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억....허억...'
울렁거린다. 허나 꽤 오랜만이다.
자고 일어난 후 느껴지는 끈적하면서도 서늘한 식은땀은 적응된 듯 하면서도 묘한 거부감을 준다. 놀란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쿵쿵거린다. 마치 맹수를 피해 서둘러 도망치는 사슴처럼. 몸이 기억하는 떨림은 그녀에게서 쉽게 도망갈 생각을 하지않는다.
그 꿈이다. 한동안 꾸지 않았던,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것 같았던 그 꿈.
잊지말라던 말은 지금의 그녀에겐 저주가 되었다. 땅밑 깊이 파뭍어 숨겨둔 족쇄를 기어코 캐내에 다시 손목에 채운다. 어젯밤의 그녀는 다시 한번 죄수가 되어 살아있었다. 그리고 그 죗값은 방금 막 일어난 오늘의 그녀가 겪고 있는것이다. 축축한 식은땀과 울렁거림과 함께. 꽤나 불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못 한다는 표현이 옳다.
상파울루에서의 일정은 그녀에게 끔찍한 피로감을 선물하기에 충분했다. 갑작스러운 배의 침몰, 이고르의 배신, 수차례의 전투는 그녀가 짊어져야 할 여행가방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녀를 망가트리기 위해 설계된 신의 계획에서 그녀는 살아남았다. 아직 그 계획이 끝나지 않았을 뿐.
그녀는 가벼운 세수를 마치고 의자에 앉았다. 짙은 빛깔의 둥근 선반 위에는 토피사탕 껍질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아직 까지 않은 토피사탕들이 열심히 굴러다닐 준비를 하고 있다. 어지러움이 아직 가시지 않은 그녀는 그 사탕과 눈을 마주쳤다. 언제봐도 참 먹음직스러운 구릿빛, 약간의 보라색이 섞인 듯한(어쩌면 피로한 그녀의 착각일 수도) 사탕은 어느샌가 그녀의 입속을 구르고 있다. 데굴데굴...
토피사탕의 향을 느끼며 그녀는 캠벨선생님에게 가고 있다. 그녀는 선생님을 뵈러가기 전에는 꼭 사탕하나를 입에 넣고 간다는 사실을 무심히 깨달았다. 선생님의 양호실은 반가운 공간이였다. 침체적이기 짝이 없는 교실에 비해 퍽 자유롭고 포근한 곳이다. 매끈한 흰색 바닥과 뭔지 모를 서류들은 딱딱하기보단 부드럽게 다가온다.
'어디가 아픈가요?'
'배가... 아파요'
'숨 크게 쉬세요'
'흐헥흐헥'
'이상하게 쉬진 마시고요.'
'...'
쌍방 모두 병명이 거짓말인줄 알고 했던 그 진료는 지금의 그녀에겐 소소한 추억으로 남아 그녀의 입가에 어렴풋한 웃음을 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지금은 그런 소소한 웃음거리에 맞장구칠 시간이 없다. 아니.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그녀는 그러한 사치를 잊은지 오래다.
'똑똑'
...조용하다.
'...똑똑똑'
그녀는 답장없는 편지를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답장이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선생님은 책상에 엎드려서 잠시 주무시고 계셨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마치 수업 중 자고 있는 학생처럼 보였다. 그녀는 조심히 들어와 문을 닫았다. 더이상의 소음은 선생님의 잠을 방해하면 안된다.
그녀는 자고있는 선생님 뒤에 있는 낮은 사물함에 조심히 서류를 올려두었다. 선생님의 얇고 조심스러운 숨소리가 옆에서 들려온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옆에 있던 의자에 청색 담요가 걸려있다. 부슬부슬한 기분 좋은 담요는 자고 있는 이를 살며시 덮어줄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 약간 까치발을 들며 조심스럽게 나가려는 그 순간, 그녀는 누군가의 주춤거림을 느꼈다.
'버틴...'
'제가... 깨웠나요?'
'아니에요. 고마워요 버틴.'
방금 막 일어난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은, 그러나 한결같이 따스한 목소리 였다. 선생님을 깨운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그녀는 당황한듯 머뭇거렸다. 그러나 겉으로는 티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정적이다.
'이번에 상파울루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거죠? 몸상태가 많이 안좋아보여요.'
선생님의 말은 또다시 그녀를 당황하게 한다. 그녀의 고통은 남에게 비추어 지면 안된다. 그녀는 방향잃은 죄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보통의 여행가방을 들고 다니는 자에게는 쉽게 죄책감이 보이지 않는다. 여행은 언제나 양발을 산뜻하게 만들어주고 광활한 세계를 똑똑히 담아가야할 두 눈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여행이란 그리 밝은 단어가 아니다.
다른 이들은 자신의 가방에 여행지의 다양한 기념품, 지인들을 위한 선물, 역설적이게도 더 밝은 세상을 보기 위해 밝기를 낮춰주는 멋나는 선글라스 등을 챙겨온다. 경쾌하고 신나는 웃음소리, 사진기의 찰칵거리는 셔터소리, 편안함의 한숨, 흥얼거리기 좋은 노랫소리들 또한 챙겨야할 것이다. 그녀 또한 여행이 끝나고나면 여행가방 안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때가 있다.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가득해야하는, 가득했어야만하는 여행가방이 공허할 때가 있다.
그 공허함은 영원토록 채워지지 않고 여행가방 주인의 오른쪽 가슴에 남아 공명한다.
..........
'저는 괜찮습니다.'
거짓말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허나
그녀는 아직 어리다.
많은 이들은 어른이 되기전 많은 실수들을 하게 된다. 과거의 실수들을 알고도 다시 한번 똑같은 일을 하게 되는 일이 대다수이다.
'버틴.'
그녀는 아직 어리다.
'조금은 기대도 좋아요'
지금의 그녀 또한 과거의 그녀가 했던 일을 되풀이한다.
'조금은 털어놔도 좋고요. 조금은 투정부려도 좋어요.'
쌍방 모두 병명이 거짓말인줄 알고 하는 진료.
'아직은 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도 괜찮아요 버틴.'
어른은 아이의 거짓말에도 꾸중을 하지않고 차분히 아이를 안아주었다. 의사로서 그녀가 환자에게 내린 처방이다.
'저도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일게요.'
'...'
'...'
공명이 잠시 잦아들었다. 지금 그녀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적다. 몽롱한 울렁거림이 느껴진다. 자고 일어났을 때의 어제의 죄수가 아닌, 입안에 토피사탕 향이 남아있는 오늘의 그녀가 느끼는 것이다. 그 한순간만큼은 그녀는 잠시 그녀의 여행가방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따뜻하죠?'
'네...'
'믿음은 믿음으로 보답하면 되고, 빌린 어깨는 어깨로 갚으면 되요. 투정부려도 용서해줄게요.'
그녀는 아무말없이 잠잠히 듣고 있다. 마치 양호실 침대에 누워서 듣는 선생님의 조언처럼. 선생님은 언제나처럼 조언한다.
'알겠죠, 버틴?'
이제 아이가 대답할 차례다.
'네 선생님'
•이 글은 '부엉집사' (대만신)님의 만화를 각색한 것입니다.
•원본 (꼭보셈ㄷㄷ)
•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귀엽게 봐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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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게 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