시한폭탄과도 같다던 마도학자들의 특성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방금 전까지 불타던 조리실 화구를 내리쳤다. 홧김에 한 행동이었지만, 그 덕분에 단단한 화구가 유리 조각처럼 부서졌다. 그녀의 힘은 상식 이상으로 강했다.
“와우, 방화를 실패해서 이젠 조리실을 부숴먹으려고? 계획된 범죄였구만 아주.”
데저트 플란넬이 바니바니를 노골적으로 비꼬았다. 그제야 버틴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단말기를 포켓에 넣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바니바니가 어느 호주인의 멱살을 붙잡고 말았다.
“뭐, 한 판 해보게?”
데저트 플란넬이 입은 싸구려 셔츠 단추가 툭툭 끊어졌다. 플래피가 바니바니를 향해 매서운 표정을 짓는다. 바니바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와 함께 요리하겠다고 한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어. 네가 열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야. 데저트 플란넬, 네가 그렇게 살아왔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마도술로...”
마도술로. 왜 그 말이 나왔을까. 바니바니 역시 상시적으로 마도술을 몸에 두른 인간에 가까웠다. 그것이 쉽게 제어할 수 있는 힘은 아니지만, 그녀의 초인적인 힘은 늘 마도술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시카고에서 여행 가방 안으로 오기 전까진. 어느 순간부터 뛰어난 마도학자들을 많이 만나왔다. 어쩌면...
그녀는 알게 모르게 자신을 비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에 마도술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 그것도 마도학자 집단에서 말이다.
“플래피가 그렇게 부러웠어? 이 애는 마도술이 아니라 빌어먹을 내 유일한 친구라고. 친구. 정작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것 같은 마도술 말인데. 네가 뜯어버리고 있는 내 셔츠도... 네 잘난 마도술이 원인이란 거, 몰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니바니는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재가 묻은 바니걸 훈장을 내려다 봤다. 검은 재가 묻어 있었다. 지금 자기 자신의 모습처럼, 너무나도 볼 품 없었다.
“그만해. 둘 다. 너희 모두 잘못한 건 없어. 사고에서 원인을 찾을 필요는 없잖아. 너흰 최선을 다했어.”
코를 훌쩍이며 말하는 버틴의 말에 차가웠던 분위기는 녹아버렸다. 그렇다고 따뜻해진 건 아니었다. 그저 얼음처럼 멈춰있기 보단, 물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데저트 플란넬은 손을 털고는 플래피의 깃털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바니바니는 손을 덜덜 떨다가 보관함으로 쓰던 드럼통 위에 앉았다.
곧이어 데저트 플란넬은 머리를 긁적이다 플래피를 다마고치 안에 회수했다. 초록색 빛이 반짝이며 플래피가 사라지고, 그녀는 조리실 밖으로 나섰다. 이제 조리실 안에는 두 사람 뿐이었다.
“버틴... 아니, 버틴 씨.”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바니바니. 그 앞에 버틴이 서 있다. 그녀는 무릎을 굽히고, 바니바니의 눈물을 차분히 닦아주었다.
“괜찮아, 바니바니.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화를 낼 수 있어. 그게 사람이잖아. 데저트 플란넬도 잠깐 화가 난 것 뿐이야. 널 미워하진 않을 거야.”
그건 분명 위로였다. 바니바니 한 사람을 위한 위로. 하지만 그 위로를 들으면 들을 수록 바니바니는 거세게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시카고에서 그녀는 아주 자랑스러운 인재였다. 사람을 돕고, 사람을 구한다. 그것은 그녀가 재단에 합류하게 된 이후에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녀의 상사라고도 볼 수 있는 버틴 역시 그녀를 믿었다. 그녀의 능력이 분명, 아키타 센보쿠 대지진에서 필요할 것이라 믿었기에 그녀를 구조대로 추천했다.
사람을 구하는데 힘을 썼던 바니바니가, 지금은 누군가를 위협하는 데에 그 힘을 사용했다. 그 사실이 바니바니는 너무나도 후회스럽고, 힘들었다.
“제가... 무슨 짓을 한 거죠. 저는... 쓸모 없는 사람이 된 건가요?”
“... 마리안나.”
버틴은 솔직히 곤란했다. 바니바니라는 사람이 곤란했던 게 아니다. 버틴이 타임키퍼의 길을 걷기로 한 뒤, 수 많은 마도학자들을 지나쳤다.
그 중에는 당연히 폭풍우 속에서 사라진, 그녀의 친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었다. 폭풍우가 아니더라도, 하루 아침에 재건의 손에 살해당한 이. 그리고 자기 자신의 능력이 폭주하며 자멸한 이.
버틴은 수 많은 일을 겪었다.
버틴이 수 없이 들었던 말.
마도학자는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 폭탄과도 같다.
마도학자를 위해 일하면서도, 버틴에겐 그 말이 가슴에 못처럼 박혔다. 그 말을 부정하면서도, 어디선가 불안감이 자라났다. 버틴이 무서웠던 건 능력이 폭주한 자신의 친구가 다른 이를 집어삼키는 게 아니었다.
폭주한 자신의 친구가 사라지는 것, 그 자체였다.
수 없이 많은 친구들을, 인연을 잃었음에도. 제아무리 단단해지려고 해도. 무던해지려고 해도.
그녀는 그것에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러 말보다 다른 걸 선택했다. 조용히 바니바니를 안아줬다.
바니바니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자기 자신에게 어이가 없었다.
“이 나이 먹고, 한참 어린 버틴 씨에게 안겨 있다니. 그래도 따뜻하네요.”
버틴이 바니바니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 밖에서 콘블룸이 조리실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웬일로 목도리를 감지 않은 그녀였다. 감기에 걸린 버틴을 위해 자신의 목도리를 빌려줬다. 그녀가 슈타지에 소속되었을 때, 그녀는 온열 주문을 배웠다. 추운 곳에서 오랫동안 가만히 있어야 할 수도 있었으니, 그녀에겐 필요한 주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도리에 온열 주문을 거는 것을 깜빡했다. 필요 이상의 배려였을 지도 모르지만, 버틴이 빨리 나았으면 하는 바람에 그녀는 버틴을 따라왔다.
하지만 콘블룸은 엿듣는 걸 좋아하던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게 조용히 빠져나왔다. 웃음이 나왔다.
“바니바니 씨에게 감기가 옮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혼잣말을 하면서 말이다. 정작, 자기도 모르게 코를 훌쩍이는 건, 잠에 든 버틴과 목도리를 함께 두르고 있던 콘블룸 본인이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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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고찰 좋아
몰입감 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