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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몇 년전 이야기다.


제노의 군사 훈련을 일찍 마친 로페라는 언니인 몰디르를 찾아갔으나 그녀의 방은 비어있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방을 나서려는 찰나, 커다란 옷장이 눈에 띄었다.


장난기가 든 로페라는 옷장을 열어보았다. 자신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기가 컸다.


로페라는 예전에도 방안에 숨어있다가 몰디르가 오면 깜짝 놀래키곤 했다. 다정한 언니는 동생의 짓궃은 장난을 언제고 받아주었다.


추억을 새록새록 되새긴 로페라는 걸려있던 제복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안에서 옷장문을 닫았다. 몰디르도 곧 일과를 끝낼터이니 그녀가 돌아오는데로 뛰쳐나와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다.


옷장 속은 문틈 사이 한 줄기 빛만 새어나오는 고요한 암실이었다. 깔끔히 정돈된 제복에서 몰디르의 체취가 묻어나왔다. 마치 언니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워있던 편안한 감각을 느낀 로페라는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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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눈을 뜨자 사방이 캄캄했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실내에서는 작은 조명 하나만이 빛을 발했다.


옷장 속에 쪼그려 앉아 해가 지도록 잠에든 것이었다.


방금 깨어난 로페라는 방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무심코 긴장했다.


문틈 사이를 들여다보자 누군가의 실루엣이 움직였다.


몰디르인가?


건조해진 눈을 비비며 옷장을 나서려던 로페라는 순간 몸이 굳었다.


안대를 쓴 남자의 얼굴은 분명 톨레미였다.


로페라는 오랜만에 본 형제에게 반가움 보다는 의문이 앞섰다. 톨레미가 왜 몰디르의 방에 있는거지? 그것도 한밤중에 말이다.


'그래서 와인은 어땠어?'


톨레미가 유리잔을 정리하며 말했다.


'으음..거듭 말하지만 난 와인보다는 위스키가 체질에 맞아.'


몰디르의 목소리였다.


몰디르는 방 왼쪽 침대에 앉아있는 모양이었다. 이 각도에서는 그쪽이 잘 보이지 않는다. 톨레미와 두런두런 대화하는 그녀의 말투는 다소 이질적이었다. 둘이서 같이 술을 마신건가?


매사에 성실하고 철두철미한 모습을 보이던 언니가 취해서 흐트러진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술 상대가 톨레미라고?


아직 잠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로페라는 옷장 밖의 상황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지금 방안에 도는 분위기를 함부로 깨트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몰디르가 저토록 경쾌한 웃음소리를 내는건 처음 들었다. 로페라에게 있어, 톨레미는 남 괴롭히길 좋아하는 재수없는 형제에 불과하다. 하지만 몰디르와 서로 오래 알고 지낸 남매 사이이기도 하다. 


그들이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걸 지켜보자 왠지 소외감이 느껴졌다. 과거 이고르에게 입양된 로페라는 자매 중 하나였던 몰디르와 각별한 사이가 됐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자신이 모르던 낯선 모습이 존재했던 것이다.


방 안은 점차 말소리가 줄어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톨레미는 살며시 걸어가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시트 위로 풀썩 내려앉는 소리.


둘은 작게 속삭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거지?


로페라는 자연스레 귀를 기울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더불어 알아듣기 힘든 소리가 났다.


무언가 달싹거리고, 꿈뻑거리는 듯한.


소리는 한참 들려오지만 그럴수록 도통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작은 소리로 들썩이고..


숨을 내쉬고,


꿀꺽이며,


축축한 감촉..


깨달았다.


입맞춤 소리다.


옷이 구겨진다. 살결을 타고 흘러내린다. 침대 시트와 바닥 위로 떨어진다.



시야 밖의 일사분란한 소음은 여실한 분위기를 풍겼다.



두 남녀가 서로 살을 맞대며 뒤섞이는 원초적인 감각.



로페라는 속이 매쓱거렸다.


방 한구석에서 비추는 미약한 조명에 현기증이 났다.


경악과 충격. 압도하는 혼란. 호흡을 조절할 수 없다. 방안에서 쉬지않고 울리는 신음소리와 한숨소리. 부산스런 아우성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지금 로페라에게 가장 부족한건 호흡도 이성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결핍된 건 현실감이다.


로페라는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


가까스로 호흡을 조절한 로페라는 손을 들어, 여성의 교성과 살결의 부딪힘 사이, 왼쪽 문을 밀어, 흔들리는 두 사람의 그림자와, 문틈 사이가 벌어지며, 희미한 빛이 눈물흘리는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 자신을 기다리는 현실을 마주했다.


'어머.'


로페라를 돌아본 여자가 당황한 듯 웃었다.


'여기서 문을 열 줄은 몰랐는데요.'


튜즈데이다.


'제가 실수했어요. 여기서 마무리 지어야겠네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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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페라는 정신을 차렸다.


'로페라, 어때? 거미야? 역시 거미였지?'


금발의 소녀가 말했다.


주변을 돌아보자 낯익은 마도학자들이 보였다. 다같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자신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 이곳은 여행 가방이다.


'로페라가 너랑 같은줄 알아? 겨우 거미를 무서워할리가 없지.'


레일라니가 자신을 놀리자 에릭은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이 바이킹님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거미는 그냥 다리가 많아서 별로인거라고..'


모임의 한가운데, 튜즈데이가 아이들의 소란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주관하는 공포 체험 활동은 체험자가 가장 무서워하는 환상을 경험하게 해준다. 환상 속에서 거미에게 쫓긴 사람은 현재까지 에릭이 유일했다.


'자, 자, 체험이 끝났으니 이제 로페라의 소감을 들어볼 차례에요. 어때요, 로페라. 너무 무섭지는 않았나요?'


튜즈데이가 로페라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로페라, 괜찮아? 표정이 안좋은데...뭐가 보였던거야?'


주위에 침묵이 감돌자 로페라는 애써 입을 열었다.


'거,거미야! 거미 맞아. 하하...'


그 대답에 에릭은 크게 기뻐했다.


'봤지! 봤지! 다리 여덟개는 역시 너무 많단 말이지! 크하핫!'


레일라니와 몇몇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로페라가 에릭 편을 들어준거라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늘 모임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다들 즐거운 시간 되셨기를 바래요.'


튜즈데이가 마무리를 지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은 짜릿한 경험을 회고하며 여운을 되새겼다.


로페라는 겨우 표정을 유지한 채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튜즈데이는 남몰래 입맛을 다셨다.


누군가의 공포가 환상에 가깝다면 다른 누군가는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


똑같은 테마를 반복하기는 싫지만 이번에 끊긴 이야기의 마무리는 지어야했다.


다음번엔 몰디르의 임신 소식으로 놀래켜봐야 겠어요.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