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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멋진 아침이네요.'



이졸데는 커튼을 열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하늘 위로 막 피어오른 태양이 노르스름한 빛을 발하며 청명한 대지를 어루만졌다.



유리 너머 전해져 오는 햇살의 따스한 감촉이 피부 위에 스며들었다.



이졸데는 세상의 풍경이 하루하루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그저 놀라웠다. 그동안 여행 가방에서 지내며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녀는 새의 지저귐에 귀를 기울였다. 꽃의 향기를 맡고 음식의 풍미를 즐겼다. 명망 높은 귀족의 요식 행위가 아닌, 단지 살아 숨쉬는 인간으로서 말이다.



이는 버틴의 도움이 컸다. 한때는 버틴을 자신의 새로운 구원자로 여기기도 했으나 그녀는 이졸데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도록 여러 방면으로 도왔다. 



소소한 교류활동과 가벼운 잡담. 이졸데는 사람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하고 생소한 분야를 접했다. 



기사의 유머와 메이드의 공포, 크리터 훈련과 울루루 대회, 버섯 과학에 이르기까지, 세상에는 과연 많은 것들이 있었다.



때때로 다같이 이졸데의 오페라를 감상하고 노래 실력을 칭찬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 어떤 공허한 선망도 오고가지 않는, 상호간의 평등한 관계를 형성했다. 



이를 통해, 살면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을 누렸다. 한번은 누군가 실없는 농담을 던지자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짓기도 했다. 



어느새 이졸데는 구원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소박한 삶의 선물을 소중히 여기는 것 만으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졸데는 망령의 울부짖음과 미치광이의 난입, 그리고 악몽. 그 어느 것이 찾아온다 해도 이토록 동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원이 자신의 방문을 두드렸다.



---



이졸데는 차를 내왔다.



카카니아는 작게 감사 인사를 하며 이를 받아들였다.



이졸데는 조심스레 카카니아의 안색을 살폈으나 불면증, 창백함과 같은 불안한 징후만이 눈에 띄었다.



최근 카카니아의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갔다.



그녀는 폭풍우 너머 미래에 도달했다. 그리고 수십년의 풍파를 맞은 심리학 역시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카카니아는 현대에 정립된 개념들의 논리정연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을 파악하고 적응하는데 좀처럼 어려움을 겪었다.



산더미같은 심리학 저서들에 파묻힌 그녀는 숙소 밖을 떠날 수 없었다. 자신의 소명이자 생업으로 삼던 일이 하루아침에 저 멀리 떠나버린 듯한 감각에 초조함을 느꼈다. 



더군다나 집에서 홀로 잠들때면 악몽을 꿨다. 빈의 건물과 광장의 사람들. 



향수를 자극하는 광경이, 그 대기에 어려있는 특유의 감촉이, 예술과 이상을 좇는 대중의 열정이, 모두 한 폭의 유화에 녹아들어 끔찍한 비명으로 번져나갔다.



카카니아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정신을 갉아 먹혀 점차 쇠약해졌다.



'이제 저에게 남은 고향 친구는 당신 뿐이에요..'



카카니아는 자신의 심정을 토해내는 와중에 괴로움 또한 삼켜야 했다. 



두 사람은 폭풍우가 지나가고 여행 가방에서 재회했다. 그러나 카카니아는 이졸데를 마주할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줄곧 외면해왔다.



관계 매듭을 유보한 과거의 망설임이 지금 이 순간, 위선의 고통으로 변모한 것이다.



가여운 사람.



이졸데는 카카니아를 동정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원망했다.



자신이 빈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지금은 그 일부만이라도 이해하게 되었다. 당시 이졸데는 자신의 행동이 카카니아의 소망을 이뤄주는 것이라 믿었지만 실은 스스로의 망상어린 구원을 쫓는 행위였다. 



텅빈 화병이나 다름없는 그녀가 추구하던 것이란, 결국 비어있는 자기 자신만을 담으려 든, 한줄기 이기심에 불과했다.



하지만 현재의 자신은 다르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졸데는 부디 자기 자신이 카카니아의 괴로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는 추악하고 잔인한 인간이에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저의 평안만을 갈구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의 가장 소중한 친구인 선생님의 친절을 배반했어요.'



이졸데는 이전처럼 흐느끼지도, 애걸하지도 않았다.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죄를 직시했다.



'저에게 선생님의 용서를 구할 자격은 어디에도 없을거에요. 하지만 선생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충실한 친구로써 그 짐을 덜어드리고 싶어요. 저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뉘우칠 수 있다면..'



조용히 듣고있던 카카니아는 뭐라 할말이 없었다. 그저 이졸데에게 다가가 그녀를 깊이 껴안았다. 안경 너머 붉게 달아오른 눈시울에는 눈물이 맺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카카니아가 잠든 것은 그날 저녁이 되기 전이었다. 



이졸데는 카카니아가 자신의 방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을 수락했다. 그녀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안심한 카카니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 위를 향해 기절하듯 쓰러졌다.



이졸데는 이불을 덮어주고 외출할 준비를 했다.



카카니아를 대신해서 그녀의 짐을 가져와 줄 것을 약속한 것이다.



건물의 위치는 멀지 않았다. 그녀가 건네준 열쇠로 문을 열고 실내 조명을 켰다.



카카니아의 방 구조는 빈의 상담실을 그대로 옮긴 듯 했다. 다만 차이점은 거울의 상태였다. 전시하듯 나열된 수많은 거울들이 하나같이 산산조각 나 그 파편이 사방에 널려있었다. 거울을 향해 사정 없이 던져진 듯한 두꺼운 책들 또한 곳곳에 떨어져 있었다.



그녀의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한동안 멍하니 서있던 이졸데는 겨우 발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널려있는 날카로운 거울 조각에 주의하면서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짐을 거의 다 싸놓을 때 쯤, 서랍에서 작은 손거울을 발견했다. 수수한 디자인의 금속 손잡이가 달린 거울은 어디 금간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이졸데는 혹시 몰랐기에 그 손거울만 따로 챙겨두었다.



최대한 서둘러 돌아오자 카카니아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근 며칠간 잠들지 못하고 깨어있었다고 했다. 침대 위에 움츠린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연약해 보였다.



곤히 잠든 카카니아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는 무척이나 작았다. 



이에 무심코 귀를 기울이던 이졸데는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얼굴을 들여다보자 매우 평온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이졸데는 안도감이 들었다.



지금은 피곤에 못이겨 굳게 닫혀있는 저 눈꺼풀 뒤에서는 열정적인 이상주의자의 눈이 빛을 발하곤 했다.



편견과 억압이 없는 이상향. 존재하지 않는 땅에서 발하는 영롱한 색조. 그 아름다움이 의미하는 숭고함을 알아차린 순간, 이졸데는 자신의 마음을 뺏겼다.



그저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몸을 기울여 베개 위에 파묻힌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몸에서 빈에서 쓰던 향수 냄새가 났다. 카카니아의 취향은 여전히 바뀌지 않은 모양이다.



우드향과 유칼립투스, 그리고 민트향.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감촉이 전해져왔다.



그녀의 숨결과 머리결의 향기. 묻어나오는 몸의 온도. 심장박동.



온갖 감각 사이에서 홀린 듯이 헤매이던 이졸데는 자신의 입술을 깨물며 무심코 그녀를 향해 손을 올렸다.



카카니아의 몸이 움찔거렸다.



'으음..'



놀란 이졸데는 뒤로 물러났다.



카카니아는 잠시 뒤척이는가 싶더니 살며시 눈을 떴다.



'선생님? 죄송해요, 저 때문에 깨셨나봐요.'



'어라, 이졸데 양.. 제가 잠들었었나요?'



'네.. 한 두시간 뿐이지만요.'



그녀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리곤 입을 가리며 짧게 하품을 했다.



'오랜만에 푹 잠든 것 같아요.'



카카니아가 이졸데를 응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윽한 눈웃음이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이해한 이졸데가 덩달아 웃었다.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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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함께 테라스로 나와 밤공기를 마셨다.



마치 빈에서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던 옛 기억들이 떠올랐다.



별이 빛나는 밤 아래, 두 여인의 흩날리는 머리카락. 꿈과 기쁨을 공유하며 서로를 알아가던 순간들.



향수에 젖은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레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여지껏 서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긴 시간 동안 웃음꽃을 피웠다.



어느덧 공기가 쌀쌀해지자 두 사람은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슬슬 잠들 시간이 되었네요.'



이졸데는 침대가 하나뿐이라 고민했다. 그러자 카카니아가 제안했다.



'이졸데 양만 괜찮으시다면 둘이서 한 침대에 자지 않겠어요?'



'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다고 그녀를 소파에다 재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이졸데 양.'



카카니아는 잠옷으로 갈아입지도 않고 침대 한가운데로 냉큼 올라갔다. 



이졸데가 당황하는 사이 그녀는 안경을 벗었다.



'제 마음은 상관하지 마세요.'



'네..?'



카카니아가 안경을 벗은 모습은 왠지 처음 보았다. 안경이 없는 탓에 확연하게 달라진 인상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잠들었을때 제 얼굴을 가까이서 지켜봤죠?'



'...'



카카니아는 침대위에 다리를 모으고 다소곳이 앉아 이졸데를 바라봤다.



'이졸데 양은 굳은 결심으로 저를 받아줬어요. 그리고 저는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주는게 어떤 기분인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게 되는지 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카카니아는 이졸데를 향한 시선을 유지한 채 고개를 살짝 아래로 기울였다.



뒤로 몸을 기댄 그녀의 자세는 문득 야릇하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상대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 상대가 소망을 이루는 걸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더군요.'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자신의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곤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설사 제가 주지 못하는거라도 말이죠.'



단추를 풀던 손은 얼마가지 않아 중간에서 멈췄다.



명치까지 열려있는 셔츠 사이로 감춰져 있던 속살과 속옷의 일부가 보였다.



여기까지가 스스로 드러내보일 수 있는 한계였다.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던 카카니아는 그 상태로 얌전히 대답을 기다렸다.



이게 무슨 일일까



이졸데는 여전히 종잡을 수 없었다.



연약한 체질의 몸은 얇은 현기증을 느꼈다.



호흡은 박자를 잃고 심장 박동이 크게 울렸다.



앞에 놓인 여성에게서 시선을 때지 못하고 한 걸음씩 앞으로 다가갔다.



보답하고 싶은 마음일까



침대위에 무릎을 대고 천천히 올라갔다.



주지 못하는 것일까



시트 위를 기어가자 공중에서 잠시 헤매던 두 손길이 상대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점차 가까워지는 거리에 맞춰 카카니아의 몸이 침대 위로 천천히 기울어 졌다.



자신의 마음은 상관하지 말라니



침대위에 완전히 쓰러진 그녀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손을 들어 왼쪽 뺨에 가까이 대자 카카니아의 목에 힘이 풀리고 눈이 스르륵 감겼다.



꿀꺽이며 한차례 침을 삼켰다.



고운 촉감이 손가락에서 손바닥까지 전해진다. 살과 살이 서로 스치며 소리를 낸다. 손끝에 닿은 말랑한 귓방울이 살짝 튕긴다. 그리고 밤공기에 차갑게 식었던 피부의 냉기가 전해지며 비로써 현실감이 와닿았다.



어두운 방안에 푸른 빛이 은은하게 감돈다. 창틀과 커튼의 기둥진 음영 사이 자신의 두팔이 침대위를 지탱하고 있다. 그리고 시선의 가운데 한 여성이 가슴팍을 풀어헤치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눈을감고 힘없이 누워있었다.



그러나 살며시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숨결에서는 긴장하는 낌새가 묻어 나왔다.



과거에 동경했었던 경치는 과연 이런 광경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또 한번의 공상을 놓지 못하고 미련하게 구는 것인가?



언제나 닿지 않던 이상향은 갈망하며 손을 내저을수록 오히려 멀어지기만 했다. 



그렇 다면 나는 다시 한번 비어 있는 자기 자신 으로

무언 가를 담아 내려 드는 어리 석은 인간 인것 인가



이졸데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