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a7c227abc236a14e81d2b628f17d6a84581638


1eadd132eddd3ca36ff1c6bb11f11a39e915471e2889aa976cca


'다시 한번 말해두겠는데, 나는 지금 정신과 의사로서 이 자리에 앉은게 아니야.'



메스머 주니어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상대의 사적인 부탁에 응해 만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맞은편에 앉은 소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만남이 익숙하지 않았기에 초조한 기색으로 방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이게 심리 상담은 아니지만, 긴장할 필요는 없다고 해둘게. 여기서 나누는 모든 대화는 비밀이 보장될 거야.'



..사적인 대화니까.



메스머는 직업 윤리를 주창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환자에게 거울을 들이대는 시대착오적 상담사와 동급이 되고싶지는 않았다.



여러모로 불편한 상황이다. 차라리 버틴을 찾아가기를 권유했으나, 그녀 나름대로 메스머를 찾아올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스파토데아는 이내 자신과 에즈라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



여행 가방에서 에즈라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난 스파토데아는 점차 자라나기 시작한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에즈라는 다정하고 친절하다. 상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씨에는 진심이 서려 있었고, 타인의 경계심을 사르르 녹게 만드는 배려 깊은 언행에서는 일종의 아름다움마저 느껴진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먼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나란히 걷다가 손을 마주잡고, 영화를 보다가 어깨에 기대고, 방으로 돌아가기 전 입맞춤을 시도한 건 모두 스파토데아 쪽이었다.



매일 같은 훈련과 숙제의 반복으로 지쳐가던 그녀는 에즈라와 나누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삶의 활력을 얻었다.



아침에 만나면 성큼 다가가 뺨에 입을 맞추곤 했다. 에즈라는 언제나 부끄러운듯 얼굴을 붉혔다.



그날 아침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에즈라가 어떤 화제를 꺼내기 전까지는.



'날계란은 너무 비위생적이에요, 스파토데아.'



프로 복서인 스파토데아의 아침 루틴은 날계란 세 개를 풀어서 한입에 삼키는 것으로 시작된다. 매일같이 계란을 먹는 그녀를 지켜보던 에즈라는 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이렇게 먹고 탈난 적은 한번도 없는걸요. 중요한 대회에서 우승한 날에도 빠짐없이 날계란을 먹었어요.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저만의 비법이라고 할 수 있죠.'



미소를 띤 스파토데아는 방금 계란을 삼킨 빈 컵을 자랑스러운 듯이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에즈라는 학계에서 이미 검증된 객관적인 정보를 두고 쉬이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살모넬라균의 위험성과 날계란의 영양학적 비효율성을 소상히 설명했다.



라플라스의 박물관장이 자신의 일관된 태도를 굳히자 스파토데아는 결국 손사례를 쳤다.



'알겠어요. 알겠어. 앞으로는 구워서 먹을게요.'



'저는 제가 알고 있는 건강 지식을 무시할 수 없을 뿐이에요.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해요.'



확실히 에즈라는 최연소 버섯 박사로써 총명한 소년이다. 이것도 일종의 소명의식이라 할 수 있겠지. 혹은 직업병이라 해 두어야 하나.



이날 스파토데아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



한번은 서로 심하게 다투었다.



에즈라와 박물관 데이트를 하던 날이다.



스파토데아는 오랜만에 에즈라와 데이트를 한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들떠있던 그녀에게 에즈라는 어쩌다 주의를 주었다.



대화 몇마디가 오고가다 사소한 말실수가 튀어나오자 곧 소란스러운 말다툼으로 번졌다.



'에즈라는 제 행동을 너무 심하게 제약하는거 같아요. 제가 그렇게 못미더운 가요? 평소에도 먹는 음식 하나하나에, 시험 성적에, 심지어 훈련 방식까지 간섭을 하잖아요.'



'저는 그저 인간과 마도학자간의 심리적 차이점을 명시하고 싶었어요. 확실히 스파토데아가 민감하게 여길 주제였는데 제 생각이 짧았어요. 미안해요.'



둘은 더 이상 말이없었고 분위기는 돌연 어색해졌다.



그때 박물관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에즈라를 찾아왔다. 무언가 급한 일인 것 같았다.



'스파토데아. 실례지만 사무실을 다녀와야겠어요. 잠시 기다려주세요.'



'알겠어요..'



홀로남은 스파토데아는 터덜터덜 걸으며 전시물을 둘러보았다.



내가 충동적이라고?



에즈라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충동적. 그 단어가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에즈라에게 악의가 없다는건 알고있다. 마도학자에 대한 에즈라의 평가에 이미 수차례 발끈하고 수차례 납득했다. 이건 자신과 에즈라의 관계를 넘어선 훨씬 거대한 범주의 문제였다.



스파토데아는 자신앞에 진열된 붉은 물체앞에 멈춰섰다. 중심의 균열 사이로 황적색 균류가 자라나있는 단단한 바위는 마치 울루루 경기장이 연상되었다.



그녀의 소명인 울루루 대회 역시 그 거대한 문제 앞에 무력해지지 않고자 만인이 한마음으로 뭉치는 숭고한 의식이다. 차이와 편견마저 뜨겁게 불사지르는 화합의 장.



그녀는 무심코 바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거기 손 때세요!'



'네?'



스파토데아가 정신을 차린 순간, 때는 이미 늦었다. 적색 바위 사이로 그보다 더 붉은 불꽃이 일었다.



달아오른 바위의 열기에 버섯들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



뒤늦게 달려온 에즈라는 스파토데아가 다치지 않았는지 물어보며 속상한 기색을 애써 숨기는 듯 했다.



죄스런 마음에 짓눌린 스파토데아는 그저 사과밖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이건 당신을 혼자 두고간 제 실수이기도 해요. 무엇보다 마도술 감응의 위험성을 간과한 저의 설계 부실이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이에요.'



마도학 바위를 둘러싼 경고문구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스파토데아는 막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지금은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민폐 같았다.



'미안해요 에즈라. 저는 왜 이렇게 생각이 짧은 걸까요. 당신말이 맞았어요 저는 너무 충동적이에요.'



자기 자신에게 충격을 받은 스파토데아는 이제 막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에즈라.. 그동안 제 고집이 너무 심했어요. 앞으로는 에즈라의 의견을 따를게요.'



아닌게 아니라, 스파토데아는 에즈라의 모든 조언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극단적인 태도의 변화에 당황하는 반응이 일었지만, 스파토데아는 그렇게 해서라도 에즈라에게 사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쩌면 염치없게 들릴 수 있지만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고싶지 않아요. 저는 저희 사이에 공평한 관계가 유지되길 바래요.'



울루루 대회를 준비할때도 상대의 의도를 넘겨짚은 그녀는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그런데도 비슷한 과오가 한차례 더 반복되자 통제력을 상실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에즈라는 그런 스파토데아가 안쓰러웠다. 자신은 그녀의 연인이 아닌가. 자신이 지켜줘야 했는데.



'알겠어요, 스파토데아. 그걸로 당신 마음이 편해진다면 저도 노력해볼게요.'



에즈라는 마지못해 수락했다. 그의 결연한 표정은 다분히 의미심장했다.



---



에즈라는 우선 스파토데아의 학습방식부터 손보고자 했다. 그녀의 부진한 학교 성적은 에즈라가 항상 도와주고 싶어하던 분야다.



시험계획을 면밀히 세우고 학습 방향성을 명확히 설정했다. 그의 지도하에 스파토데아의 성적은 눈에 띄게 향상됐다.



터무니없이 수월했다. 진작에 도움을 받지 않은게 후회될 정도였다.



에즈라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학술 논문을 바탕으로 스파토데아의 훈련 루틴을 완전히 새롭게 바꿨다. 식단은 다양한 종류의 버섯을 재료로 사용하여 영양소를 고루 챙겼다.



스파토데아는 급격한 변화에 어려움을 맛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에즈라는 이렇게 덧붙혔다.



'처음에는 낯설어도 반복하면 익숙해질 거예요. 당신은 늘 그런 식으로 강해졌잖아요. 그러니 저를 믿고 따라와주세요.'



어떤 날은 에즈라가 이렇게 말해왔다.



'마도학자의 충동성을 억제하는 기초적인 인지치료법을 찾아봤어요. 지금부터 제가 시키는데로 따라해보세요.'



스파토데아는 순간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단순한 테스트를 시작했다.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기.



몇 분간 눈감고 무릎 꿇기.



양손을 든채로 다음 지시 기다리기.



'정말 잘했어요.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결과에요.'



별 것 아닌 동작만으로 칭찬 세례를 받자 다소 얼떨떨했지만 에즈라의 밝은 미소는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에즈라는 인지 치료의 강도를 높여갔다. 처음엔 명상과 감정 억제를 위한 단순한 과제가 주를 이뤘으나, 이번엔 스파토데아가 실수를 저질렀던 박물관을 다시 방문할 것을 제안했다.



'스파토데아, 당신은 충동성 조절에 실패할 때마다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워요. 마치 복싱 연습에 몰두할때 처럼요. 그건 되려 역효과를 낼거에요.'



그는 무언가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이건 일종의 억제 훈련용 도구에요. 당신이 스스로를 통제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줄거에요.'



생소한 외관에 반사적으로 거부감이 일었으나 에즈라는 그녀를 다독였다.



'이걸 자신의 결손으로 여기지 마세요. 오히려 당신이 얼마나 책임감 있는지를 증명해줄 거에요.'



'에즈라, 꼭 그 박물관을 다시 가야 하나요?'



스파토데아는 망설였으나 에즈라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진지한 표정으로 독려했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용기라는건 두려움이 없을 때가 아닌,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소망하는 일을 추구할 때 가장 빛나는 덕목이라고 들었어요. 처음 목표했던 당신의 소망을 잊지 않는다면 분명 해낼 수 있을거에요.'



그날 밤, 두사람은 박물관으로 향했다. 관람시간이 지나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다. 에즈라는 자신의 열쇠로 잠긴문을 열었다.



뒤에있던 스파토데아는 손을 떨었다. 에즈라는 살며시 손을 잡아 떨림을 멈춰주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치자 응원의 눈빛이 전해져왔다.



용기를 얻은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박물관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



줄곧 담담히 이야기하던 스파토데아는 솟아오르는 감정을 견디지 못했는지 울음을 터뜨렸다. 메스머는 티슈 몇장을 건넸다.



오랜 상처와 고름. 가슴 깊이 묵혀놓은 고통이 터져나오는 익숙한 광경이다.



그런데 에즈라란 말이지..



라플라스의 괴짜들마저 에즈라의 인품을 높이 평가해왔다. 심지어 메스머 자신조차 말이다.



순혈 인간에 대한 메스머의 개인적인 흥미를 차치하더라도 그의 됨됨이와 업무적 성과는 실로 인정할만 했다. 에즈라의 관리하에 박물관은 훨씬 융성해지고 열정과 탐구심이 살아숨쉬는 관람의 장이 되었다.



맞아, 박물관.



메스머는 올바른 경청자로써 여지껏 그 미덕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지금, 이것 하나만큼은 성급히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문닫힌 박물관을 에즈라와 함께 갔다는 말이지.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



훌쩍이던 스파토데아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한참을 고민하는듯 했다.



그녀는 아무말도 없이 자신의 가방을 집어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쑤셔넣은 까만 비닐봉투를 꺼내들었다.



이를 내려보며 잠시 망설이던 스파토데아는 비닐 입구에 손을 넣었다.



비닐이 구겨지며 한동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손에 쥔 검은 물체가 꺼내져 책상 위에 놓였다.



가죽 벨트와 금속 버클.



개목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