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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gna sereno intenso ed infinito!'



소네트의 한 구절이 날카롭게 빛났다.



예리하고 흠잡을데 없는 묘사였으나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그 의미는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지금 시점에 이르러, 소피아의 마도술은 자신보다 한 수 위였다.



잿빛의 소용돌이가 주위를 휩쓴다. 소네트는 완드를 치켜든 자세 그대로 몸이 굳었다.



소피아가 비웃어 보였다.



'이런일에 의미가 있나요?'



전투 중 손쉽게 제압당해버린 상황에서, 소네트는 일말의 씁쓸함을 느꼈다. 오랜만에 재회한 소피아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자신과 같이 붉은 머리를 가진 소녀는 과거 아페이론 섬 해안에서 함께 걸으며 속마음을 공유했었다.



스스로의 본질을 고민하던 그녀는 자신이 이룰 수 없는 거대한 사명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기꺼이 타인을 돕곤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마주한 소녀는 거리끼는 기색하나 없이 초연한 눈빛이었다.



그런 그녀의 검은 의복은 자신의 하얀 제복과 분명히 대조되었다. 그녀는 의심할 여지없이 자신의 적이었다.



소피아는 자신의 마도술 위력을 세심하게 조절했다.



'당신을 해치기보단 제압해두는게 현명하겠죠. 타임키퍼가 분명히 당신을 구하러 올테니까요.'



소네트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리 힘을 줘도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슨 방도가 없을까?



그 순간 어떤 생각이 짧게 뇌리를 스치자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녀가 0이기 때문인가요?'



아페이론 섬에서 37은 버틴을 숫자 0으로 규정했다. 방금까지 차갑게 미소짓던 소피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태어난 순간부터 섬겼던 진리, 자신이 버리고 떠난 세상의 섭리. 소피아의 사고방식은 과거와 완전히 분리되지 못했다.



소네트는 이를 간파했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이용해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니, 내가 버릴 수 있는 것. 손발조차 자유롭지 못한 이 상황에서 내가 바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있다.



소네트는 자신의 판단에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즉시 실행에 옮겼다.



'당신의 말이 맞아요. 타임키퍼는 분명 저를 구하러 올거에요. 단순히 동료라서가 아닌, 그것이 그녀의 본질이니까요. 37의 통찰은 틀리지 않았어요.'



소피아가 작게 코웃음 쳤다.



'37이라.. 그녀 이야기를 하면 제가 빈틈을 보이기라도 할 것 같았나요?'



그녀의 빈정거림에도 소네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37은 당신의 친구였어요. 당신은 스스로의 본질에 혼란스러워 하는 사이, 고통에 등을 떠밀려 재건의 손에 합류했을 거에요. 하지만 당신의 선택에 37은 무너졌어요. 당신도 그녀의 고통에 책임이 있단 말이에요.'



소네트는 말하는 와중에 점점 확신을 얻었다. 소피아는 조금씩 동요하고 있다.



37이 무너졌다고?



그게 무슨말이지?



소네트는 더욱 신중을 가하며 말을 이었다.



'37은 고향과 친구들을 한꺼번에 잃었어요. 그녀는 좀처럼 바깥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죠. 당신도 이젠 알거에요. 사회 속에서 타인에 무관심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고통마저 이용하려드는 추악한 사람들 또한 있다는 것을..'



소피아는 믿지 않았다. 37은 헤르메스의 가장 빛나는 별이다. 섬을 떠났다고 한들 그녀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는 현상세계의 부스러기에 더럽혀지는건 신경쓰지않고 항상 진리를 좇을 터였다.



그녀가 정말 좌절했다고?



더 이상 들어줄 수 없던 소피아가 소네트의 입까지 다물게 만들려던 순간이었다.



'그 남자는 37을 손쉬운 먹잇감으로 여겼어요. 세상 이치에 어둡고 사회에서 고립된 소녀를 말이에요. 자신이 구원자라도 되는 양, 37에게 애정을 주고 일상을 돌봐줬어요. 37은 순순히 받아들였죠.'



그도 그럴게 37은 머리를 빗질 해주지 않으면 자기 머리를 밟고 넘어지곤 했다. 진창에 처박힌 그녀는 흙이 묻은 얼굴에도 아량곳 않고 숫자와 도형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는 37이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고 원하는데로 이용했어요. 나중에 저희가 알아차릴때는 이미 늦어버렸죠. 그 남자는 체포했지만..'



'어설픈 거짓말은 이제 그만두시죠. 네, 맞아요. 솔직히 당신이 이렇게 나오는건 저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많이 애쓰셨지만 당신과 버틴씨는 그렇게 37을 방치해둘 사람들이 아니에요. 저는..'



소피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소네트의 눈에서 눈물 한방울이 떨어졌다.



그녀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저는..제가 병실을 찾아갔을때 37은 이불을 덮고 있었어요. 뺨에 거즈를 붙이고 있어서 놀랐지만 37은 숫자이야기부터 꺼냈어요..그래서..그래서 조금은 안심했는데...37이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이불을 들추니까....'



칭칭 감긴 붕대사이로 곳곳에 보이는 피멍들. 등쪽에는 화상자국이 크게 남았고 갈비뼈 몇개가 부러졌다는 의사의 설명.

남자의 집에서는 피임도구와 회초리, 목줄 따위를 무더기로 발견했다. 개밥그릇도 있었다.

그리고 수시로 뭉쳐서 골칫거리였던 37의 푸른 머리카락 다발은 투박하게 잘려 통째로 기다랗게 늘어놓으며 박제하듯 전시돼 있었다.



소네트는 자신이 그려낼 수 있는 잔혹함을 최선을 다해 묘사했다.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어떠한 시 소절보다 날카로운 예기와 같았다.



소피아는 사정없이 난도질당한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이 틈을 노린 소네트의 무장해제 마도술이 적중하여 힘을 잃었다.



소피아가 쓰러진 것을 확인한 소네트는 드디어 긴장을 풀고 숨을 헐떡였다.



'제가 졌어요. 당신이 저를 완전히 제압했어요. 이제 당분간 마도술은 못쓸거에요.'



바닥에 쓰러진 소피아가 담담히 패배를 인정했다.



'그러니 이제 말해주세요. 당신의 속임수였죠?'



소피아는 소네트에게서 진실을 확인해야 했다.



'제가 말한 것처럼 거짓말로 빈틈을 노려 저를 쓰러트린거에요. 당신 의도대로 흘러갔으니 이제 안심이 되시겠죠. 더 이상 거짓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나 소네트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쉽사리 자리를 떠나지도 못했다.



소피아의 눈은 공허했다.



'부탁이에요. 이게 얼마나 잔혹한지 알고 있잖아요. 저를 이렇게 두고가지 마세요. 잠시라도 이렇게 쓰러져 있느니 당신 손에 부숴지겠어요.'



소네트는 더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이 순간에도 타임키퍼가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요, 저는 적이잖아요. 그렇다면 완전히 끝내세요. 다시 일어나 당신을 헤칠지도 몰라요. 그게 아니더라도 당신이 일말의 동정심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진실을 말할수도, 목숨을 끊을수도 있는 거잖아요. 제발....도대체 왜...'



등 뒤로 소피아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녀가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렇군요, 저도 당신을 죽이지 않았죠. 타임키퍼를 유인하려고. 제가 자초한거에요. 소네트, 당신에게나 37에게나..'



멀찍한 거리에서 조롱하듯 일렁인다. 소피아는 진리의 허망함을 이 순간 다시 한번 체감하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