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녀 까까졸데 더 써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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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사람의 감촉은, 이졸데에게 생경하고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괜찮아요 아가씨?”
이 짧은 순간에, 눈앞의 초록색 소녀가 저지른 귀족영애 예의범절에 어긋난 행동이 몇 개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디터스도르프 백작에게 인정받은 신사이자 자신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쳤던 칼 씨는 가벼운 무례를 범한 상대에게 곧바로 그걸 지적하는 것은 올바른 귀족 여성의 태도가 아니라고 말했다.
올바른 방법은 상대가 스스로 무례를 깨닫도록 에둘러서 전하는 방법이니까…….
얼굴을 모르는 소녀가, 저택 대문을 익숙하다는 듯 뛰어넘어 와서, 자신을 거의 끌어안다시피 부축한다는 건 칼 씨의 위기 대처 수업에서 예시로 등장한 적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졸데는 수업에서 배운 것을 응용하려고 애썼다. 그 어떤 상황에 맞닥뜨린다 하더라도 당황하거나 품위를 잃어서는 안 됐으니까.
아주 친밀한 상대가 아니라면, 여성들 사이에서도 필요 이상의 신체접촉은 무례가 된다. 이졸데의 경우에는 어머니 에반젤린을 제외하고서 가까운 ‘신체접촉’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옷 너머로 전해지는, 허리를 감싸안은 팔의 감촉에 주의력을 빼앗기면서도, 이졸데는 침착하게 생각하려 했다.
[우리는 우아해야 하고, 자신을 억제해야 하며, 친절해야 한다]
[우리는 연민의 마음을 품어야 하고, 약자를 도와야 한다]
[우리는…… 모범이 되어야 하고, 증인이 되어야 하며, 올바른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귀족의 진정한 품격과 존엄을 갖춰야 한다]
상대방은 자신의 몸가짐이 흐트러진 것을 부축해 준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 부분을 참작해서…….
“식사는 제대로 하시고 계신 거죠? 너무 가벼워서 인형을 부축한 줄 알았지 뭐예요.”
무어라 말하려던 이졸데의 입이 닫혔다. 귀족 영애의 체중을 언급하는 것이 무례라는 것은 두말이 필요없는 일이다.
한 가지를 지적하기도 이전에, 상대방의 무례는 두 세가지씩 늘어났다. 묘하게 옷차림과 스타일이 좋은 아가씨는 귀족 영애로서의 몸가짐 같은 건 애초에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이졸데는 이내 납득했다. 예의범절 문제는, 잠시 포기하기로 했다.
디터스도르프 백작의 딸로서, 진정한 신사인 칼 씨의 제자로서, 오페라하우스의 빛나는 별이었던 어머니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서의 마음가짐을 져버리는 게 아니다.
그저, 아주 잠깐 내려두는 것일 뿐이다.
“…….”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녀를 괴롭히고 있던 어지러움이 사라지고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이졸데는 초록빛이 도는, 이 당당한 소녀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토끼를 돌본다는 핑계로 허락된 잠시동안의 휴식시간이 끝나면, 그녀는 또다시 수저를 움직이느라 팔이 마비되고, 하이힐에 발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수업을 받아야 할 터였다.
하지만 이상한 사람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그 모든 것들이 조금은 먼 일처럼 느껴지는 거였다.
“당신은…….”
“아, 수상한 사람은 아니예요. 제 이름은 클라라 윙글러예요. 이 근처 저택의 주민은 아니지만, 링슈트라세에 집이 있어요. 그리고 대문을 뛰어넘어 온 건 병약한 아가씨가 넘어질 것 같아서예요.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니라요.”
‘병약한 아가씨’라는 대목에서 이 이상한 사람은 눈웃음을 지었다. 이졸데는 말이 오페라 대본에서 읽었던, 악역으로 등장하는 남자의 사탕발림에나 나올 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극에서 그 남자는 여성들을 달콤한 말을 속삭이면서 주의를 끌고, 값비싼 물건을 훔치는 도둑이었다.
도둑.
확실히 그럴듯했다. 대문을 뛰어넘는 이상한 사람의 솜씨는 역설적으로 우아하기까지 했다.
그럼 이 사람은 무엇을 훔치러 온 걸까.
“당신은…….”
이졸데의 사고의 흐름은 현실 세계와 동떨어져 속도가 붙고 있었다.
눈앞의 사람을 도둑으로 단정하는 건 평소같았으면 엉뚱한 생각이라고 스스로 깨달았을 테지만, 이졸데의 현실감각은 이미 이 이상한 아가씨에 의해 반쯤 마비된 상태였다.
마침 소녀의 가슴팎에 매달려 있던 브로치가 눈에 들어왔다.
이상한 아가씨의 눈색을 닮은 터쿼이즈와, 드레스와 어울리는 빛깔의 토파즈.
이졸데는 그 브로치가 무척이나 어울리면서도, 동시에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다. 클라라라는 이 아가씨의 옷차림은 스타일이 좋았고, 모자에 달린 깃은 이졸데가 알기로 희귀한 새의 깃털이었다.
반면에 들고 있는 가방은 물에 젖은 적이 있는지 가죽에 주름이 졌고, 옷도 새 것이라기에는 오래 입은 느낌이 강했다.
값을 따졌을 때 브로치와 나머지 옷차림은 분명 균형이 맞지 않았다.
“당신은, 도둑인가요?”
부축해준 상대를 도둑 취급하는 건 무례한 일이라는 생각이 언뜻 스쳐지나갔으나, 이미 마비된 이졸데의 현실감각은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건 그녀가 꿔온 수많은 악몽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녀를 괴롭혀 왔던 악몽들 사이에서…… 좀처럼 없는, 편안하고 달콤한 꿈.
도둑이라는 말에 몸을 굳히는 상대방이 옷 너머로 느껴져서, 이졸데는 미소를 지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머니의 보석함에서 이상한 아가씨의 브로치를 닮은 액세서리를 언뜻 본 것도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면서 선물받은 보석이 무척 많았고, 그 중에는 디터스도르프 백작이 선물도 제법 됐다. 이졸데는 어머니 본인도 보석함의 내용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이졸데의 천진한 어머니는 보석보다도 사람들의 호의를 사는 것을 더 좋아했으니까.
보석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상징하는 거였고, 어머니는 분명 그 모든 선물에 기뻐했다. 다만 어머니는 늘 새로운 관심과 호의를 바랐다. 그렇기에 오페라를 관둔 지금은 ‘지난 일’에는 관심이 없는 거였다.
이졸데는 어머니가 자신을 강령회에 데려가는 이유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기억에도 없는 자신의 예언 때문에 사람이 죽은 뒤, 강령회는 더할 나위 없는 성황을 이뤘다.
이졸데는 어두운 촛불 사이에서 기이한 열망과 흥분으로 번들거리는 사람들의 눈빛을 기억했다.
이졸데가 정신을 잃고 난 뒤 깨어날 즈음이면, ‘신사와 숙녀’들은 앞다투어 어머니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머니에게는 보석함을 열어 지난 날의 선물을 확인할 필요도, 오페라를 계속할 이유도 없었다. 보석함은 이미 어머니의 관심에서 벗어난지 오래였다.
그러니까 저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브로치 하나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만약 클라라라는 이 아가씨가 진짜 도둑이라고 해도, 어머니는 저게 보석함에 있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할 터였다.
“저, 저는 도둑이 아니에요! 클라라 윙글러라는 이름도 진짜고, 링슈트라세에 있는 집의 주소도 말씀드리면 찾아오실 수 있어요. 나중에 확인해 보시면 진짜라는 걸 알게 될 테니까요……!”
옷 너머로 허둥거리는 상대방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다과회의 영애들이 결코 입에서 웃음기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표정에서 광기의 흔적을 찾아내려고 애썼던 것과는 사뭇 다른 반응.
이졸데의 입가에 다시 한번 미소가 피어났다. 눈빛은 꿈결에 있는 것처럼 몽롱했다.
“가져가셔도 돼요. 클라라 씨.”
이졸데가 클라라의 브로치를 매만졌다. 이어서 상대방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대문을 뛰어넘느라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졸데는 다과회에서 아주 친밀한 아가씨들 끼리 종종 그렇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예의에는 다소 어긋날지도 모르겠지만, 서로 무례를 용인하는 사이라면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졸데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무례를 용인하는 사이’
어쩐지 청량한 공기가 가슴과 머릿속을 채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져가도 된다니, 오해라니까요! 잠깐만 있어 봐요, 저는 거울 상인 윙글러의 딸이고, 아마 아가씨도 들어본 적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여기 제 집 주소를 적어 드릴 테니까…….”
이졸데에게는 한참 전처럼 여겨지는 대화 주제였지만, 클라라의 손놀림은 다급했다.
초록색 아가씨는 가방에서 능숙하게 깃펜과 수첩을 꺼내더니 잉크병을 깨물어 열고 깃펜를 적시는 기예를 선보였다. 이윽고 찢어진 수첩의 페이지가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서늘한 종이의 감촉은 질이 아주 좋은 건 아닌지 표면이 조금 거칠었다. 하지만 휘갈긴 듯한 필체도, 종이의 감촉도 진짜 같았다.
이졸데는 종이조각을 양 손으로 쥐고 소중한 것처럼 품에 안았다. 상대방은 이졸데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머리 위로 전구 하나를 밝힌 것처럼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클라라는 한 손으로 옷에 매단 브로치를 조심스럽게 떼어낸 뒤 이졸데에게 내밀었다. 여전히 다른 한 손으로는 이졸데를 부축한 채였다.
“이거, 일단 아가씨가 보관하고 계세요.”
이졸데는 클라라의 가슴팎에서 브로치가 떨어지자 기묘한 아쉬움을 느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이졸데가 준 다소 유치한 장신구를 하루만 착용하고 그 뒤론 착용하지 않았던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이졸데는 물끄럼히 그 브로치를 바라보았다.
별로 받고 싶지 않았다.
“만약 제가 훔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시면, 그때 다시 돌려 주세요. 그러면 되겠죠? 그러니까 이름이…….”
“……이졸데, 이졸데예요.”
다소 기이한 약속.
그렇지만, 분명 재회의 명분이기도 했다.
이졸데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쁜 이름이네요. 조만간 다시 만나길 기대할게요”
사람 좋은 미소와, 부드러운 말투.
아마도 이 아가씨가 무례를 심심찮게 저지르면서도 미움받지 않는 비결인 듯했다.
클라라는 모든 게 해결됐다는 생각인지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멀리서 어떤 신사의 중후한 음성이 들렸다.
“이졸데? 너무 밖에 오래 있으면 쓰러지는 게 아닌지 걱정되는구나. 슬슬 다음 수업을 준비해야지. 아펠슈트루델과 플라워도 그정도면 만족했을 거야.”
“이런, 저는 이제 가볼게요!”
칼 씨의 목소리가 가까워지자 이상한 아가씨는 바람처럼 대문을 넘어서 그대로 멀어졌다. 눈을 두번쯤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윽고 초록색 소녀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됐다.
“…….”
몇 초가 더 흐르자, 이졸데는 자신이 본 것이 봄날의 환영이 아닌지 의심해야 했다. 풀을 물어뜯고 있는 토끼들과, 가까워지는 신사의 발자국 소리를 포함한 모든 것이 이전과 같았다.
다만……
이졸데는 품 속의 종이를 매만졌다. 까끌까끌한 감촉은 여전히 초록색 소녀가 진짜이며, 그녀가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정보가 이 안에 적혀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가 도둑이 아닌 걸 확인하면, 그 브로치를 돌려주기 위해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졸데는 그 사실만으로도 어쩐지 위안을 받았다.
아펠슈트루델과 플라워도 클라라만큼이나 무해하고 귀여웠지만, 그 둘은 집안의 다른 토끼들과 마찬가지로 이졸데를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이게 몇 번째 아펠슈트루델과 플라워인지 모르겠네. 오늘 또 새로운 녀석 두 마리를 준비했더라…….]
메이드의 말을 들은 이후엔, 이졸데는 지금의 아펠슈트루델이 어제 무릎 위에 앉았던 아이인지, 아니면 ‘새’ 아펠슈트루델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사실 이제는 관심조차 없었다. 다만 토끼들과 어울리고 있으면 디터스도르프 백작이나 칼 씨가 안심하는 표정을 지으니까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만났던 이상한 아가씨—클라라는 다를 터였다.
이졸데는 브로치를 돌려주러 온 자신에게 환하게 미소짓는 클라라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럼, 그걸로 된 게 아닐까.
이졸데는 다음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수업을 들으면서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은, 왠지 기껍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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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쓸가
자연스럽게 밀회약속 잡는거보소
개추박고 나중에 찬찬히 읽어야지 으흐흐
한입만 더 할 수 있을까요...